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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테크리스토르 Jan 20. 2023

살아남고 싶거든 거짓을 연마하라

-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과 <올빼미>로 본 정직의 무용함.

'정직의 덧없음'
우리가 오랜 세월, 학교와 사회를 거치는 동안 배우는 현실 교훈 중 하나.

박제된 교과서와 필독서라 들이밀어진 고전들이 우리의 양심에 '정직' 을 쑤셔 넣을 때마다, 우리는 왠지 모를 거부감에 마음 한 구석이 매번 꺼름직해진다.

정직해야 한다. 정직하면 복을 받는다.  정직한 사람이 위대한 인물이 된다.

이 설득력 없는 명제들을 주입 받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현실 속 손해와 마주했으며, 수많은 기회들에게 배신을 당하며 살아왔는가.

거짓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여기 그것을 증명하는 영화 두 편을 소개한다.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과 <올빼미> 다.


살아남기 위해 거짓으로 페르시아어를 아는 척 하는 남자(페르시아어 수업)와 살아남기 위해 본 것을 못 본 척 하는 남자(올빼미) 의 이야기.


페르시아어를 배우기 원하는 독일군 장교 ‘코흐’ 살기 위해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을 한 유대인 ‘질’ ‘질’은 살아남기 위해 '코흐'에게 가짜 페르시아어를 가르치고 매일 밤 거짓으로 단어를 만드는데··· 깊어져가는 의심 속 페르시아어 수업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  


- <페르시아어 수업 - 네이버 영화정보>



맹인이지만 뛰어난 침술 실력을 지닌 ‘경수’는 어의 ‘이형익’에게 그 재주를 인정받아 궁으로 들어간다. 그 무렵, 청에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8년 만에 귀국하고, ‘인조’는 아들을 향한 반가움도 잠시 정체 모를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러던 어느 밤, 어둠 속에서는 희미하게 볼 수 있는 ‘경수’가 ‘소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고 진실을 알리려는 찰나 더 큰 비밀과 음모가 드러나며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빠진다. 아들의 죽음 후 ‘인조’의 불안감은 광기로 변하여 폭주하기 시작하고 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경수’로 인해 관련된 인물들의 민낯이 서서히 드러나게 되는데...


- <올빼미 - 네이버 영화정보>




죽음의 수용소에서 유태인 주인공 '질'을 살린 건 자신이 페르시아인이라는 거짓말이었다.

거짓은 힘이 세다.


지옥 같은 나치의 수용소에서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고, 권력을 둘러싼 궁중의 암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동료들이 채석장에서 쓰러지고 맞아가며 일할 때,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며 따뜻한 식당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거짓말을 치밀하게 하는 이에게 주어진다.

거짓말은 구애를 거절 당한 여인이 복수에 사용하기에 적합한 무기이고, 연적(戀敵)을 전투가 한창인 최전선으로 쫓아보낼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물론, 이런 거짓말이 그만한 댓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 치밀하고 전략적이어야 한다.

한 번 뱉은 거짓도 꼼꼼히 기억하고 있어야 하고, 본 것도 못 본 척 하는 연기력까지 갖춰야 한다.

생전 모르는 페르시아어로 단어도 만들어 내야 하고, 이미 써먹은 말, 안 쓴 말, 겹치는 말도 다 외워야 하며, 물어보는 단어도 바로바로 만들어내야 하고, 나중엔 단어 모아서 문장으로도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페르시아어를 전혀 모르던 사람이, 가상의 페르시아어를 만들어내서 자신의 생사를 쥐고 있는 독일군 장교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아인슈타인도 100%를 다 사용하지 못했던 인간의 뇌기능이 죽음의 수용소 한 켠에서 발휘되는 과정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있는 그대로를 고백하는 정직에 동원되는 것보다, 복잡하고 앞 뒤 말이 한 치 오차 없이 들어 맞아야 의심받지 않는 거짓을 말할 때 활성화되는 뇌의 운동량이 훨씬 큰 것은 두 번 말할 필요 없는 사족이다.

결국 인간 문명을 발전시키고 두뇌의 향상을 가져 온 것은 거짓말 덕분이라 주장하려는 나에게 이 영화는 역사의 증거, 그 자체다.



맹인 침술사, 그러나 사실은 어두운 곳에선 사물이 보이는 주맹증을 가진 천경수. 그 설정부터가 이미 거짓과 함께이다.


거짓은 사람을 높은 자리로 이끈다.

앞이 보이지 않으나, 천재적인 침술 솜씨로 어의를 보좌하는 침술사의 자리까지 가게 되는 주인공(천경수)의 성공은 이미 거짓(맹인이라 더 높은 평가를 얻는)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고 조선의 앞날을 걱정해 이를 왕에게 진언한 소현세자의 정직함은 그를 왕위를 이을 세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죽음을 맞게 한다.

청의 비호를 받는 세자의 죽음이 보다 안정적으로 자신의 보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여긴 왕(인조)이 주검이 된 아들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거짓으로 점철된 악어의 눈물이다.

짐짓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듯 명분을 앞세우던 영의정 최대감은 결국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되는 후계를 약속받는 자리에서 그간의 우국충정이 거짓이었음을 드러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봤다고 말해야지 또는 못 봤다고 말해야지 라는 마음의 외침 사이에서 혼돈하고, 세자를 죽인 뒤에 정말 아버지인 왕이 있는 건지 아닌지를 헷갈려 하며, 왕을 끌어내리려는 신하들이 과연 정의의 편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노력을 관객들이 줄기차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미덕과 호감이 발생한다.

이 모두가 거짓과 참을 모호하게 오가며 밝히지 않는 이 영화의 탁월한 줄타기 덕분이다.



거짓은 끝까지 지켜져야 한다.

보통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거짓으로 위기를 모면한 후 결정적 사건을 겪은 후에야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다하는 것으로 가책을 면하곤 하지만, 이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끝까지 자신을 위장해 스스로의 목숨을 구한다.

세상은 거짓의 결국을 밝혀진 진실 때문에 맞게 되는 파국이 있기 때문에 멀리 해야 하는 것으로 교훈하지만,

끝까지 침묵시키는데 성공한 거짓의 보상만큼 크고 달콤한 진실이란 없다.

그저 우리는 2시간 안에 마침내 이뤄내고 마는 수많은 영화들의 권선징악 스토리에 학습당해 온 것일 뿐.

정직에는 어떤 보상이 따르는가 말이다. 대체...


살아남고 싶으면,

거짓을 연마해야 한다.

이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정직과 함께 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들과 함께 한 치밀하고도 정교한 거짓의 삶만이 그들을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 끔찍한 궁궐 안의 암투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했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야 그들처럼 복수도 할 수 있고, 덧없이 죽어간 이들의 이름을 세상에 알릴 수 있다.


거짓은 힘이 세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아프고 가슴이 무거웠다.

오늘 마주할 수많은 거짓들 속에서 나는 또 하루를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거짓과 거짓으로 촘촘하고 치밀하게 살아낸 오늘 하루는
그야말로 진실된 삶으로 기억 될 것이다.



 - @몬테크리스토르  


#끄적이는하루

#몬테크리스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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