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사회학_김홍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1980년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경험하게 되는 마음가짐이었다
한 시대마다 어떤 장소마다 공유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가 있다. 십자군 전쟁 시대에 유럽의 전장에서는 패배감과 허무함이라는 마음의 상태가 있었고, 산업혁명시기 영국의 한 공장에서는 무료함과 따분함 또는 탐욕과 우월감이 지배적인 마음의 상태였다. 1950년대 한반도에는 전쟁에 따른 인간성 상실과 피폐함이 마음을 지배했고, 1970년대 독재정부 하에서 사람들은 분노심과 적개심을 마음 속 가득 품고 살았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던 시기에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사고로 여기는 사람들에 비해서 자신의 문제로 인식한 사람들의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이 가득 내면을 채우곤 했다. 이렇게 보면 마음 가짐 혹은 마음의 상태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공유되고 공명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일까? 만약 마음을 개인적인 깨달음과 다르게 사회학적으로 접근하여 감정과 인지, 이해와 인식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친구들과 토요일 아침마다 사회학스터디를 하고 있다. 이번에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김홍준 교수님의 '마음의 사회학'을 읽으면서 마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하고 있다. 좋아하는 동생이 적극적으로 추천한 책이기도 했고, 서울대에서 진행했던 컨퍼런스에서 뵈었던 김홍중 교수님의 언어는 정갈하면서도 명확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글로도 만나보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명저들의 공통된 특징은 '굳이 이런 주제를?'이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다가 '와~ 이거 정말 말되네, 엄청나다'라는 탄성을 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읽고 있는 '마음의 사회학'은 첫 장 '진정성 레짐'부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하는 명저였다. 그래서 글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살면서 '마음이 상한다'라는 사건을 겪는다. 관계가 어그러지기도 하고,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좋은 일이 있어면 마음이 한없어 좋았다가 이별을 하면 세상이 다 꺼진듯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일상 속에서 쉽게 쓰는 '마음'은 사회학적으로 보면 '공통의 체험이나 공통의 감각, 공통의 지각과 공통의 의혹'으로 볼 수 있다. 사회학이라는 것은 헤겔에 의하면 '가정-사회-국가'의 변증법적인 구조에서 '반'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깐 인륜성에 의해서 사랑으로 관계맺는 가정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목적을 가진 집단으로서 사회는 그 자체로 '알 수 없는 영역'이면서 국가처럼 체계를 가진 집단도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러한 사회의 실재에서 실제의 사건을 경험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회'에 대한 어떤 감각을 갖는다.
마음은 집합적으로 구조화된 질서이면서 불안정한 제도이지만,
다양한 현상들을 발생시키는 원형적 에너지다
_김홍중
마음에 대한 이해를 갖기 위해서 오늘은 마음을 하나의 체계인 '레짐'으로 보고, 어떻게 레짐으로 형성되면서 작동되는지 알아볼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인 '진정성'과 '신성함'을 구분해 보고 이것이 어떻게 발현되거나 사라지면 속물성인 스노비즘이나 동물성으로 변질되는지도 알아보고자 한다. 더욱이 논쟁적이기는 하지만 '진정성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고 한계를 가진다'라는 주제와 '진정성은 결국 윤리를 요청한다'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다루어보자.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것이 신성함이고 어떤 것이 진정성인지에 대한 구분을 해보면서 나름대로의 대안을 탐색해보면 좋을 것 같다.
