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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플레이크 Jul 01. 2021

베를리너들이 사랑한 공원 ③ 라이제 파크

베를린 다이어리

날이 좋으면, 거의 매일 노트북을  들고 공원으로 갔다. IT업계에서 일하는 남자 친구는 계약 자체가 재택근무여서  사무실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집이든, 공원이든, 외국 도시든, 어디서든 일만 하면 되었다. 반면 반백수나 다름없는 나는 일이래봤자 베를린  원고를 쓰는 것이 전부지만, 그나마도 일기라도 쓰면 다행이지, 원고는 대부분 가뭄에  나듯 썼다.

 

우리는 주로 집 앞에 있는 공원을 가거나 좀 더 부지런한 날에는 라이제(Leise) 파크로 갔다. 라이제 파크는 프란즐라우어베르크의 중심가에 있지만, 잘 알려진 공원은 아니었다. 주변에 많은 상점과 카페가 있는데도 이곳은 아는 사람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오래된 묘지 안에 숨어있는 작은 공원이기 때문이다. 라이제 파크란 이름으로 문을 연 것도 2011년도에 들어서였다.

 

세인트 마리엔과 세인트 니콜라이 묘지. 이곳은 1802년부터 존재했다. 200년이 훌쩍 넘는 묘지다. 1970년에 폐쇄되었다가 1995년에 다시 문을 열기까지 25년 동안은 사람의 발길도 닿지 않았다. 그 지난 역사의 시간과 멈춘 시간이 고스란히 묘지와 공원에, 그리고 나무들에 남아 있었다. 잘 다듬어진 잔디 대신 이곳에는 검은 비석과 잡풀과 나이를 알 수 없는 나무들이 수두룩했다. 묘지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죽 들어가면 우리들의 은밀한 공원, 라이제 파크가 나왔다.

 

‘라이제’는 ‘볼륨을 줄인’, ‘들릴 듯 말 듯한’, ‘나지막한’ 이란 뜻이 있다. 이름처럼 이곳에선 바람도 나지막한 숨소리를 낸다. 짧은 풀들이 잔디처럼 자라 있고, 그 뒤로 무릎까지 오는 잡풀이, 그 뒤로 얇은 나무들이, 그 뒤로 수십 년, 혹은 백 년을 넘겼을 큰 나무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베를린의 큰 공원들이 탁 트여 있고 나무들이 몰려있는데 반해, 여기는 큰 나무들이 높은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어 신비로웠다. 풀밭에 누우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시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걸 전혀 느낄 수 없는 기운이 감쌌다. 풀 숲이 무성해 누가 와도 바로 앞까지 와서야 인기척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베를린에서 묘지를 가는 건 공원을 가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이다. 공동묘지란 말은 섬뜩하지만, 베를린 사람들은 묘지 안에서도 공원처럼 산책하고, 점심을 먹고, 아이들을 풀어놓고 놀게 한다. 베를린에서 묘지는 또 다른 형태의 공원인 셈이다. 오래된 묘비들은 아름답고, 그 앞에는 시들지 않는 꽃들이 있으며, 나무가 우거진 길은 걷기 좋다. 번잡한 소음을 피해 조용한 공원에 가고 싶을 때 묘지는 언제나 좋은 선택지가 되어준다.    


우리가 공원에 도착하는 시간은 주로 서너 시. 살갗이 타 들어갈 것처럼 덥다가도 나무 아래만 가면 시원한 그늘이 있었다. 우리는 돗자리를 깔고 엎드려 가져온 스피커로 음악을 듣거나, 노트북을 두들기거나, 간간히 키스를 한다. 가끔은 키스를 주로 하고 일을 간간히 하기도 하고…. 더운 날, 티셔츠를 훌렁 벗어던져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남자 친구의 엉덩이를 배고 누워 스테레오 랩(Stereo Lab)의 노래를 듣는다. 후두둑 갑자기 비가 내려도 일어나지 않는다. 비는 높은 나뭇잎들이 막아준다. 일은 핑계고 라이제 파크에서 멍하니 누워 있는 날이 더 많다. 7시가 넘어가면 사위는 더욱 고요하다. 해는 9시가 훌쩍 넘어야 진다. 나무와 천둥 전 바람과 음악으로 둘러싸인 시간.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군.”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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