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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Nov 24. 2023

청소의 효능


한 해 평균 150권을 읽는다. 여기서 (직업으로써) 청소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독서가 청소 시간에 이뤄지기 때문이다. 비율로 봤을 때, 청소하며 청취 모드로 듣는 책이 85%고, 눈으로 읽는 시간이 15%다. 그러니까 127.5권을 청소하면서 소화하고, 나머지 22.5권을 청소하지 않는 시간에 소화한다. 청소는 독서로 고쳐 쓸 수 있다. 고객 집은 도서관이다. 청소기 손잡이 움직이는 게 책장 넘기는 것과 같다. 10년 일하다 보면 신체가 자동화된다. 대체로 오래된 고객이다. 그들 집은 익숙하다. 시스템 1의 뇌에게 자율주행을 맡긴다. 남은 시스템 2의 뇌는 문장을 음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육체노동에서 지적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이제 그 평균치를 한참 낮출 시기가 찾아왔다. 청소 사업을 떠날 날까지 일주일 남았다. 일주일 뒤면 사업 양도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나의 프랜차이즈 권한은 소멸한다. 더 이상 경제 활동을 위해 청소기 잡을 일이 없다. 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로봇 청소기가 청소기 잡는 일을 대리한다. 말인즉슨 85%의 독서 기회가 사라진다. 성인 ADHD다. 가만히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 어렵다. 자극은 많고, 몸은 하나다. 시선을 한 가지 일에 고정할 수 없다. 청소는 시선과 육체를 잡아둔다. 내게 허락된 것은 생각뿐이다. 인간은 약간의 제약이 있는 상태에서 더 나은 퍼포먼스를 발휘한다. 틀의 효용이라고 하는데, 브레인스토밍에서 약간의 제약을 두는 게 더 많은 아이디어를 불러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더 이상 나의 시선과 몸을 잡아둘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발제 도서만 근근이 읽는 상황이 찾아올지 모른다. 그 경우에 읽는 책의 수는 한 달에 3권이다. 사회학 모임은 매달 1회, 멜번 리딩홀 모임은 매달 2회(격주)다. 리딩홀 스케줄이 3주 간격으로 되는 경우도 있다. 독서모임 발제 도서만 계산했을 때, 1년에 30권가량이다. 1/5로 줄어드는 셈이다. 어른으로서 해야 하는 일은 한다. 문제는 해야 하는 일의 범위인데, 쁘띠 어른인 나는 그 범위가 좁다. '독서모임에 발제 도서 읽어 가기'가 간신히 그 좁은 범위에 속한다. 꼭 읽어야 하는 책 30권만 읽고 나머지 시간은 다른 활동으로 채울 가능성이 높다.



나는 팀 구조주의다. 개개인의 능력과 소질보다 환경에 가산점 준다. 타고난 것보다 길러진 것의 힘을 믿는다. 환경이 중요하다. 몇몇 초인적 인간을 제외한 대부분 인간은 고만고만하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다르다. 그것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사업을 예로 든다. 나는 충분한 돈이 있고, 카페를 차리고 싶다. 내 주위엔 직장인 뿐이다. 자영업을 해본 사람이 없다. 집기를 어디서 구하는지, 사업자 신고를 어떻게 하는지, 부동산 계약을 어떻게 하는지, 배선 공사를 어떻게 하는지, 회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포스기를 어떻게 들여오는지 모른다. 스텝 1부터 100까지 해본 적도 없고 어떻게 하는 지도 모른다. 하나하나 인터넷을 검색하고 발품 팔아 찾아야 한다. 이 100가지 일을 다 하려니 시작 전에 탈진한다. 결국 나는 가게를 열어보기도 전에 포기한다. 반면 주위에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이 가득한 환경이라면 얘기는 다르다. 그들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고 이야기를 듣는다. 사업을 구상 중이라 말했을 때 전문가를 소개해 준다. 그 덕에 내가 해야 할 일과 남에게 맡겨도 되는 일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전문가에게 맡길 일을 제외하니 스텝 1부터 100까지 중에 온전히 나의 몫은 10가지로 줄어든다. 경험 있는 주변인이 90가지를 대리할 사람을 소개해 준다. 나는 한정된 에너지를 그 10가지 일에 쏟는다. 100은 어렵지만, 10은 할 만하다. 결국 주위 환경의 도움을 받아 가게를 연다.