원래 레짐이라고 하면 제도의 군집, 체제의 총합을 이야기한다. 정치레짐이라고 하면 선거제도나 정당제도, 권력제도가 합쳐진 정치체제 모음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볼 때 레짐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을 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레짐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작동하는데 있어서 사회적 행위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암묵적인 집합적인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서 마음이란 사회적 행위자들의 습관화된 행동패턴을 추동하면서 사회적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화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레짐은 쉽게 말하면 마음을 움직이고 만들어내는 요소들의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레짐은 한번에 형성되지 않고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패러다임과 사건, 사람들의 문화적 양식들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마음의 레짐에는 감정도 있고, 인식도 있고, 경험에 대한 이해도 있다. 그러나 마음의 레짐은 하나로 정해지지 않고 그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한 사회가 동질한 정체성으로 묶이는 공간적인 요인이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마음의 레짐을 비슷하게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 공유하는 마음의 레짐에 따라서 사회적인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개인이 인생에 대해서, 국가에 대해서, 사회에서 대해서, 다양한 제도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홀로코스트를 경험하고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는 마음의 레짐은 독일의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쓴 '나, 생존자'라는 시에 잘 나와있다. 일종의 '죄책감과 수치심'이라는 마음의 레짐이 말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마음의 체제는 어떻게 보면 문화적인 관점에서 그 시대에 소설이나 시, 에세이 그리고 문화 콘텐츠에 많이 남아 있다. 어떤 사건을 경험하고나서 쓴 소설들은 그 사건이 사람들의 마음 송에 어떻게 레짐으로 남아 있게 되는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무엇에 대한 '시'는 은유적으로 시인의 마음을 글로 알려주기도 한다. 일상에서 보여지는 문화적인 표현들은 사실 마음의 레짐의 징후라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문화를 해석하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사회가 가진 레짐을 읽을 수 있으면 그 사회가 어떻게 반응할지 혹은 그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해석해볼 수 있게 된다. 여기까지 이해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는 그럼 어떤 사회 살고 있고, 어떤 마음의 레짐을 가지고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체제와 레짐의 관계
우리의 사회적 삶은 단순히 제도적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행위자들이 공유하는 의미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시기에 특정한 사건이 발생하여 구조적인 변동이 발생한다는 것은 '의미의 세계'가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랭바디우의 개념으로 볼 때 사건을 통해서 진리가 반짝이고 그 진리를 본 사람은 그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게 된다. 518민주화항쟁에서, 416세월호참사에서, 1029이태워참사에서, 1987년 민주화항쟁에서 그 빛을 본 사람들은 그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의미의 세계가 다른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른바 마음먹기, 마음쓰기와 같이 마음의 레짐이 바뀐 것이다.
마음의 레짐은 특정한 사건이나 참사만을 지칭하지 않고 광범위하게 존재할 수 있다. 1987 민주화항쟁 이후에 시민들의 마음이 지속적으로 혁명을 부르짖을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그 레짐이 사라졌지만 어떤이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의 레짐의 다른 상황에서 대화나 협업, 협동과 토론은 힘들어질 수 있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서로가 다른 의미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같음에서 다름을 발견하는 방식이 아닌, 다름에서 같은을 발견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오늘은 마음의 다양한 레짐 속에서도 '진정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사실 새롭게 일을 시작하던 15년전 입에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달고 살았다. 비록 월급을 많이 받지 못하고, 일하는 환경이 누추하다고 해도 나는 '진정성'이라는 무기로 사람들과 다른 직업과 삶을 산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그리고 언제나 진정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나 역시도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어느순간부터 일종의 '윤리'가 사라진 사람들의 '진정성'을 만나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자기마음대로 살아도 '진정성'이 있었다고 말하고, 종교적인 편견을 마구잡이로 밀어붙여도 '진정성'을 운운했다.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편견이나 고집에 대한 피난처였고, 사람들은 즐겨서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나는 조금은 시무룩해지고 답답해하면서 일상 속에서 '진정성'이란 단어를 몰아내고 있었다. 마음의 사회학을 읽으면서 진정성 레짐에 대한 내용을 만나게 되어서 기뻤다. 제대로 정리해보자.
진정성이란 한문으로는 참 '진'과 바를 '정'을 쓴다. 그러니깐 참되고 바른 마음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영어로는 Authenticity라고 하는데 "authentic"의 어원은 라틴어 "authenticus"에서 유래하며, 이는 그리스어 "authentikos"에서 파생되었다. 그리스어 "authentikos"는 "진정한" 또는 "권위 있는"을 의미한다. 본래 좋은 삶과 올바른 삶을 규정하는 가치의 체계이면서 도덕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진정성의 정의의 핵심은 자신의 참된 자아실현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미덕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자아실현은 대부분 좌절을 겪게 된다. 진정한 자아실현은 사회적인 모순이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억압적인 구조에 의해서 실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진정성은 실현되기 어렵다. 진정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가 자신이 가진 이상적인 자아실현의 모습과 사회의 현상의 불합치에 대한 부조리의 의식을 가지게 된다.
