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차정숙 리뷰
제일 좋아하는 배우, 가수를 꼽을 때 엄정화를 꼽는 사람은 못 본 것 같다.
분명 스타이고, 히트작도, 히트곡도 많은데, 압도적이라는 느낌은 아니다.
모두가 알고 있고,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누군가의 페이보릿으로는 잘 언급되지 않는 연예인.
미인하면 떠오를 정도로 예쁜 것도,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연기파’라고 불리는 유의 배우도 아니다. 가창력이 뛰어나서 소름돋거나 사람맞나 싶을 정도로 춤을 잘 추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예쁘고, 사랑스럽고, 캐릭터를 실존 인물처럼 느끼게 하고, 따라 부르고 따라 춤추게 하는 독보적인 존재다.
어떤 역할을 기능적으로 뛰어나게 구현하는 것만으로는 오를 수 없는, 자기다움이 하나의 역할이 된 것 같은 인물.
이 사람이 너무 좋아 하는 팬덤의 강력한 지지보다는 와 이 사람 나왔네 하는 반가움이 더 어울리는 사람.
엄정화의 N번째 전성기를 만들었다고 하는 드라마 <닥터 차정숙>도 그렇다.
모두가 기다린 돈 많이 들어간 대작이 아닌 건 당연하고, 줄거리만으로도 너무 익숙하다.
이 드라마가 나오길 손꼽아 기다렸다는 사람은 없을 거 같다.
그럼에도 신기하고 희한한 설정에 죽고 죽이는 매운맛 설정에 지쳐서,
이해하기 쉬운 스토리에 가족, 직업, 삶, 자아를 이야기하는 드라마가 그리웠던 것도 사실이다.
의대를 나왔는데 혼전임신으로 아이 키우느라 의사 생활을 포기한 주인공,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남편은 대학 동기이자 주인공을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을 약속하다시피 한 사이였던 첫사랑(이자 직장 동료)과 바람이 났다. 바람 난 정도가 아니고 주인공의 딸과 동갑인 딸까지 있다.
좋은 집에서 여유 있게 생활하는 것 같지만 실은 시어머니, 아이들, 남편의 종 비슷하게 살고 있는 주인공은 죽을 고비를 수술로 넘기면서 인생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고, 20년 만에 레지던트로 남편과 내연녀가 근무하는 병원에 취업한다.
여기서 만화에 나올 법한 멋진 연하남이 등장해 주인공을 지켜주고, 사랑해 주고, 지지해 준다.
진짜 줄거리만 보면 아주 적극적으로 보기를 거부하고 싶은 드라마다.
그런데 엄청 재밌게 봤다.ㅎㅎㅎ
일단 모든 배우들이 연기를 잘한다. (눈 자꾸 동그랗게만 뜨는 명세빈 배우는 좀 부담스러웠음..)
온가족에게 무시당하는 것도 모자라 20년 연하의 동기들에게도 무시당하고, 눈치만 보는 답답이 고구마 캐릭터가 될 수도 있었을 차정숙은 엄정화의 따뜻한 목소리와 시선을 만나 전에 본 적 없던 새로운 인물이 됐다.
나이가 많아서, 집에서 애만 키워서, 아줌마여서 등등의 이유가 아니라 원래 저런 성격이어서 저렇게 배려하고, 참고, 이해하려 노력하는구나 하게 된다.
정숙의 친구인 피부과 개원의 미희가 “너는 내가 5000원 주고 20년 전에 사준 화분을 아직도 안 죽이고 키우는 애다. 모든 동식물을 살리는 애다” 이런 취지의 말을 하는 장면이 기억난다.
정숙이는 사회생활을 안 해서, 경제력이 없어서, 혹은 없는 집에서 자라서 자신감이 없거나 소심한 게 아니라,
원래가 모든 존재를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가꾸면서 행복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다.
반면 엄마와 아내에게 기생하고 있었으나 본인은 그걸 몰랐던 남편 서인호(김병철)는 의사로서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다.
환자가 얼굴에 침을 뱉어도 자연스럽게 참아 넘길 줄 알고, 병원장으로 승진할 정도의 정치력도 있다.
의사 생활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진 않은데 (엄마가 하라고 해서 한 것 같음) 그래도 제대로 하려 하고, 실제로 잘하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특별히 선호가 없고, 인생관이랄 게 없이 주어진 역할을 아주 잘 수행하는 사람.
여자친구를 버리고 임신한 동기와 결혼해서 사는 것, 결혼해서 애 둘 키우면서 전 여자친구가 임신했다고 아이 데리고 나타나자 다시 만나는 것도 주어진 상황이나 벌어진 일에 나름대로 ‘열심히’ 대응하려 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 그래서 정숙이와 서인호는 같이 살 수가 없다.
정숙이는 며느리, 엄마, 아내라는 역할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역할이 아닌 자신의 가치관에 맞게 자기 주변의 소중한 존재들을 가꾸고 살리며 살고 있었다.
서인호는 독립적인 사회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실은 역할에만 몰두해 있는 사람이다. 자아랄 게 없고 누군가 요구하거나, 어떤 상황에처하면 그걸 해결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춘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날, 반찬과 김치를 담그고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는 정숙이의 모습은 ‘현모양처’ ‘모성애’ 같은 단어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자기답게, 자기만의 인생관, 인간관을 갖고 남은 하루를 살아내려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보였다.
제가 운영하고 있는 경험 콘텐츠 플랫폼 파이퍼에 쓴 글입니다.
뒷 부분은 파이퍼에서 읽어 보실 수 있어요!
https://piper.so/contents/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