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근세 내는 노동자에서 아이들의 관찰자로 보내는 시간들
"우리 산맥이 보이는 나라에 가서 살까?"
지난해 5월 말레이시아에 출장을 갔던 내가 남편에게 전화로 했던 첫 마디였다. 제주도보다 작은 싱가포르에서 코비드로 인해 3년을 갇혀 살아보니 그저 답답했다. 갔던 곳을 또 가야 할 정도로 그 작은 나라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다.
한국이었다면 마음이 답답할 때 동해에 간다든가 식구들이나 친구를 만나러 다른 지역으로 간다든가, 하다 못해 차를 타고 강변북로라도 달렸을 텐데 싱가포르에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답답함이 있을 때였다(싱가포르는 자동차 등록비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 차가 없는 사람들이 꽤 많고 우리도 그 중 하나였다).
내가 한 말을 누가 들었던 것일까? 때마침 남편이 미국으로 옮길 기회가 생겼다. 보스턴이 미국 어디에 붙어 있는 도시인지도 모른 채,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이사를 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싱가포르에서 미국으로
지난해 10월, 5년의 싱가포르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서 3주 가량 짧은 휴가를 보낸 후, 11월 중순 미국 보스턴 로건 공항에 내렸다. 초겨울에 비까지 내린 보스턴은 스산하고 우리를 외롭게 만들었다.
미국 땅이 처음인 아이들은 미국 땅이 처음인 나에게 수만 가지 질문을 던진다. 당시 만 8세인 큰 아이는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이 되어 맥락이 있는 질문을 던지지만, 만 4세였던 둘째의 질문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다.
"여기서 싱가포르 말 써야 해?"(해석하면 여기서 영어를 써도 되냐는 말이다.)
"여기가 어디야? 싱가포르야?"(해석하면 비행기는 타고 왔으니 한국은 아닌 것 같고 싱가포르로 돌아온 건지 헷갈린다는 말이다.)
미국의 가장 큰 명절인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직전, 한국에서 가져온 이민 가방과 자질구레한 짐 18개를 남편의 회사 근처 숙소에 쌓아놓고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싱가포르에서 배로 보낸 살림은 3개월이 걸려 미국 땅에 도착했고, 그사이 집을 구하고, 온 식구를 실어 나를 차를 구하고, 아이들의 학교 전학 수속을 마치고, 남편은 회사 적응에 고군분투했다.
그 결과 우리 가족은 미국 동부 지역의 매사추세츠주 안에 있는 섀론(Sharon)이라는 작은 타운에 자리를 잡았다. 차를 타고 동북쪽으로30분 달리면 보스턴, 남쪽으로 4시간가량 달리면 뉴욕, 북쪽으로 5시간 달리면 캐나다 몬트리올에 갈 수 있다. 인구 1만 7천 명 정도이니 아주 작은 동네에 살고 있는 셈이다(보스턴은 서울 잠실 정도의 크기인데 인구 65만).
주택에 살면서 느끼는 기쁨
적도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지내느라 영하 이하의 추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까맣게 잊고 살았던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위도가 같은 보스턴 추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생을 아파트에 살다 태어나 처음으로 주택에 살면서 웃풍의 위력과 온돌방의 소중함을 동시에 깨달으며 실내화와 플리스 재킷을 분주하게 찾아다녔다. 그래도 좋았다. 숲과 호수가 있는 동네에서 매일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서.
겨우내 지하실에 새끼 쥐들이 들락날락해 애를 먹었지만, 창문을 열면 내 손바닥만한 나방들이 인정사정없이 들이닥쳐 놀랐던 날도 있지만, 우아한 걸음으로 뒷마당에서 모델 워킹을 하는 일곱 마리의 칠면조를 보고 겁이 나 문이 잠겼는지 한 번 더 확인했던 날도 있지만, 좋아하는 자연을 가까이 두고 볼 수 있어 기쁜 나날이다.
