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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uka Azusa May 28. 2024

세상을 관찰해 그 핵심을 넘은 진화생물학의 시작.

다윈의 실험실 ~그 위대한 여정의 시작과 끝~

 다윈. 「종의 기원」을 쓴 저자이자, 생물학의 판도를 바꾼 위대한 생물학자이자 철학과학자. 그는 자신의 저서인 「종의 기원」을 집필하며 실험과 연구를 통해 생물의 진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검증하는 자료를 차곡차곡 모았다. 다양한 과학분야의 이해를 통해 각 학문을 연결하며 모은 자료와 통계는 그에게 여러 개의 가설을 만들 수 있게 했고, 그 가설들을 종합하며 하나의 결론으로 증명해 가는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그는 직접 경험하고, 실험하기를 원했으며 그렇게 하였다.


 다윈의 시대에는 주로 귀납적인 방법으로 과학을 연구했다. 개별적인 사실을 충분히 수립하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일반적인 원리를 추론하는 방식이다. 이미 알려진 원리를 사용하여 자연현상을 예측하고, 간결하고 검증 가능성을 가진 질문을 통해 타당성을 검증하는 방식인 연역법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순수한 연역법은 종전에 사용되던 귀납법을 절대적으로 대체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귀납법과 연역법은 적절하게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함께 활용되었고, 이러한 점으로 인해 오늘날의 과학이 더 중립적이고 논리 지향적인 학문이 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다윈의 실험은 현대와는 달라 아주 엄격한 실험설계, 즉 변수의 통제에 있어서 더욱 치밀하게 집착하지 않았다. 당시의 실험환경이 그러한 것도 있지만, 그는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하여 불확실성의 존재에 대한 이해도 매우 높았다.     


 그는 어린 시절 에든버러에서 연구를 했었으나, 연구스승에게 그의 실험 및 기타 지식들의 연구 결과를 도둑맞는 것에 지쳐 에든버러에서의 공부를 그만두었다. 그런 아들의 장래를 걱정한 그의 부친의 의견에 따라 그는 케임브리지로 가게 된다. 에든버러에서 배우고 연구했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케임브리지에서 자연철학을 익히며 그는 종교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과학의 시대가 태동하는 과정을 그대로 목격했다.     


 과학철학의 발달과 더불어 다윈이 성장해 나가던 시대는 화학부터 시작해, 과히 현대 과학의 태동기라고 불려야 할 시기였다. 그는 생물학과 지질학 및 변형학을 종합하여 세상을 이루는 것들, 즉 지구와 생명을 동시에 이해하려고 했다. 생물이 변하는 것에 있어 생물이 살아가는 환경을 중요시했으며 그에 따른 이해를 확고히 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글렌로이 논문에서 유럽 산악 내에서 발견되는 긁힌 자국이 파도와 지층 상승으로 인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나 그로부터 약 1년 후에 아가시(스위스의 박물학자)가 전 세계에 빙하기가 존재했고, 빙하의 이동에 따른 지형과 자연현상의 산물임을 증명해 내었다. 다윈은 이 시절의 자신에 대해 매우 부끄러워했고 후에 절절히 이 논문에 대해 후회했었다.


 다윈과 아가시의 사례에서도 이렇듯 근대의 과학은 다양한 가설과 새로운 발견 및 그에 따른 폭발적인 지식의 규명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다윈은 본인의 연구와 더불어 타 연구자들의 다양한 논문에서도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는 멜서스나 허셜 및 윌킨슨 등의 연구자의 기록과 자신이 수집한 샘플 혹은 야생의 환경이나 다양한 농장에서의 사육 환경 관찰 등을 통해, 타 과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견해에 관해 포괄적인 시선으로 이러한 이론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냉철한 조언자인 후커의 등장으로 그는 냉철하고 비판적인 시각이 가져다주는 논점의 환기 및 발전된 관측 환경(고배율 현미경 사용) 조성 등의 조언을 통해 다양한 방면의 발견을 할 수 있었다.