진정성은 사실 근대적인 가치로서의 발현되었다. 마르틴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개인화된 신앙의 형식은 시민들이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되면서 '정치적 주체'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그 전까지 중세시대에는 주체라는 것은 언제나 공동체 안에서 하나의 구성요소로서 존재하는 것이 알반적이었지만, '만인사제설'에 입각한 종교개혁 이후에는 서서히 중세의 가을이 저물고 개인의 시대가 떠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전근대적 가치로서 신실성은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진실하기를 원하는 조화와 무모순의 가치였다면, 근대적 가치로서 전문성은 자신의 참된 자아 실현의 의지와 대립되는 사회구조의 모순 속에서 갈등하는 가치로 등장하게 된다.(트릴링Lionel Trilling, '신실성과 진정성') 내면의 갈등은 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생긴다. 개인이 원하는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은 독재나 군부정권 혹은 매국노들이 날뛰는 세상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변증법적인 장치를 이용해서 진정성을 이해해보자.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변증법'을 개인에서 출발해서 사회 속에서 현상을 반영하게 되고, 이를 다시 국가로 상승시켜서 절대정신의 탄생을 완성시킨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구조는 '인륜성'인데 이러한 인륜성은 개인이 모여진 가족과 국가 안에서는 자연스럽지만 사회마다 그 인륜성이 발현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정'에 속하는 가족과 국가가 '반'에 속하는 사회 속에서 변화, 변질, 승화되고 그것이 다시 각 국가의 형태를 결정하게 된다. 따라서 헤겔에게는 사회는 극복되어야 할 존재이다. 헤겔 이후에는 '사회'와 비슷한 양상을 갖는 '시장'이 등장했고 시장이나 사회는 인륜성의 관점에서는 극복되어야할 '반'에 속한다. 이러한 사회와 시장의 부정성을 극복한 국가는 근대국가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 국가는 다시 개인에게 정체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국민으로서 의무를 부과한다. 다시 개인은 자신이 처한 현상학적 장에서 사회와 시장 속에서 자신의 활동을 영위해 간다.
"진정성 레짐이 현실화될 수 있기 위해서는 '진정한 나'를 추구하는 자아정치와
‘진정한 사회'를 추구하는 현실정치가 결합해야 한다. (29p)"
김홍중은 마음의 사회학에서 이러한 구조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전개한다. 기본적인 틀은 갔다고 하더라도 내면세계가 공적인 지평 속에서 샤르트르가 이야기한 앙가주망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앙가주망은 영어로 engagement로써 관여하거나 참여한다는 뜻인데, 개인의 내면의 욕망이 공적지평 속에서 부정적인 혹은 투쟁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되고, 이것을 변증법적 상승을 통해서 주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회나 시장이라는 공적 지평 속에서 실현되지 않은 내면의 세계 즉, 의미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한 방식으로 주체를 불러낸다. 이렇게 공적지평 속에 '부르심'을 받은 주체는 윤리적인 성찰을 통해서 의미의 세계를 실현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성이다. 신실성은 이러한 과정이 없이 내면의 세계와 외부의 세계가 똑같은 상태를 가리킨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투명한 사람은 신실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진정성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현실에서 고뇌하면서 자신에게 도덕적인 압력과 실천을 요구하는 공적지평 속에 놓이고 곧 이에 반응하는 주체성은 내면세계를 강화한다.
이러한 주체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회주의자들은 절대로 '대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거나, '타자'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기회주의자들은 기껏해야 '너가 가진 재능을 그렇게 허비하다니'라는 수준의 이해를 가지게 된다. 일제시대의 친일파가 그랬고, 1987년의 학생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는 공안검사들이 그랬으며, 세월호 참사가 있고나서 희생당한 학생들의 가족들과 함께 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여느 사람들의 반응이 그랬다. 공적 지평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찾은 당사자들에게는 이제 어떤 유혹이나 기회가 오더라도 자신에게 부여된 의미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한 걸음을 걷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보면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사회의 부조리함과 국가의 부재에 대한 부르심에 응답으로 주체성을 가지고 변화를 일으키려 노력했는가 볼 수 있다. 일명 '내비치는 세계'가 진정성을 가진 이들에게 열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비춰지는 순간 자신 안의 가득한 열정과 욕망 속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할 비전이 꿈틀대는 순간을 만끽하는 사람들. 진정성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듯하지만 진정성은 언제나 부르고 있다. 새로운 주체를 말이다.
