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앞에 용기를 잃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하여.
지난 목요일, 영화 <1987>을 보았다. 한 명 한 명이 각각 하나의 조각을 들고 차례차례 혁명의 퍼즐을 맞추어가는 1987년의 뜨거웠던 시간에 대한 기록. 다른 영화에서라면 모두 영화 한 편은 온전히 이끌어가고도 남을법한 굵직한 배우들이 아주 짧게 짧게 검찰, 기자, 교도관, 시위대, 사제, 민주화지사, 운동권 학생등등으로 스쳐 지나갔다. 1987년 6월이 있을수 있었던 것은 단 한명의 힘이 아닌, 수많은 국민들의 보이지 않았던 본인의 자리에서 도적적으로, 법적으로 해야 할 일을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 용기내어 외쳤주었던 덕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거라 추측한다. 영화는 철저한 고증을 거쳐 실명으로 등장한 사람들의 이야기 사이사이로, 영화적인 상상력이 가미되어있었다. 한 장의 사진으로 기억되는, 그 야만의 시절에 맞서 싸우다 스러저간 젊은 청년들의 평범한 삶에 덧붙여진 허구의 장면들은 어찌보면 약간 진부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이 그 '진부하고 평범한, 그저 그런 지난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폭력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오히려 진부하고 평범해서 더욱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박처장, 그리고 남영동의 그들은 왜 저렇게 야만적이었을까. 폭력에 무뎌지고 만, 그리하여 폭력을 유희로 즐기는 야만. 남과 북으로 갈라진 나라에서, 북에서 내려온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한 인간이 개인적인 원한에 살아남기위한 몸부림까지 합쳐져 만들어낸 광기와 같은 야만. 그리고 제일 큰 문제는 그것을 이용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은, 지금도 너무 뻔뻔스레 잘 살고 있는 대머리 살인마의 존재 자체가, 야만스럽기 짝이 없었다. 저 야만앞에서 그 시절의 사람들은 어떻게 저리 용감할 수 있었을까.
1987년 여름의 광장 광경을 보며, 절로 2016년 겨울의 광장의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저 시절 저렇게 뜨겁게 소리쳐 준 사람들 덕분에 지금 우리가 평화로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저 뜨거웠던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2012년 대선에서의 연령대별 지지율을 보면 정말이지 더욱 궁금해진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영화와는 관계없는 딴소리를 좀 하자면, 며칠전 읽은 책에서 데이비드 브룩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본성 안에는 잘못된 것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것에 맞서 싸울 필요가 있다. 도덕적 상대주의가 우리의 삶을 납작하게(flat.-가치의 우열이 없느 상태) 만들기 떄문에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유의 이기심과 자기중심, 자아도취를 조장하는 것이다. 물론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이 그랬고 십자군이 그랬다. 혹은 최근의 isis까지. 따라서 도덕적 확신에는 첫째, 공감과 다원주의가 둘째, 겸허가 결합되어야 한다. 겸허란 우리 모두는 진리의 한 부분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라는 깨달음이다. 절대적 옳고 그름은 없다. 경쟁하는 진리들간에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 편은 진리의 한 부분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 역시 진리의 한 부분을 갖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라고 말이다.
저 시절의 주역들은 어쩌면, 80년대의 야만을 이겨내었다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인해 자아도취 되어있는게 아닐까. 그들 모두가 그렇다는건 아니지만. 시대의 야만 앞에 용기있게 싸워낸 사람들이 30년이 지난 지금 보여주는 모습은, 사실 젊은 우리들이 보기에 썩, 멋진 사람들만 있는건 아니라는점이 아이러니하다. (119에 전화를 걸어 제 이름을 부르짖던 모 도지사님만 보아도...) 그들은- 납작해져있는 것 같다. 옳음의 승리를 맛본 후 그들의 자아도취로 인하여 새롭게 태어난 야만을 그들은 보지 못하고 있는게 아닐까. 80년대의 야만과 비교하면 육체적으로는 덜 야만적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더 야비해진 야만을 제대로 마주할 생각은, 없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 이 영화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생각이지만 계속계속 이런 생각이 드는건 어쩔수가 없네.
연희가 대표하는 평범했던, 온순했던, 겁먹었던 일반 사람들마저 종내 버스위에 올라 소리치게 만들었던, 야만적인 사회에 용기있게 대항하다 스러져간 분들을 기억하며- 21세기엔 저런 야만을 다시는 만나지 않을수있기를 바랄 뿐인데, 요즈음의 우리 시대의 편가르기를 보고 있자면 야만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