 그중 그에게 있어 가장 획기적이었던 연구 중 하나가 바로 따개비의 연구이다. 다윈은 관찰기록 중 암수한몸으로 알려져 있던 따개비가 실제로는 암수가 따로 있으며 수컷은 아주 작은 체구의, 생식만을 담당하는 존재로 남겨진 것에 대해, 이미 분화되어 다른 성별을 가진 생물의 몸에 어째서 상대 성의 흔적이 남겨져 있는지 고심했다. 생물에게 남겨진 패턴의 공통점을 통해 그는 자연이 자가수정을 피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연구관찰은 그가 「종의 기원」을 집필하는 '자연선택'에 관한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따개비와 같은 작은 집단에서의 다양한 변이를 관찰한 것을 토대로, 전 세계의 비둘기를 수집하기에 이른다. 비둘기였던 이유는 사실 별 것 없었다. 전서구 혹은 관상용 애완조로도 길러지는 비둘기는 크기가 작았고, 성체가 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이미 자연에 존재하는 종 및 육종가들에 의해 개량된 변종들까지, 아주 다양한 비둘기들이 많았다. 이러한 비둘기들의 다양성은 다윈에게 자연선택이라는 가설에 어떠한 확신을 주리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보통 현장에서 교배를 하는 육종가들은 각각의 다른 야생비둘기에서 저마다 품종이 유래한다고 믿었으나 학자들은 조금 달랐다. 간혹 제한된 사육을 하는 농장에서도 돌연변이가 튀어나오는 현상 같은 것에서 돌연변이에 대한 추정만 할 뿐이었다. 당대의 박물학자인 데니얼 제이 브라운의 저서에서는 비둘기가 야생 바위 비둘기에서 분화된 다양한 종의 비둘기들은 우연히 나타난 변종 비둘기들이 인간의 개입과 기술로 인해 분리 사육되어 나온 결과라는 것이라고 했으며 이것이 당대의 주류였다.


 허나 다윈은 당대에 다양한 종이 있다고 해서 그들의 조상종이 엄청나게 다양할 것 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있는 혹은 죽은 비둘기까지 전 세게의 비둘기를 모두 수집했고, 외형적 부분뿐만이 아니라 내부적 구조를 관찰하기 위해 뼈를 삶아 분리해 관찰하기 시작했다. 당시 다윈은 딱히 자연선택에 대한 연구를 준비한다는 것을 같이 연구를 하는 지인들 외에는 외부에 알리지 않았었는데, 이때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라는 박물학자가 오랜 기간 열대지방을 탐험하면서 진화론에 관한 아주 짧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다윈은 이 사실을 안 지인들의 논문 발표 성화에도 월리스가 단순하게 수집가라고만 생각했는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월리스와 다양한 생물들의 샘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교류했다. 허나 다윈의 생각과는 다르게 다양한 세상에서 많은 경험을 한 월리스는 1858년, 자연선택에 관한 논문의 원고를 완성해 다윈에게 보냈고 그는 충격을 받아『6월 14일, 비둘기:(중단)』이라는 짧은 기록만을 남겼다. 당시 귀여워하던 막내아들이 사경을 잃다 세상을 떠나 그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 타 기록을 보면 다윈은 월리스가 자신의 논문을 표절했다고 믿어 충격을 받았으나, 월리스의 연구에서 그가 동남아시아 탐험 등을 비롯해 그만의 독자적인 루트로 이러한 연구와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윈의 동료인 라이엘과 후커 등은 출간되지 않은 다윈의 책 중 주요 부분만을 급히 발췌하여 월리스가 쓴 원고와 함께 린네협회에서 발표했고, 몇 주 후 다윈은 마음의 안정을 찾은 후 월리스에게 그간 벌어진 일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우선권을 확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매달렸고, 월리스는 다윈에게 학자로서 그가 그동안 한 일들이 기쁘다고 말해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이후에 죽을 때까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동료 학자로서 학술 교류를 하게 된다. 그렇게 진화생물학에 있어 가장 유명하고도 위대한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대에는 다윈 이외에도 이러한 가설을 세우고, 연구하고 있던 학자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는 월리스가 그랬고 그의 조부인 이래즈머스(Erasmus Darwin, 1731–1802)도 그랬다. 특히 그는 자신의 저서인 『동물학(Zoonomia)』에서 '모든 온혈동물은 자신의 일부를 변형하는 힘을 가지고 있고, 개량된 형질은 자손에게 영향을 미친다.'라고 했는데 정작 그가 손자인 다윈만큼 깊이 파고들지 않았을 뿐이지, 당대의 뛰어난 의사이자 동물학자였던 그는 장기간의 관찰 속에서 어느 정도 진리에 접근하는 성과를 이루었고, 그러한 과학적 법칙의 이유까지 파고들지는 못했지만 관찰의 통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래즈머스가 오랜 세월 중세 유럽을 관통한 종교적 신분제에 대한 반감(신이 정한 노예제는 존재하지 않는다)으로 성공회의 교리에 반해 파문까지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이래즈머스는 이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했고 워낙에 저명한 의사이자 학자였기에 정작 사회생활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고 한다.


