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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규 Sep 06. 2016

#2 파리 적응기

도시에 적응하는 덴 보통 2-3일이 걸린다.


2016년 8월 15일 월요일, 파리에서의 첫 아침을 맞이했다. 파리는 두 번째 방문이다. 10년 전인 2006년, 대학생의 로망인 배낭여행으로 파리에 왔었다. 7개국 투어의 6번째 나라였던 터라 많이 지쳐있었지만 에펠탑 야경은 지금까지도 생생할 정도로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외엔 빵이 맛있고, 루브르는 크고, 지하철은 더럽고 정도만 기억난다.


이번에 꼭 <오르셰 미술관>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월요일이 휴관이다. 파리의 미술관들은 대부분 월요일과 화요일에 나뉘어 쉰다. 월요일에 문 연 곳 중에 마음에 드는 곳을 찾다 <오랑주리 미술관>을 가기로 했다.


유명한 곳들의 휴관일을 보면

월요일 휴무 - 오르셰 미술관, 피카소 미술관

화요일 휴무 - 루브르 박물관, 퐁피두 센터, 오랑주리 미술관, 팔레 드 도쿄


오랑주리 미술관은 오르셰와 함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대거 만날 수 있는 곳이고, 특히 이곳은 모네의 <수련> 연작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미술관에 대한 설명은 다른 챕터에서 몰아서 하기로 하고) 루브르역에 내려 <튈르리 정원>을 통과해 오랑주리로 향했다.

튈르리 정원의 아침.
정원 옆엔 놀이공원이 있다. 어디에서도 관람차를 타본 적은 없지만 사진에 담기는 참 좋다.
멋진 노부부 뒤를 따라 걸었다.
또 다른 관람차가 보이는 곳이 정원의 끝이자 콩코드 광장.


정원 끝에 있는 관람차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왼편에 오랑주리 미술관이 있다. 연이은 테러로 파리의 보안은 최상에 올라 어느 곳에 가든 가방 검사를 했다. 오랑주리를 한참 구경하고(너무 좋았다!), 나와서 또 어디 갈까 고민하다 <팔레 드 도쿄>로 향했다. 계획 없는 여행은 동선 따위 상관하지 않는다. 보통의 여행자들은 파리를 구경할 때, 동쪽에 있는 거 모아서 보고, 중앙 모아서 보고, 서쪽 모아서 보고 할 텐데... 난 나비고 패스도 있어서 지하철 탔다 내렸다 버스 탔다 내렸다 수시로 반복했다. 이튿날의 나의 동선은 이러했다.

동쪽 끝 마레지구 -> 중앙에 루브르 -> 서쪽 끝 팔레 드 도쿄 -> 중앙 아래 뤽상부르 공원 

막간 TIP : 파리에 일주일 정도 있을 땐 나비고 패스를 사는 게 훨씬 편리하다. 저렴하고.


그래도 다행인 건 파리는 서울처럼 크지 않아서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가도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웬만한 곳은 3-40분 이내에 움직일 수 있다. 팔레 드 도쿄에서도 한참 동안 시간을 보냈다. 누워서 보는 영상 전시도 있었는데 누워있다가 잠들기도 했다. 나와서 보니 바로 옆에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이 있었는데 월요일이 휴관이다. 여긴 다음 주에 다시 오기로 하고 소르본 대학 부근으로 건너갔다. 버스를 타고 가다 셰익스피어 책방을 발견했고 급하게 내렸다. 영화 <비포선셋>에서 보던 낭만의 공간,을 충분히 느끼고 싶었으나 아침 7시부터 일어나 공원을 걷고 미술관을 갔다가 또 미술관을 가니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하루 종일 먹은 것도 없었다. 책방 옆 카페에서 애플크럼블을 하나 사 먹었다.

영화 <비포선셋>에서 제시와 셀린느가 9년 만에 재회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헤밍웨이, 스콧.F.제랄드 등 문인들이 즐겨찾던 서점이다.
애플크럼블과 에스프레소를 달라했더니 세트메뉴가 있다며 요거트까지 곁들여 줬다. 요거트가 가장 맛있었다.


밥 다운 밥을 먹지 않은 채로 허기만 채우고 소르본 대학 부근으로 걸어 <뤽상부르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에 도착하니 생각났다. 10년 전에도 이곳을 보고 '와 예쁘다' 했던 기억. 


'난 파리에 왜 온 걸까'


공원에 앉자마자 든 생각은 너무나 허무했다. 오늘 하루 동안 두 군데의 미술관을 갔고, 두 군데의 공원을 갔으며, 세계의 아름다운 서점으로 꼽히는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장소를 구경했다. 순간마다 너무 좋았고, 이런 게 낭만이지 라는 생각을 했으나 제대로 앉아 밥을 먹을 여유는 없었다. 마음이 조급했던 걸까. 계획도 없으면서 무얼 얼마나 많이 보고 싶었던 걸까. 오늘 하루 동안 미술관 한 군데만 가도 충분한 여행이었을 텐데 너무나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서울에서 바쁘게 사는 삶에 너무나 익숙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견디지 못했고, 휴대폰은 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전화가 오면 몇 번 울리지 않고 바로 받았고, 문자에 즉답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외근을 나와도 푸시 버튼을 수시로 눌러 새로운 메일을 확인했고, 답장했다.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파리에서 혼자 튀었다. 온전히 즐겨야 할 것들을 스스로 쫓기며 좋은 '척' 했다. 


'나 파리에 극기훈련 온 거 아니잖아!'


도시에 적응하는 데는 보통 2-3일이 걸린다. 1일 차엔 어리둥절하고, 2일 차엔 의욕이 너무 넘쳤다가 금세 가라앉는 편이다. 3일 차가 되어서야 도시의 템포에 맞춰 걷기 시작한다. 파리에서의 2일 차는 혼자 너무 뛰다가 지쳐서 도시가 싫어졌다. 친구들에게 "파리 별로야 싫어!"라는 문자를 보내고 책을 꺼내 들었다. 


오후 6시의 뤽상부르 공원.
8월의 파리는 해가 9시 넘어 지기 시작하기에 오후 6시에 가장 따뜻하고 나른한 햇살을 즐길 수 있다. 햇살이 정면으로 비춰서 카메라 렌즈에 빛이 새어 들어온지도 몰랐다.
공원 곳곳엔 연두색 의자가 있었고, 사람들은 앉아서 책을 읽었다.
여기저기 책 읽는 사람들. 나도 옆에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기 시작하니 마음이 노곤해졌다. 해가 저물기 전 서쪽에서 비추는 햇살을 즐기며 앉아 있는 건 참 행복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참 동안 앉아 있다 보니 어느덧 8시. 다시 허기가 진다. 조금 더 기다렸다 야경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오늘은 이 기분을 머금고 일찍 숙소에 들어가 쉬고 싶어 졌다. 숙소 근처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저녁으로 먹을만한 샐러드와 요거트를 사고, 맥주와 토마토-올리브 절임도 샀다. 내일은 서울에서 친구가 온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친구를 데리러 공항에 가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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