진정성을 가진 사람들과 맞서 싸우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그들은 몸과 생명을 아끼지 않고 불 속으로 뛰어들기 때문이다. 어느사회나 진정성을 가진 사람들을 잠재우는 특효약들이 존재했다. 마키아벨리시대에는 군주들의 무차별적인 수단적 강제였고, 마르크스시대에는 자본가들의 노동자에 대한 탄압이었고, 독재의 시대에는 무자비한 총칼과 폭력이었다. 진정성을 가진 사람들이 진정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책임져야할 사람들 때문이다. 예전에는 투사들의 가족들은 자신의 진정성의 발목을 잡지 않고 오히려 응원해주었지만 포스트진정성의 시대가 도래하면 그것이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생존'자체가 문제가 되면서 먹고사는 문제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성을 발휘하는 순간 나의 가족들은 차가운 자본주의의 바닥에서 전전긍긍하면서 다른사람들에게 손을 벌려야 하기 때문이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대에 진정성은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이것은 기획되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쉘푸코가 이야기했던 '생명정치'가 1997년 금융위기 이후에 대한민국에 몰아닦쳤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구조조정을 받아들이고 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팔고 자신들의 문을 열였다. 성공과 부유함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가 되면서 그 반대로 사는 사람들이 바보취급을 당하게 되었다. 진정성을 발휘해서 사회에 거대한 문제와 맞서 싸우는 이들의 자녀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욕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가정환경이 안 좋은 이유는 부모님이 자신들을 챙기지 않고 사회문제에 열중했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들 살리려고 자신들을 버렸다는 거절감때문에 그 다음세대에는 아예 진정성이라는 단어조차 사라져 버렸다. 한 세대가 하나의 개념을 만들고 진정성을 가지고 시작하면 그 다음 세대에서는 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싹트고, 그 다음세대가 되면 아예 적대시되어 버린다. 한국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그랬고, 노동자들을 위한 파업이 그랬으며, 청년들을 위한 정치를 하자고 자신의 미래를 반납한 이들에게 혹독한 반응이 돌아갔다.
포스트 진정성의 시대에는 '생존'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다수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 던지는 사람들이 찬양받지 못한다. 시대착오자, 사회부적응자, 책임감이 없는 사람, 자신이 가족을 챙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불명예와 멸시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사회에 대한 비전을 스스로 지우게 되었다. IMF사태 이후에 총체적 구조조정은 그렇게 사회의 마음을 구조조정했다. 의미의 세계가 IMF사태 이후에는 아예 기회주의가 존중받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 박수쳐주는 사회가 되었다. 각자도생의 사회구조 속에서 경쟁이 자연스럽게 교육과 직업 속에서 꽃피웠다. 누구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체제가 대한민국에 뿌리 내렸다.
다음 장에서 알아보겠지만 이러한 진정성의 자리를 스노비즘이라는 속물성과 동물성이라는 인간성의 변증법적 소멸이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동물성은 '귀여움'이라는 시대적인 주제로 바뀌었다. 귀여운 동물들의 향연이 시대를 도배하고 있다. 정치철학자 애덤스위프트는 '정치의 생각'에서 시대마다 그 시대를 영유하는 혹은 부유하는 생각이 있다고 한다. 1800년대에는 자유라는 개념이 유행이었다면, 1950년대에는 인권이라는 개념이 유행했고, 1990년대 이후에는 행복이라는 개념이 가장 중요해 지는 사회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행복을 위해서는 자신의 인생과 시간, 노력을 모두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행복과 자유 혹은 인권이라는 개념이 서로 월드컵을 한다면 조건절로써 '행복'이 항상 따라 붙게 되는 것이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타자의 불행이 자연스러운 시대, 나의 행복을 위해서 동물들의 자유가 제한되어야 하는 시대, 나의 행복을 위해서 소외받는 이들의 인권은 간단하게 눈 감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계속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만 할 생각은 아니다. 책의 내용을 따라 가다보니 사회학이 가지고 있는 그 사회의 장을 최대한 세부적으로 소개하고 그 가운데서 해석의 틀을 제공하는 것을 나도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을 어느정도 받아들이고 결국은 나의 진정성과 이해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상상해보고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속물이란 영어로 snob이라고 부른다. s가 부정형이고 nob이 noblility 혹은 noble에서 왔다고 이해하면 결국 '귀족이 되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존재'가 바로 속물이다. 1800년대 영국의 이튼스쿨과 같이 귀족들이 다니던 학교가 평준화가 되면서 귀족과 일반시민이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속물'이라는 이름의 '스노비즘'이 탄생하게 된다.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식사를 하지만 입은 옷과 말투 그리고 삶의 배경이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는 '욕망'을 가진 사람이 속물이 되었다. 그 말은 '욕망'을 가진다는 것이 '결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깐 '누구처럼 되고 싶어'는 지금 내가 그 사람처럼 되고 있지 못해서 되고 싶은 것이다. 잘생긴 사람처럼 되고 싶거나 돈 많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것은 내가 지금 잘생기지 못하고, 돈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결핍이 없고 살면서 한번도 내일이 두렵지 않은 이들에게는 '욕망'도 없지만 '결핍'도 없게 마련이다. 사람들에게 주구장창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면서 과시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면서 보여주는 것에 행복감을 얻는 것이 즐거움이겠지만 진정 결핍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 과시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욕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결국 가장 '귀족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욕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살 필요가 없고 심지어 열심히 공부할 필요도 없으며,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다. 그런데 '욕망해도 괜찮아'라고 하면서 욕망 그 자체를 찬양하는 사이에 이 사회는 거대한 욕망의 구조에 갖히게 된다. 누군가 '귀족'의 자리에 앉고 누군가는 그 귀족을 한 없이 쫓아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순간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속물의 두 종류
