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장커가 그린 중국의 '사과'
미국의 시인 폴 로렌스 던바는 <그림 그리기>(Making Pictures)라는 에세이에서 세잔느의 정물화를 보며 “세잔느의 사과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먹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세잔느의 정물화 속 사과들은 개인적인 감정에 흡수되지 않고 사과가 사과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세잔느의 사과에서 드러나는 ‘사과성’은 사물의 숨겨진 부분까지를 인식하게 한다. 사과와 같은 일상의 단순한 사물을 가지고도 어떤 진리를 드러내고 있는 정물화는 정물에 대한 사고방식과 생활의 기록이며, 그리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인간의 생활상을 전할 수도 있고 또 심상을 정물에 담아 표현할 수도 있다. 따라서 “Still Life”, 즉 정물화는 시대, 풍토, 민족, 전통을 엿볼 수 있고 아울러 인간의 생활과 취미를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지아장커 감독의 정물화 <Still Life>는 급변하고 있는 중국의 거대한 풍경 안에서의 중국 사회와 개인이 지닌 ‘사과성’을 드러내고 있다.
돈이 돈으로 바뀌는 마술, 2천년의 역사가 2년 만에 물 밑으로 가라앉고 끊임없이 건물을 허물고 있는 모습, 그리고 고향을 떠나는 주민들의 상황에서 자본주의 가치관의 유입으로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가치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개인의 일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허물어진 풍경 속에서 누군가를 찾아 돌아다니는 두 인물은 모두 자신의 역사에서 정리되지 않은 과거를 찾아다니고 있다. 이 둘이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 속에 있음에도 단 한 번이라도 스치거나 마주치지 않는 것처럼 주인공들은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단절되어있고 외로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들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으면서 그 외로움을 증폭시키거나 극대화하지 않고 그들의 일상을 아주 담담하고 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단절되었지만 공통적인 두 인물이 대비되는 지점이 있는데, 바로 과거를 마주하고 나서의 그들의 행동이다. 과거와 재회한 주인공 산밍과 센홍은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걸어간다. 2년이나 16년과 같은 물리적인 시간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센홍은 과거를 깨끗이 정리하고 상해로 향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선택하였지만 산밍은 과거를 끌어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의 일상에 연장선을 그리고, 그 아슬아슬한 외줄을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고 있다.
이 영화의 영상은 정지되거나 아주 느린 카메라 움직임과 롱테이크로 촬영되어 한 화면을 오랜 시간 동안 응시하게 한다. 이러한 정적인 화면을 통해서 우리는 쉴 새 없이 건물을 허물고 있는 기이한 풍경을 음미하고, 프레임 안에서 개인성이 제거된 인물들의 배치를 보면서 인간을 오브제로 한 정물화를 감상하게 된다. 그리고 카메라는 인물들이 떠나간 뒤에도 그 공간에 남아 그들이 떠나갔다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을 보여준다.
지아장커 감독은 자신의 정물화를 통해 시대적, 풍토적, 전통의 변화를 그려내면서 거대한 변화 속에서 건물이 불을 뿜으며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을 봐도 그저 덤덤한 개인의 고독하고 외로운 내면을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진정으로 이 영화가 좋은 이유는 변화를 겪는 주인공의 감정을 통해 호소하지 않고, 중국의 변화를 그 자체로 보여주면서 그 진지함으로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고 있다.
2012. 05.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