내게 독서는 위 사례와 마찬가지다. 독서는 내게 긍정적이고, 평생 이어갈 활동이다. 독서만큼은 다다익선이다. 시간을 아무리 많이 써도 후회하지 않는다. 얻는 것이 많다. 더 읽고 싶은데 집중력과 끈기가 한정적이다.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두지 않으면 독서가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청소가 나를 붙잡는 역할을 했다. 고객에게 돈 받기 위해서 나는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청소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고객 집으로 제시간에 갈 수 있다. 신체 활동에 제약이 생긴다. 책 들으며 딴짓할 수가 없다. 청소할 때는 온전히 책에 집중한다. 일을 멈추고 메신저 볼 수 없고, 유튜브 시청할 수 없고, 인스타그램 확인할 수 없다. 부지런히 손과 발을 움직여야 한다. 결국 청소는 독서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 독서하고 싶은 의지가 적합한 환경을 만나 행동으로 이뤄진다.



도식화하면 설명이 편하다. 행동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에너지가 100이다. 100이 되면 행동한다. 책을 읽고자 하는 의지가 150이다. 내 게으름이 -30, SNS가 -20, 유튜브가 -20, 갑자기 생각난 할 일이 -30을 반영한다. 이런저런 자극에 부딪히고 남은 독서 의지는 50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반면 청소할 때는 다르다. 게으름 -30은 디폴트다. 게으른 인간으로 태어나 평생을 가져가야 할 디버프다. 게으름 -30은 반영하지만, 청소가 SNS, 유튜브, 다른 할 일 하는 것을 막는다. 나는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일을 해야 한다. 근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탈은 귀에 이어폰 꼽는 정도다. 결국 150의 의지에서 게으름 30을 차감하니 120이 된다. 독서하겠단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진다.



청소 덕에 다독했다. 일주일 뒤에 독서 최적화 환경에서 벗어난다. 독서량을 유지할 수 없다. 세상엔 정보와 자극이 무수히 많다. 청소가 그 많은 자극과 정보에서 방파제처럼 나를 지켜줬다. 이제 방파제가 없으니 정보와 자극에 취약하다. 책 좀 읽어볼까 하다가도 카톡과 유튜브와 인스타그램과 인터넷 뉴스와, 온라인 정보글과 유머글에 시선을 뺏긴다. 독서는 실패한다. 발제 도서는 읽어야 한다. 이 당위가 독서 의지를 일시적으로 300까지 올린다. 그 경우엔 게으름과 각종 자극에 뺏기는 에너지를 차감해도 100 이상의 에너지가 남는다. 결국 꼭 읽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책을 지금처럼 가까이할 수 없다.



감사한 일이다. 지난 10년, 평생 읽은 것보다 많은 책을 읽었다. 나와 세상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많았다. 많은 일에 이유를 물었다. 이야기를 통해 타인의 아픔에 더 공감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문제가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개선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왜 타인에 다정해야 하는지, 존중해야 하는지 알게 됐다.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이고, 타인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지 여실히 깨닫는다. 나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니 자연스럽게 세상을 향한 냉소적 태도가 사라졌다. 청소가 많은 것을 바꿨다.



우리 윗세대가 좋아하는 한국식 식당이나 휴양지에 특징이 있다. 00의 효능이라며 업장의 재화와 서비스를 홍보한다. 큰 패널에 비장한 폰트로 장황하게 장점을 나열한다. 능이버섯의 효능- 기관지, 천식, 감기에 좋고, 콜레스테롤 감소, 당뇨, 고혈압에 효과가 있으며 중풍을 예방하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한다. 능이버섯의 효능, 유황온천의 효능, 홍삼의 효능, 강황의 효능, 밀크시슬의 효능, 녹용의 효능... 효능이라는 단어가 주는 코믹한 이미지(비슷한 단어론 '신세대'가 있다)가 있다. 효능이라는 단어 앞에 온 모든 식재료는 만병통치약이고 진시황의 불로초이고 그리스신화의 암브로시아이며 엘릭서다. 독서의 효능은 특정 식재료보단 더 실효적이다. 내게 청소는 독서와 동의어다. 무수한 청소의 효능을 실감한 10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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