속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자적 속물과 대자적 속물이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헤겔과 샤르트르의 개념을 조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사실 즉자적 존재와 타자적 존재는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이 이야기한 변증법적 구조 속에 있다. 얼마나 많이 사용되는 변증법인지. 스스로 자기 안에 들어 있어서 스스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즉자적 존재이다. 이것은 변증법적으로는 '정'에 해당한다. 그런데 무엇에 대하여 거리를 두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인 대자적 존재는 헤겔에 의하면 정신이 '반'을 만나서 무엇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스스로 그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존재이다. 즉자적 존재에서 대자적 존재로 발전하게 되면서 '정-반'의 구도가 만들어지고, 이 둘의 상호작용으로 정신은 더 나은 존재로 다시 돌아온다. 이전보다는 더 교양이 높아진 즉자적 존재가 된 것이다. 다시 자기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변증법적인 존재론적 상승을 한다.
이러한 헤겔의 개념을 샤르트르의 샤르트르는 현상학의 차원에서 가지고 온다. 즉자적 존재와 대자적 존재를 설명하고 이어서 대타적 존재까지 이야기한다. 사물 속의 나와 사물을 생각하는 나, 그리고 그러한 나를 보고 있는 대자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인 타자이다. 즉자적 속물은 스스로 속물인지도 모르고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욕망을 추구한다. 자신이 욕망을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스스로 결핍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스스로 속물인지 모르는 속물이다. 그러나 대자적 속물은 자신이 어떤 결핍이 있으며, 어떤 욕망이 있는지를 아는 속물이다. 스스로 왜 속물이 되었는지도 알고 속물의 종류나 태도를 알고 있는 속물이다. 그러나 여전히 속물에 남아 있고 싶어하는 속물이다. 어쩌면 사회적인 변화를 만들 수 없어서 속물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어떻게 속물을 탈피하는지 몰라서 그럴수도 있다. 구조에 갖힌 속물인 대자적 속물은 언제나 스스로 자폭할 수 있지만 자신이 그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 거룩한 속물들'(김수영) 중에 하나가 된다.
즉자적 속물이 대자적 속물이 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대상화'이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대상화하면서 객체로 만들어야만 자신을 객체로 놓고 스스로 거리를 두고 생각하는 주체적인 속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를 대상화하면서 벌어지는 일은 불행하게도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것들을 대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상화한다는 것은 더 나아가 대상화하지 않은 본질에 도달할 때까지 여러번의 대상화를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자신이 아르다움을 얻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대상화해서 축적한 다음 그것들로 자신이 욕망하는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크리트 쥐스킨트의 '향수'라는 소설은 바로 이점을 보여준다. 향기에 민감한 주인공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결핍된 인간의 아름다움이었고 이 아름다움을 도달하기 위해서 수 많은 소녀들의 채취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살인이 자행된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이 추구하던 그 욕망에 도달하자 허무함에 빠진다. 그가 원했던 것은 진정으로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해석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진정한 인간관계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원초적인 사랑의 향기였던 것이다. 이것을 찾을 때까지 자신을 비롯해 수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금도 '향수'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주인공이 추구하던 그 아름다움을 욕망하기 때문에 동일한 결핍상태에 빠져 있고, 누군가를 대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샤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즉자적 존재와 대자적 존재 외에 이 모든 것을 자신처럼 생각하고 있는 '대타적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낸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몰입되어 있는 것을 보는 타자, 자기자신에게서 나와서 스스로를 객관화시키고 있는 자신을 보는 타자. 타자의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서 속물의 존재론은 그 양상을 달리한다. 다른 사람엑 과시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대상화하는 속물이 있는가하면 다른 사람을 아예 무시하고서 스스로에게 몰입해 있는 속물이 있다. 다른 사람을 염두해 준 속물은 인생을 '게임'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스스로에게 몰입한 속물은 '유희'로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선택에 따라서 다른 선택을 하려고 하는 '죄수의 딜레마'를 가지고 있는 속물과 스스로에게 빠져서 즐거움 자체를 즐거워하는 속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던의 양 끝단에는 각각 캐치라는 귀여움과 그로우테스크라는 기괴함이 있다. 모더니즘의 핵심은 '합리성'과 '예측가능성'인데 이 두가지를 모두 붕괴시키는 것이 바로 비합리적이고 예측불가능한 귀여움과 기괴함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의 뒤에는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다. '귀여움이란 전형적으로 강자가 약자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김홍중, 마음의 사회학)이라고 할 수 있다. 강자에 대한 권력관계 속에서 약자는 최대한 자신이 강자에게 덤빌 의도가 없으며 지금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여운지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한다. 나를 죽이지마세요. 나를 헤치지 마세요. 나를 사랑해주세요.라는 요청은 귀여움이라는 시선으로 강자가 약자를 볼 때 강자는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약속하자는 것이다.
