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테에서 크라이츠베르그로, 우연의 인연
“안녕하세요, 이인규입니다. 친구가 제가 걱정돼서 그랬나 봐요.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함께 차 한잔 해주실래요?”
용기 내어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내일부터 묵으려던 에어비앤비에도 내가 상황이 이런데 취소해도 되냐는 문자도 보냈다. 에어비앤비 주인 Panni는 전날이지만 상황을 이해해주고 내가 편한 대로 하라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2시간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전한 뒤 나갈 채비를 했다. 에어비앤비가 있는 동네까지 걸어갔다와 볼 작정이었다. 약 40분 거리, Kreuzberg(크라이츠베르그). 몽비주 파크를 지나 프리드리히 다리를 건너 베를린 돔으로 향했다. 베를린 돔에 가까워지자 관광객들도 많아졌다. 베를린의 관광지를 제대로 본 게 지금이 처음이다. 여행지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해서 보통 첫날은 동네만 돌고 그다음부터 관광을 시작하는데, 그다음 날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져서 모든 게 꼬였다. 왜 오늘도 날씨가 이렇게 좋은 걸까. 천만다행이다. 비까지 왔으면 더 우울했을 텐데 말이다. 베를린 돔을 바라보며 앉아 이곳저곳을 찍는데 갑자기 필름 카메라 셔터가 닫히지 않는다. 고장이다. 왜 얘까지 말썽일까 한숨이 났지만 금방 포기했다. 그래 나의 베를린은 흑백이야. 필름을 포기하고 흑백 모드로 되어있던 디카를 꺼내 또 셔터를 눌렀다. 무얼 보고 누르는 건지도 모르게 마구잡이로 눌러댔다.
“안녕하세요, 제가 메시지를 늦게 봤어요. 혹시 지금 어디 계세요?”
Summer로부터 답장이 왔다. 나는 Bonanza Coffee로 향하던 중이라고 말했다.
“혹시 Kottbusser Tor 역에서 가까운 보난자로 오시는 건가요?”
난 내가 가고 있던 보난자의 주소를 검색했더니 그곳이 맞다. 알고 보니 그녀는 그 동네에 살고 있었다. 더 반가웠다. 오후 2시에 보난자 커피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계속 걸었다. 미테에서 크라이츠베르그로 향하는 길은 동네 풍경이 매우 달라졌다. 세련된 한남동에서 아기자기한 연남동으로 가는 느낌. 동네다. 날씨도 좋았고 볕이 예뻤다. 평소 같으면 이곳저곳을 찍으며 갔을 텐데 다 귀찮았다. 카페에 가니 저 멀리 앉아있는 동양인 여성 한 분이 바로 보였다.
“안녕하세요,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를 만나자마자 고맙다는 인사부터 했다. 그녀는 나에게 커피를 사주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일면식도 없는데 이런 도움을 받게 되어 너무 고맙다는 말 밖에 반복해서 나오지 않았다. 정말 고마웠다. 그녀는 저녁 6시에 친구와 집에서 밥을 해 먹기로 했는데 괜찮으면 함께 하자고 했다. 나는 혼자 있기 싫어서 민폐가 안 된다면 가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곳에 걸어오고 있던 이유를 설명하며 내가 내일부터 묵기로 한 에어비앤비의 주소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자기 집 근처인 거 같다며 신기해했다. 나도 너무 신기하고 한편으로 안도했다. Panni에게 연락해서 친구가 동네 친구를 소개해줘서 내일 그대로 가겠다는 말을 전하고, 우리는 카페에서 나와 걷기 시작했다.
Summer는 내가 내일부터 묵게 될 동네를 미리 걸어보자고 했다. 그곳은 백조가 사는 천이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2-3일에 한 번씩 터키 장터가 열리고, 천을 따라 걸으면 마음이 편해질 거라고 했다. 진짜 그랬다. 천에 도착하니 양쪽으로 뒤덮인 나무들이 노란 옷을 덮고 있었다. 햇빛이 물에 반짝이는 모습도 좋았다. 여유로웠다. 우리는 음료를 사서 백조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오후 4시가 넘은 시간. 해가 얼굴 정면으로 내려왔다. 눈이 부셨지만 선글라스를 끼고 싶진 않았다. 그냥 이 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오늘 하루 동안 먹은 건 커피 한 잔, 맥주 한 잔뿐이었지만 괜찮았다. 누군가가 내 옆에 있어준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게 충분했다.
한참을 앉아있다 그녀의 집으로 갔다. 이 집으로 이사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지금 내가 이 집에 가장 먼저 방문하는 손님이라고 한다. 별 일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것. 이곳에 와서도 새삼 느끼고 있다. 내가 돈을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그녀를 만나게 되었을까? 아마 아니지 않았을까? 집 구경을 하고 창가 자리에 앉아 바깥 풍경을 보고 있는데 또 우르르 비가 쏟아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쏟아지는 이곳은 베를린이다.
어느덧 약속 시간이 되어 우리는 다시 밖을 나섰다. Summer의 친구분 또한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 함께 장을 보고 돌아와 자연스레 음식을 만들었다. 누가 무얼 하자고 나누지도 않았는데 나는 채소를 다듬고, Summer는 식기를 닦고, 그녀의 친구는 면을 삶았다. 소스는 내가 만들었다. 마늘, 가지, 버섯을 큼지막하게 썰은 토마토 파스타. 오늘의 첫 끼이자 내가 베를린에서 누군가에게 만들어준 첫 끼.
각자 살아온 이야기와 해외 거주의 장단점 등 이곳에 있기에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8시가 넘었다. 함부르크에서 도와주러 오는 분을 만나러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