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의 블레드 스파
지금은 남녀가 다 벗고 같이 들어가는 사우나를 조금은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지만, 내게도 처음은 충격과 당혹스러움의 연속이었다. 꽤 적응 기간이 필요한, 갈 때마다 심호흡이 필요한 문화 충격이었다. 공용 사우나를 처음 가본 건, 4년 전 슬로베니아의 블레드(Bled)에서였다. 스위스에서도 사우나를 가봤지만 그때는 수영복을 입었다. 발가벗고 남녀가 같이 들어가는 사우나는 블레드가 처음이었다.
블레드는 슬로베니아의 대표 휴양 도시로 유명하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알프스 산맥이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을 거쳐 블레드까지 닿아 있다. ‘율리안 알프스’라 불리는 산 꼭대기의 만년설과 빙하가 녹아 생긴 호수가 눈부시게 아름답다. (슬로베니아를 홍보하는 대표 이미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블레드는 오래전부터 힐링을 위한 휴양지였다. 1852년, 스위스 출신의 의사인 아놀드 리클리(Arnold Rikli)가 요양 차 이곳에 왔다가 병이 나아 돌아갔다. 당시 그의 치료를 도운 것은 매일 햇빛을 쪼이고, 온천에서 수영하고, 오래 걸은 것. 2년 뒤 다시 블레드로 돌아온 의사는 공기, 물, 햇살을 이용한 자연치유 요양소를 차리고, 유럽의 부유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요양을 원하는 사람은 물론 당시 아편이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도 많이 찾아왔다. 블레드는 곧 유럽 전역으로 알려지고, 좋은 수질을 바탕으로 한 스파 산업도 나날이 발전하였다. 스파와 휴양 시설을 잘 갖춘 호텔들이 호숫가 주변으로 많이 생겨났다.
그랜드 호텔 토플리체(Grand Hotel Tolpice). 유명하기론 이곳의 테르말 스파가 으뜸이다. 17세기에 발견된 22℃의 자연 온천수를 이용한다. 미네랄이 많이 함유된 이 물은 목욕 중 직접 마실 수도 있게 음수대도 설치되어 있다(일본 온센에서 온천수를 마시거나 사케 한 잔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스 신전의 기둥처럼 되어 있는 스파 내부는 100년 넘은 원형을 보존한 상태로 개조되었다. 블레드에서 가장 럭셔리한 호텔 스파로 분위기와 시설 모두 고급스럽다. 취재차 이곳을 방문, 둘러볼 수 있었지만 직접 스파를 해볼 시간은 없었다. 뭐, 출장을 오면 늘 있는 흔한 여행기자의 비애....
한국 여자 셋이 점령한 블레드의 사우나
자연 온천수는 아니지만, 내가 머물렀던 블레드 골프 호텔(Bled Golf Hotel)에는 보다 대중적이고 큰 규모의 스파 시설이 있었다. 수영복을 입고 들어가는 대형 아쿠아 존과 알몸으로 들어가는 사우나로 구분되었다. 출장 올 때 수영복을 안 챙겨 온 나는 사우나만 해보려고 방에서 샴푸와 린스를 챙겨 갔다. 사우나는 옷을 갈아입는 곳부터 남녀 구분이 없었다. 1차 쇼크... 정해진 사물함 번호 앞에서 여자건 남자건 옷을 훌렁 벗었다. 샤워를 하려고 들어간 샤워장엔... 아예 문이 없었다. 2차 쇼크... 말인즉 열심히 머리를 감거나 비누칠을 하는 동안 누구든 지나가며 볼 수 있는 개방된 구조였다. 나는 그 뻥 뚫린 샤워장에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사람도 별로 없었는데... 머리를 감을 용기가 없었다. 조용히 옷을 챙겨 입고 다시 방으로 올라와서 머리를 깨끗이 감고 다시 사우나실로 내려갔다.
사우나 공간 안에서는 혹시나 슬로베니아만의 사우나 이용법이 있나 싶어 직원에게 물어봤다. 멋모르는 동양인이 실수를 하면 안 되니까. 현지인들이 하는 방식대로 사우나를 하고 싶었다. 별다른 건 없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사우나 안에서 땀을 흠뻑 낸 다음 나와서 샤워로 씻어내고 다시 사우나로 들어가는 걸 반복하면 된다고 했다. 물도 충분히 마시고. 나체로 들어가는 사우나 안에서 타월을 몸에 두르고 있어도 되는지도 물어봤다.