반대로 그로우테스크, 즉 기괴함은 내가 강자이고 섬뜩할 만큼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나를 건드리지 말아라라고 하는 존재론의 향기이다. 이 역시도 권력관계로 보자면 자신이 더 강자이기 때문에 귀엽게 볼 필요가 없고 오히려 나를 두려운 존재로 인식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의 방식은 모두 '대타적 존재'론에서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속물적 반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강한자가 가진 권력이나 상징에 포섭되는 것, 지배되거나 길들여지고 정복되는 것은 귀엽고 그 반대는 기괴하고 어둡다. 귀여움은 '케어'의 대상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강자가 주는 안정감에 만족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일상화가 되면 행복함을 느낀다. 국가권력을 잡은 자들이 보이게는 국민이 귀엽다. 사회적인 강자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귀엽다. 자신에게 덤비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귀여운 존재로 '주인을 물지 않는 이상'은 자신도 건드리지 않는다.
문제는 권력관계라는 것이다. 귀여움의 존재로 취급당한 주체는 자신의 내면에서는 언젠가 자기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혹은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그러고 나면 자신이 귀여워해줄 대상을 찾는다. 오늘날 유기견들이 도처에서 귀여움의 대상이 되었다가 버려지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권력관계가 숨겨져 있다. 자신이 당한 귀여움의 비주체성을 해소하기 위한 귀여운 대상을 찾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대상화되거니와 다른 사람도 대상화된다. 대타적 존재로서 인간은 언제나 대상을 찾으면서 자신이 스스로 대상이되기도 하고 타자를, 다른 사물을, 다른 동물을 대상화시키기도 한다. 그 위에 군림하는 국가권력은 언제나 시민을 귀여움의 대상으로 치환하고 '거부권'이나 '혁명'을 외치는 이들에게는 무자비한 권력의 낫을 갖다 댄다. 말 잘듣는 귀여운 시민들의 세상은 존재의 비참을 안락의 속물화로 바꾸어 버린 공간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오늘날 세계의 비참 속에서
진정성을 가진 투사는 사라진다.
다만 귀여운 성직자와 귀여운 경찰관, 귀여운 의사집단과 귀여운 회사원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뿐이다. 누구라도 주인을 물려고 소리를 지르면 귀여운 존재들이 모두 알아서 뜯어 말린다. 국가가 깨어나서 거대한 권력을 휘두르기 전에 스스로 말린다. 그리고 그렇게 깨어난 이들은 그로우테스크한 집단으로 비춰진다. 권력과 맞서싸우는 이들은 모두 모니터 안에서 기괴하고 무식하고 무자비한 대상으로 몰락해버린다. 이모티콘이 지배하는 시대가 마음의 사회학에서 볼 때는 귀여움의 극치이자 안정감과 진정성을 맞바꾼 시대일 것이다.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이 비웃음을 당하는 시대에 다시 무엇인가 꿈꿔볼 수 있을까? 은폐하고 있는 것들을 드러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을까? 이제 시작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듯한 느낌이다.
