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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규 Oct 15. 2019

#1 도둑이야!

베를린에 도착한 지 사흘 째 아침이었다.

시차적응이 잘 안되어 계속 새벽녘에 일어났다. 베를린에 도착한 건 사흘 전. 저녁 7시가 다 되어 숙소에 도착했고, 장시간 비행이 피곤해서 브리또만 하나 사 먹고 바로 잠들었다. 숙소의 위치는 다양한 브랜드와 각종 맛집이 모여 있는 Mitte(미테). 이튿날 아침은 이 동네의 카페 문 여는 시간을 미처 파악하지 못해 너무 일찍 나가 길을 헤맸다. 보통 유럽이나 미국의 카페들은 7시부터 연다고 알고 있었는데 대부분 8시가 되어야 문을 연다. 본격적인 첫날이라 그냥 느슨하게 이곳저곳을 다녔다. 사흘 째 아침, 오늘도 3시, 4시, 5시, 6시. 한 시간에 한 번씩 계속 깼다. 6시부터는 방 불을 켜고 스스로에게 일어났음을 알린 뒤 다시 침대에 누웠다. 카페들이 왜 이렇게 늦게 여는 걸까 구시렁대며 8시에 맞춰 천천히 나갈 준비를 했다. 이 날따라 이상했다. 아침 먹으러 카페에 다녀올 건데 노트북부터 카메라까지 모든 물건이 들고나가고 싶어 졌다. 가져온 돈도 모두 가져갈까 하다가 오늘 쓸 만큼만 챙기고 트렁크에 다시 넣었다. 물론 비밀번호도 잘 잠그고. 그때 모두 가져갔어야 했다. 나는 보통 여행을 할 때 그날 필요한 것을 챙기고는 트렁크에 두고 다니는 편이다. 여행을 수차례 다녔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만나 보았다던 소매치기도 만난 적이 없었다. 파리에서도 바르셀로나에서도 에코백만 덜렁덜렁 매고 다녔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관광객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가 봐’라는 말을 자주 했고 스스로에게 여유만만했다.


가려고 했던 카페는 호텔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BEN RAHIM. 나는 여행을 할 때 구글 지도에 추천받았거나 내가 찾아본 곳들을 쭉 별을 찍어놓고 별이 많은 곳에 숙소를 잡는다. 그날그날의 일정은 따로 계획하지 않는다. 그냥 아침에 눈 떠서 찍어둔 별을 쭉 보며 가고 싶은 곳을 정한다. 누가 추천해준지는 모르겠지만 카페 외관 사진을 보았을 때 분명 내가 마음에 들 것 같았다. 지도를 따라 카페 앞에 갔는데 보이지 않는다. 분명 이 위치인데 이상하다 하며 둘러보니 골목 안에 있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오늘따라 날씨도 화창하니 좋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때 풍경이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와! 하고 말았다. 운수 좋은 날이었다. 카페의 외관부터 내부 모습까지 모든 것이 내 스타일이라 약간 흥분된 상태로 안으로 들어갔다. 코르타도와 크로와상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어제의 일기를 쓰며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여기 너무 좋아! 분위기 좋지!!!” 사진을 보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앉아있었다. 약 2시간이 지났을까. 카페에서 나와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약간 날이 추워 옷을 하나 더 걸쳐 입고 나올 생각이었다.