적도의 싱가포르에서 여름만 겪었던 아이들에게 미국의 추운 겨울과 생명력 넘치는 봄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사계절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아이들이기에 우리의 지금은 매 순간이 신기할 따름이다.
자연은 일분일초 심심한 겨를을 주지 않고 우리를 햇살 아래로, 나무 곁으로, 작은 곤충들 뒤를 따라다니게 만들었다. '산맥'이 보고 싶어 큰 나라로 이사를 왔지만 정작 우리는 집 근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논다.
이 길 끝에 뭐가 나올지 궁금해 한번 걸어가 보자고 재촉하는 아이들의 마음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나에게 해외살이는 가끔 고단하고, 가끔 뿌듯하고, 가끔 흥분되고, 가끔 별 거 없다. 익숙하고 편안한 언어와 음식과 문화 속에서 나름 안락하게 살다 처음 만나는 세상에 떨어졌으니 내 마음은 태어나 처음으로 단체 생활을 하거나, 놀이터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 놀아야 하거나, 양치질처럼 하기 싫은 일을 배움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 아이들과 흡사하다.
한국에서 13년, 싱가포르에서 4년 동안 홍보/마케팅 회사에서 마케터로 근무를 했지만 미국으로 이사를 오며 갑근세를 내는 노동자의 생활이 중단되었다. 급여생활자의 삶에 마침표를 찍고 다른 기회를 모색할지, 미국 달러로 급여를 받는 생활을 이어 나갈지 고민과 탐색을 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늘 하던 일이 사라져 속절없이 방황할 때도 있지만, 직장이 없는 것을 핑계 삼아 걸음의 속력을 줄이고 지내는 것도 아직은 할 만하다.
아이들을 관찰하는 재미
새로운 환경에 조금 익숙해진다고 해도 끝끝내 편안해지지 않는 마음을 스스로 다독여야 하고, 모르지만 아는 척도 해야 하고, 잘 알게 되었다고 자부심을 가질 때쯤 대반전의 상황에 직면하고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충격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매일 하나씩 새로운 사람과 문화, 환경을 배우고, 익숙했던 것들과 비교하며 일상에 변주를 가미하고, 끝끝내 내 것이 되지 않더라도 상처받지 말지어다.'
요약하면 해외 살이는 매일 하나씩 배워야 하는 일상의 연속이라 할 수 있겠다. 앞으로 그럴싸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지는 몰라도 살아가는 내내 식구들이 웃고, 울고, 위로하고, 기뻐하는 일들이 꽃망울처럼 터질 것을 상상하면 그 차체로 멋진 여정이라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환경이 달라질 때마다 으레 알고 지낸 육아 공식들이 성립되지 않고, 덩굴나무처럼 뻗어가는 아이들의 몸과 마음의 영역이 넓어지니, 나도 덩달아 바삐 움직이게 된다. 단순히 아이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녀 내 몸이 부산해지는 건 아니다.
내가 살아온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하루하루는 생경하다. 그렇기에 '내가 이렇게 살았으니, 너도 이렇게 살아'라고 단순화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아이들이 많이 컸다고 생각하는 지금도 아이들의 가지는 사방팔방을 향해 뻗어가고, 나도 덩달아 배우고 자란다. 그런 날들,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좋은 습관이 생겼다. 온종일 아이들을 관찰하는 것, 그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드라마, 영화 못지 않은 감동과 웃음이 있고, 그곳에 세상 겨울을 녹일 수 있는 뜨거운 사랑이 있다.
앞으로 다가올 여름은 적도의 여름과 얼마나 다를지, 저무는 가을은 또 얼마나 애잔할지 상상해 본다. 동네와 학교에서 아이들이 아시아인으로 마주하는 상황들, 한국과는 다른 교육 방식과 선택들, 미국에서 한국 문화를 배경으로 자라는 아이들의 정체성까지 우리 가족이 일상에서 겪고 고민하는 일들을 나누고 싶다. 온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흡수해 나갈 아이들의 변화를 기대하며 그 이야기를 계속 써보려고 한다.
* 2023년 6월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