이것이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읽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의 사회학일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야만 공감할 수 있는 시대적인 마음일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동일하게 겪는 사건과 사고, 사람들과 문화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정의하고 다른 사람을 정의하는 방식들이 거대한 구조가 되어서 마음의 체제가 확립된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싸움이 끝나구 '역사의 종언'을 맞이한 시대이다. 역사가 끝난 포스트히스토리의 시기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고민하는 것을 멈춘다. 지금 주어진 것들에 만족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한다. 자연스럽게 모든 것들을 '교환'하고 '대상화'하고 이용가치를 따지면서 귀여운 존재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스스로 귀여운 존재가 되어 간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바디우는 진리의 도래를 기다린다. 한번 사건이 발생하면 순간적으로 진리가 반짝이고 그 반짝임에 초대된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용사가 된다고 한다. 1980년대 휘말렸던 민주화의 사건 속에서 휘말린 사람들은 진정성을 가진 운동권이 되었고, 1990년대 IMF에 휘말린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용사가 되었다. 사건 자체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있지는 않지만 어떤 방식으로는 사건은 우리를 부르고 있다. 진정성이 사라진 시기에 다시 진정성을 불러 일으키기는 쉽지 않지만, 오히려 진정성이 발현되는 원리를 생각해보면 결국 '사회 속에서 이웃들의 모습'에 대한 반응이었다. 누군가에 대해서 혹은 어떤 것에 대해서 책임진다는 것은 그 사건에 일단 반응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능력이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스스로 할 수 없으면 함께 하면 된다.
그런데 한가지 함정이 있다. 자본주의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모든 것을 '교환'한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는 계속해서 교환하라고 명령한다. 교환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도태되고 사라지기 때문에 더 많이 교환하려면 경쟁해야하고 친구고 이웃이고 상관없이 너와 너 가족을 위해서, 너가 귀여워하는 존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이야기한다. 진정성타령은 그만하고 이제 그만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계속 안정감을 누리되 조용히 하라고 한다.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이 철옹성같은 구조를 깨는 것은 정면 맞대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존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무거워지듯이, 진정성을 발휘해도 생존의 걱정을 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더욱이 '교환'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대상화하고 타자를, 사물을 대상화하는 것을 포기하려면 '할수 있음의 없음'을 선언해야 한다. 그 자체로 만족하지만 그것은 이웃과 함께 누리는 이 빛나는 순간임을 기억해야 한다. 진정성을 추구하는 순간에 진리의 용사가 될 것이지만 적어도 속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열린다.
'언젠가 이 사랑을 생각하면 울어버릴 것 같아'라는 일본 드라마의 한장면으로 긴 글을 마무리 한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사랑이 아닐까? 그리고 그 자체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일이 아닐까? 다른 사람을 대상화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지 않는 길은 결국 사랑 밖에는 없다. 자기희생과 배려는 윤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결과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사랑을 발명해야 한다. 사랑을 사건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옛날 예수그리스도가 걸어간 길은 오롯이 사랑이 사건으로 날마다 다시 쓰여진 역사의 길이었으리라.
괜찮겠니? 따라가지 않아도?
네 괜찮아요.
가도 좋을 텐데. 조금은 하고 싶은대로 해도 될텐데
있잖아요. 저. 정말로 좋아하게 되었어요. 짧은 시간이지만 정말로.
계속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언젠가 이 사랑을 떠올리면 분명 울어버릴 거라고...
나는...우리는 지금 정말로 소중한 시간 속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못할 시간 속에 있다고...
그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웠어요...
이런 일은 앞으로 없을 거니깐 다음에 이 때를 생각한다면
눈부시고 눈부신 아름다움에 분명 울어버릴 거라고...라고.
제1부 마음의 레짐 - 진정성의 운명
1장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
2장 삶의 동물/속물화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귀여움
3장 스노비즘과 윤리
4장 근대문학 종언론의 비판
제2부 마음의 풍경 - 문화적 모더니티
5장 다니엘의 해석학 - 풍경에 대한 사회학적 사유의 가능성
6장 파상력이란 무엇인가?
7장 멜랑콜리와 모더니티
8장 근대적 성찰성의 풍경과 성찰적 주체의 알레고리
9장 문화적 모더니티의 역사시학
제3부 마음의 징후 - 사회학적 비평의 가능성
10장 13인의 아해 - 한국 모더니티의 코러스
11장 유럼, 리좀 그리고 교량 - 김수영 전통론의 재구성
12장 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 - 미래파의 시와 시학
13장 무라카미 하루키, 우리 시대의 문학적 지진계
14장 행복의 예술, 그 희미한 메시아적 힘
결국 사회학이 탐구해야 하는 최종 영역은 그 사회의 '마음'
사회학은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며 나타나는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사람을 연구함에 있어서 '마음'이 중요하듯, 사회를 연구할 때에도 '마음'이 중요한 문제이지 않을까? 저자는 사회의 모든 현상과 변화 속에 사람들의 ‘마음’이 내재돼 있다고 보면서 이러한 관점에 입각한 '마음의 사회학'을 주창한다. 여기서 그 '마음'은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기억이 공유되어 탄생것이라고 본다.