 다윈의 연구는 따개비와 비둘기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의 연구는 이후 동식물과 곤충을 넘나들었고 모든 자연에게서 살아감의 이치를 찾으려고 애썼다. 의외로 그 모든 연구의 바탕이 된 학문은 의외로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멜서스의 『인구론』이었다. 이 이론에서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에 자원의 한정과 배분에 대해 인구수의 효율적인 제한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놀랍게도 멜서스의 이러한 인구론은 후대에 이르러 멜서스 트랩(Malthusian Trap)이라고 불리며 인류학적으로도 각 국가의 근대적 정책(예를 들자면 중국의 국가생육정책)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데, 전쟁과 기근이 끊이지 않았고, 식민지를 이용해 자원 불균형을 이용한 풍요를 누리던 근대의 인류에게 있어 이러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앞으로의 미래에도 큰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했다.     


 다윈이 이 인구론에서 주목한 부분은 '한정된 자원'이었다. 멜서스의 개체군 압력, 즉 한정된 지구 자원을 다투며 경쟁해야 하는 '생존경쟁'은 죽음과 파멸이라는 결말을 암시했다. 그러나 자연을 계속 관찰하던 다윈은 이러한 자연 그 자체는 어쩌면 일종의 균형상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생명의 탄생 이래로 자연은 언제나 생명들에게 자애롭지는 않았다. 자연은 언제나 가혹하고 또한 비정했고, 생물들은 기력이 다할 때까지 수많은 자손을 남겨야만 그중 일부가 자연이 만든 어느 틈 아래에 안주할 수 있었다.


 다윈 자신도 연구 중에 어린 나이의 자녀들을 셋이나 잃는 슬픔을 겪었으며 이는 마치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인 듯했다. 살아있는 것들은 힘을 다하며 살아가고,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다윈은 이렇게도 생각했다. 아무리 느리게 번식을 하는 생물이 있다 해도, 언젠가 이 지구는 생물의 포용한계를 넘어설 것이다. 생존을 한다는 것은 유한한 자원을 경쟁하며 소모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마지막이 보였다.