숙소에 돌아와서 캐리어부터 열었다. 돈도 더 가져갈 생각이었다. 베를린은 현금만 가능한 곳들이 많고 이번 여행에선 옷도 좀 살 생각이라 넉넉하게 환전을 해왔다. 이렇게 많은 유로를 들고 온 건 사실 처음이었다. 그런데 웬걸, 돈이 없다. 하나도 없다. 분명 두 시간 전에 넣어두었는데 내 돈이 사라졌다. 너무 당황해서 내가 다른데 둔 걸 거야 꿈꾸고 싶었다. 아니다. 분명 나가기 전에 이곳에 넣어두었다. 놀란 마음을 겨우 부여잡고 리셉션으로 내려가서 매니저에게 항의했다. 매니저는 나와 함께 방으로 올라가며 카드 기록이 누가 들어왔는지를 점검해줄 거라고 안심시키는 듯하더니 나보고 어디 다른데 두고 그러는 거 아니냐는 추측성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다른 직원이 왔다. 기록을 봤는데 방에 들어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한다. 기계의 결함이 아니냐 물었더니 기계는 완벽하단다. 한 여자 매니저는 나를 앉혀두고 갑자기 맛집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다 나가라고 하고 혼자 방에서 엉엉 울었다. 한참을 엉엉 울다 보니 이럴 때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가방을 보는데 가방이 훼손되어 있다. 캐리어 뒷부분이 깨져있고 지퍼가 망가졌다. 다시 카운터로 뛰어내려가 항의를 했다. 그 사이에 대사관에 연락을 했고, 대사관 담당자 통해서 경찰을 불러달란 말을 했다. 로밍을 해가지고, 심카드를 사지도 않아서 다음 달 전화비가 얼마 나올진 걱정됐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사관에서는 내가 직접 경찰 불러달라는 말을 다시 해야 된다고 해서 “please call me police”를 말했고, 그는 불러주겠다고 하고는 30분이 넘게 계속 경찰이 통화 중이라는 말을 했다. ‘어떻게 경찰이 통화 중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베를린 사는 지인에게 SOS를 요청했지만 바로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110. 독일 경찰 번호. 계속 기다릴 수 없어서 직접 전화를 걸었고 바로 연결이 되었다. 경찰을 기다리는 동안 상황 설명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영어가 유창한 편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번역을 부탁했다. 대사관에서도 베를린 지인도 바로 올 상황이 아니어서 내가 혼자 해결해야 했다.


경찰은 한 시간 정도 뒤에 도착했다. 또 다른 여자 매니저는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독일어로 전달했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순 없지만 뉘앙스에서 굉장한 불쾌함이 느껴졌다. 이후 경찰은 내 이야기를 물었고 미리 준비해둔 상황 설명을 보여준 뒤 추가 설명들은 더듬더듬 천천히 전달했다. 함께 방에 올라가 가방 사진을 찍고, 문의 결함을 확인했다. 지문 채취는 하지 않았다. 문을 덜 닫은 게 아니냐고 했는데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문을 계속 잘 닫고 다녔다. 그리고 만약 덜 닫으면 들어가서 가방을 부수고 돈을 가져가도 된단 말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호텔 측은 2초면 문이 자동 잠금 된다고 하면서도 내 실수일 거라고 시종일관 낄낄 거리며 말했다. 무서웠다. 약자의 입장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경찰은 도둑이 든 게 맞는 것 같은데 CCTV가 없어서 도와줄 게 없다고 미안하다며 떠났다. 너무 황당해서 어떻게 그냥 갈 수 있냐고 물었지만 방법이 없단다. 경찰이 떠나고 베를린에 사는 지인이 도착했다. 독일어로 이런저런 컴플레인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환불도 안 해준단다. 내가 예약한 호텔스닷컴에 항의하라고 했다.


우선 캐리어를 싸서 호텔을 나왔다. 이곳에서 한시라도 있을 수가 없었다. 걸어서 5분 거리 Hackescher Markt(하케셔 마켓)에 있는 다른 호텔로 향했다. 너무 좋은 방이다. 몽비주 파크 바로 옆, 누워서 공원이 보이고 거실이 있고 소파가 있고 쉴 수 있는 의자가 있는 아주 좋은 방. 돈도 많이 썼다. 1박에 30만원. 원래 그 호텔에 2박이 남아있던 상태에서 나온 거라 이곳에 2박을 예약했다. 짐을 풀고 지인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는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나에게 뭐라도 먹자 했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그의 일정을 물은 뒤 괜히 따라다녔다. 혼자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다. 지인은 약속이 있어 떠나고 나는 숙소를 향해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터라 역도 잘못 내려서 다시 타고를 반복했다. 겨우 방에 들어와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누우니 하루 동안의 긴장이 풀리면서 눈물이 났다. 너무 괴롭고 무서웠다. 오후 8시. 하루가 너무 길었다. 우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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