이 책은 8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진정성의 시대에서 속물주의의 시대로 이행하기까지의 과정을 철저히 파헤쳤다는 점에서 사회과학서이면서도, 이상과 김수영부터 ‘미래파 시인’들의 시를 비롯해 하루키의 소설, 홍상수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까지 섭렵하는 문학 평론집이자 문화비평서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이 담긴 문학과 예술작품을 통해 사회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자 하는 저자의 시도는 우리 사회를 깊이 파헤치는 색다른 시도가 될 것이다.
‘나’의 마음이 ‘당신’의 마음과 다르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과 구별되지 않는 어떤 공명의 체험 속에서, 우리는 어렵사리 하나의 사회를 기획하고, 계약하고, 꿈꾸고, 체험한다. 사회란, 모두가 같은 마음이 되는 덧없는 순간의 불안정한 제도화이다. 억조창생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사한 언어와 기억, 고통의 감각과 행복의 소망을 공유하는 집합체의 ‘마음’을 하나의 살아 있는 구조로 인정하고 그 모양새(體)와 쓰임(用)을 논구하는 작업은 허망한 번뇌가 아니다. 번뇌라 하여도 할 수 없다. 한 시인이 노래하였듯이, 번뇌도 별빛이 아니던가? --- 프롤로그 중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마음의 레짐’을 철저하게 분석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라는 것은 집합적 마음의 레짐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주체이다. 그리하여 시대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초월해 있다. 이에 대한 냉철한 인식은, 그것이 아무리 불편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행로를 사유하는데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진정성의 해체가 결정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진정성을 역사적으로 ‘지양’해야 한다. 진정성의 윤리를 넘어서서 사회적이고 공적인 관심과 책임과 실천의 역량을 가진 주체를 생산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장치’들의 형성과 발명이 이 시대의 새로운 과제로 부각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 본문 중에서
스놉이 더이상 멸시받지 않고 도리어 사회의 선망을 취득함으로써 존재론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는 사회의 이름이 스노보크라시이지만, 이에 대한 세인(世人)들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속물적 욕망에 시대적 면죄부가 부여되었다는 점에서 해방감을 느끼는 동시에 모두가 속물적인 욕망을 분출하는 파렴치의 만연에 대하여 도덕적 불안감을 느낀다. 스노보크라시의 시대는 이 양가성 위에 건축되어 있으며, 새롭게 열리는 스놉의 시대는 민(民)의 소망인 동시에 악몽이라 할 수 있다. 민은 자신 또한 스놉이 되어 세속적 성공의 풍요를 누리기를 욕망하지만, 그 욕망은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존을 위하여 자신들의 근본적인 도덕감정과 싸워가면서 강박적으로 획득된 것이라 보는 편이 더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민중의 스노비즘은 처절하다. 이 처절함은, 스놉이 되지 않으면 ‘서바이벌’할 수 없기 때문에 스놉이 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절박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다. 스노비즘은 거대서사가 조락하고 이제 삶의 방식을 지휘하는 의미 있는 이야기가 부재하는 듯이 보이는 당대 한국 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매력적인 동기를 부여하고, 특정한 효과를 발휘하고 또한 주체의 형식을 주조하는 ‘최후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스노비즘의 판타지는 비판적으로 응시되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하루키의 소설은 세련된 속물취향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루키 소설의 참된 매력은 이국적 이미지, 놀라울 정도로 용의주도한 소설적 테크닉, 압도적인 스토리텔링의 재능, 그리고 그의 이야기들이 내포하는 신화적 상상력의 깊이나 분방함 따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루키가 우리에게 제공한 것은, 90년대 이후 발생한 세계의 근원적 변용을 살아남게 해 주는 ‘서바이벌 키트’였다. 하루키를 읽는 것은 ‘유희’가 아니라 ‘교육’이었다. 하루키를 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흘러간 한 시대와 결별하고 그것에 뒤이어 도착한 새로운 시대와의 낯선 불화와 갈등의 관계로 어렵사리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키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한 시대와 다른 시대의 갈라짐, 즉 지층의 균열, 역사적 지각의 진동의 기억을 몸에 새긴 채, 그 균열의 시간을 육화한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루키적 멜랑콜리의 뿌리가 거기에 있다. 하루키에 익숙해진 자는 정치적, 이념적, 문화적 지각변동의 충격파를 자신의 몸과 마음에 하나의 조건으로 수용한 채 상실의 감각을 익히고, 낙관주의를 버리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영겁회귀의 운명에 대한 사랑을 우울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OOtUIMrJUyc
https://www.youtube.com/watch?v=SCt-Fz2-rGo&list=RDEaJR5LBqRDw&index=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