 그는 관찰을 멈출 수 없었다. 넓은 정원의 식물, 벌, 노예잡이개미, 뻐꾸기…. 수많은 다른 형태의 삶과 생존을 이루는 생물들에게서 다양한 삶의 형태와 습성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에서 공통된 형태를 발견했다. 자연선택이란 주어진 환경에서 번식할 수 있어야 한다. 번식하기 위해 생존할 수 있어야 한다. 논리적인 추론은 아닐지 모르지만, 다양한 형태의 생물의 삶에서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잣대로 할 때 이해할 수 없는 어떠한 형태의 삶이라 할지라도 이 생물들이 살아가는 과정은 모두 특별히 부여받거나 창조된 본능이 아니라, 모든 생물의 발전을 이끄는 일반 법칙 즉 그 생물을 증식시키고 변화시키며, 강자는 살리고 약자는 제거하는 법칙의 작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당시 제일 어린 막내를 병으로 잃은 다감한 아버지인 그는 참담한 심정에서 이 모든 것을 신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세상의 현상을 간단하게 수용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말은 그의 조부인 이래즈머스의 생각과도 어느 정도 일치했다. 자연에 '노예제'가 있다는 이유로 노예제를 찬성하는 이들에게 반기를 든다는 의미도 있었다. 신의 계획에 따른 부당함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그는 끊임없는 실험 속에서 발전해 나갔다. 실험의 범위도, 실험 방법과 개체군에 대한 변수의 통제도 그러했다. 우리가 현대에서 통제군과 처치군을 나누어 실험하듯 그의 실험도 점진적으로 현대화되어 갔다. 현대적 생물진화학의 기초적인 추론이나 일부 현상들은 다윈만이 최초로 주장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당대만 해도 아가시, 허셜, 윌킨슨, 라마르크, 월리스 등의 뛰어난 학자들이 많았다. 다윈은 다양한 동료학자들과 그가 참고한 논문을 쓴 이들의 연구기록 및 그 자신이 수십 년간 다양한 생물들의 원리와 생태를 관찰해 밝히며 모은 방대한 자료와 체계적인 논리로 그의 가설을 ‹자연선택›이론으로 끌어올려 현대적 진화생물학 연구의 필요성을 개진한 가장 큰 공로를 세운 것이다.     


 자신의 이론과 그에 따른 세상의 이치에 확신은 있었으나, 그의 진화생물학적 이론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야훼의 창조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존재였다. 그는 일생동안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이유로 심적 갈등을 해야 했다. 창조론은 또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할 수 있는 가장 큰 논리였다. 이에 전면적으로 맞서는 이 이론은 야훼의 위엄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으니 더욱더 그랬을 것이다. 유럽 전체 사회의 법이자 철학 및 사회 그 자체의 근간이 되는 종교를 등진다는 것은 세속주의적 경향이 강해진 근대사회라도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게다가 다윈의 아내는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 다복하게 태어난 많은 아이들을 키우는, 가정을 지켜야 하는 가장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결국「종의 기원」은 2판부터 '창조주에 의해'라는 문구가 들어가야 했다. 그는 종교의 비위를 맞춘 것을 일생 후회했으며 후에 1860년 5월, 그의 지인인 Asa Gray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But I own that I cannot see, as plainly as others do, & as I should wish to do, evidence of design and beneficence on all sides of us. There seems to me too much misery in the world.

 허나 나는 다른 이들처럼 그저 '있는 그대로'라고 믿을 수 없기도 하거니와 우리 모두가 은총을 입어 설계 된 존재라는 증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싶어. 내 시야 너머의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고통이 존재하거든.


 누군가로부터 만들어진 삶을 부정하는 것. 어쩌면 그의 진화생물학은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이가 가져야 할 정신을 확고하게 일러주는 것이 아닐까, 하며 독서를 마친다.



       



하나, 혹은 적은 수의 생명체들에게 첫 숨결이 깃들어

살아온 삶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장엄한 힘이 깃들어있다.


이 행성이 불변하는 중력의 법칙에 의해 회전해온 기나긴 시간에

너무나도 간단한 기원으로부터 출발한 끝없고도 수많은 생명들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경이롭도록 삶을 전개해 왔으며 지금도 전개하고 있다.


                                                  찰스 다윈, 「종의 기원」 1859년 1판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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