바다를 향해 떠난 소년
‘400번의 구타’는 불어의 구어적 표현으로 ‘엉망진창을 만들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일이 닥치고, 그래서 말썽이 생기고 충돌이 생긴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400번의 매를 맞으면서 어른이 된다는 직설적 표현 안에는 의도하지 않은 시련을 겪으며 그 극복 여하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는 인생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우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소년의 이야기를 트뤼포는 전혀 불행하지 않게, 모두가 겪는 당연한 이야기로 그려내고 있다.
‘소년’이라는 말은 그 정체성이 미성숙하고 모호하다. 소년은 그들의 본래 성별인 남성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아직 남성이라기에는 미숙하고 때에 따라서는 어린 여자아이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의 외모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소녀들이 본래의 여성성을 어린 시절부터 인정받는 것에 비하면 소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소년들을 모호한 위치로 내몰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가만히 놔두어도 스스로 남자가 될 소년들에게 억지로 남성성을 강요한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소년은 울지 않는다’ 등의 소년과 관련된 어구들은 그들에게 사회의 남성으로서 강해지라고 요구하고 있다.
영화는 찌든 불우함을 거부하며, 아이들의 비행조차 경쾌하고 유머 있게 표현한다. 감독은 단지 어른의 시각으로 중죄를 지은 아이들의 본심은 어른들이 바라보는 것처럼 용서하지 못할 만큼의 나쁜 계획에서 기인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때로는 거짓말 또한 많은 꿈과 에너지를 내재한 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나타낸다. 가출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거짓말과 형무소 상담원과의 대화에서 거짓으로 꾸며대는 여자경험을 이야기할 때의 모습이 오히려 순수하다.
앙뜨완을 포기한 부모의 인격은 미숙하고, 이해로 이끌지 못하는 선생님의 마음은 편협하다. 공교육을 산업화 시대에 적응하는 규격화된 인간을 만들어낸 공장으로 표현하면서 앙뜨완의 교실 모습은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생각을 강요하는 교육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지금 우리의 현실과 무엇이 다른가 생각하면 숨이 막혀온다. 이미 오래전에 트뤼포는 이런 불합리성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가 시작될 때 비치는 에펠탑의 모습. 그 높은 도시의 건축물은 도시인의 꿈이고 이상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꿈이라기보다는 모두 한 곳 만을 바라보며 쳇바퀴 돌 듯 살아야 하는 지친 삶의 모습이다. 무단결석한 앙뜨완이 몽마르트르를 뛰어다니는 장면은 삶의 방향이 절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듯 동선이 산만하다. 또한 놀이기구를 타는 모습은 자신의 의지로 멈출 수 없는 삶의 바퀴에 내맡겨져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장면은 형무소에서 탈출을 감행하고 달려가는 앙뜨완의 모습이다. 달리는 실제적 긴 시간을 그대로 핸드헬드 카메라 워크로 담아낸다. 달리는 장면이 진행되는 동안 함께 숨이 차오른다. 탈출은 통쾌하나, 목표가 없다. 무엇을 위해, 어디로 향해 달리는지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다. 긴 달리기가 멈춘 곳은 바다다. 일단 숨통은 트이는 듯하다. 그러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뒤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탈출을 후회하진 않는다. 앙뜨완의 달리기는 어느새 형무소에서의 탈출이 아닌 바다로의 접근이 되었다. 그리고 멈춘 카메라 렌즈 밖으로 관객을 응시하는 앙뜨완의 눈빛은 소년기를 지나 무엇을 보며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대할지 갈지를 묻고 있다.
2011. 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