“꼭 벗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벗고 있는 게 훨씬 편할 텐데요. 너무 더워서 힘들 거예요. 맨 몸으로 있는 게 더 좋아요.”
굳이 타월을 몸에 두르고 앉겠다면 하나를 더 챙겨서 들어가야 한다. 이곳에서 타월은 엉덩이부터 발까지 닿게 아래로 펼친 다음 그 위에 앉는 용도로 쓰인다. 사우나 동안 내가 흘리는 땀을 나무 계단에 직접 닿지 않게 하는 용이다. (이건 독일도 마찬가지.) 그 외에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 사우나 안에 여자뿐만 아니라 알몸의 슬로베니안 남자들도 있다는 것. 사우나에는 나이 많은 노인들만 가득하다는 말과 달리, 블레드의 스파에는 젊은 커플과 젊은 남자들도 많았다는 것! 블레드에는 스키장이 많아 겨울철에는 스키를 타려는 젊은이들이 많이 오고, 사우나를 즐기러도 많이 오는 것이었다!
함께 출장 중이던 잡지 기자 동료 둘과 셋이서 열심히 블레드의 사우나를 드나들었다. 일행 중엔 이십 대의 젊은 기자들도 있었지만, 사우나를 아침저녁으로 들락거린 건 우리중년의 여자 기자들 뿐이었다. 건식보다 습식 사우나를 좋아하는 내가 처음 들어간 건 습기가 가득 찬 터키식 사우나. 안은 매우 어둡고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나는 더듬더듬 거리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건너편 자리에 덩치가 큰 남자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엔 비슷한 덩치의 부인도 앉아 있었다. 너무 조용히들 계셔서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나는 '흐억'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혼자 있는 줄 알았던 어두운 공간에 갑자기 사람이 드러나니 기겁할 밖에. 이후론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땀 빼는 데에 열중했다. 동양 여자 셋이 들어가니 핀란드식 사우나 안에서 혼자 망중한을 즐기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우리가 내쫓은 것 같아 조금 겸연쩍었다. 사우나 안에서는 홀딱 벗지만 사우나실을 옮겨 다닐 때는 타월을 몸에 두르고 다니는 게 일반적이다. 자쿠지 안에서 바싹 껴안고 키스하는 커플도 있었다. 안 보는 척 쳐다보았다. 사우나에서 데이트하는 이들이 마냥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매일 빠듯한 일정 때문에 블레드에서 몇 시간씩 스파를 할 여유는 없었다. 알뜰살뜰 시간을 쪼개 사우나를 즐기고, 짧은 사우나 후에도 금방 보들보들해지는 피부와 ‘물광’이 흐르는 얼굴을 쳐다보며 우리는 서로 감탄했다.
떠나는 날 아침의 사우나
슬로베니아에는 블레드와 함께 유명한 또 하나의 스파 휴양도시가 있다. 슬로베니아의 남동부 지역에 있는 돌렌스케 토플리체(Dolenjske Toplice)다. 해발 179미터에 자리한 이곳에는 포도원과 과수원이 많고 무엇보다 13세기 초에 발견된 온천수가 유명하다. 블레드는 율리안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고 스파도 즐기는 젊은 층이 많다면, 이곳 돌렌스케 토플리체는 전문적인 치료와 요양을 하는 노년층이 주로 찾는다.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치료가 결합된 만큼 이곳의 웰빙 센터는 시설과 프로그램이 매우 전문적으로 짜여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발네아 웰니스 센터(Balnea Wellness Center) 안에는 세 개의 큰 야외 온천풀과 실내 풀이 갖춰져 있다.
호텔에 늦게 체크인을 하고 다음날 점심 즈음에는 벌써 도시를 떠나야 하는 스케줄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잠이 깼다. 밤새 숲의 영혼들이 놀다 간 것처럼 창밖엔 안개가 자욱했다. 침대에서 부스럭대다 사우나로 향했다. 발네아 호텔에서 긴 실내 통로를 통해 목욕 가운만 입고도 스파 센터로 갈 수 있었다. 통유리창으로 만들어놓은 복도를 걸으며 이른 아침의 햇살을 만날 수 있었다. 추운 날씨에는 더욱 유용할 통로였다.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던 그 복도를 지나던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밖을 내다보며 조용히 몸을 담그고 있던 시간. 9박 10일의 슬로베니아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사우나를 하느라 마을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도 없었지만, 조금도 아쉽지 않은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