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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독다독 Dec 22. 2020

부글거림이라는 반응

영화 <미성년>

주리와 윤아가 딸기 우유, 초코 우유에 뼛가루를 타서 나눠 먹는다. 주리의 배에서 부글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 하나의 장면이 영화를 이질적이고 특별하게 만든다.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 장면이지만, 이 장면을 기억하기 위해 영화의 초반을 다시 떠올린다. 주리가 딸기 우유, 초코 우유 중 친구에게 하나를 고르게 해서 나눠 마신 뒤 배가 부글거리는 장면은 앞에도 있다. 아침을 안 먹어서 그런 거라고 주리는 말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나온 두 번째 부글거림을 본 이상 의심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주리는 그저 우유를 잘 소화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인물들의 서사가 다 그런 식이다. 잘 소화하지 못하는 음식을 굳이 먹고, 그러기를 반복하며, 자신이 기억해야 하는 일도, 감당해야 하는 일도 그 반복 안에서 체화한다. 영주는 미희나 대원에게 폭력적인 복수를 감행하지도, 기존에 형성되어 있던 관계를 부수지도 않고 일어나버린 일들에 대처한다. 미희는 신뢰할 수 없는 남편을 경험하고도 대원과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믿어보려 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났을 때, 결국 아무도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완전히 이탈하지 않았다. 새롭지 않은 이 귀결을 곱씹는다. 일상이 흔들리고 삶의 무언가가 바뀌어 버렸음에도 이들은 살아온 삶을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부글거림은 견딘다는 표시다. 먹는다는, 먹은 것이 어떤 식으로든 내 안에서 처리될 것이라는. 어떤 일들은 적당히 안고 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인구의 과반이 유당불내증이 있는 한국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일상에 스며든 우유를, 많은 사람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먹듯이. 약간의 고통, 약간의 번거로움. 때로는 나와 주변이 발 디딘 삶에서 들뜨지 않도록 잡아주는 것들. 누구나 저마다의 불편을 안고 살아간다. 관계 속에서 그 부담은 시시각각 타협―주로 암묵적인―을 통해 조정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조금 더 불편한 순간이 연속된다. 부담을 더 짊어진 사람을 바꿀 뿐 우린 공평하게 불편을 나눠가질 수 없다. 저마다의 불편에는 저만이 감당할 수 있는 모양이 있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불가능하다. 우리가 모두 다른 모양의 존재라는 사실에는 우리의 인내의 모양 역시 그렇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미희와 윤아가 서로의 고통을 공유할 수 없는 것처럼. 알아주는 게 최선인 것처럼.


산 사람은 살아야지. 어쩌면 <미성년>의 인물들이 모두 자기 자리를 이탈하지 않는 것은 저 구태한 말이 지니는 힘 때문이다. 미희가 화장을 하고, 영주가 죽을 싸 오는 것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일종의) 정언명령을 실천하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주리와 윤아가 동생의 뼛가루를 타 먹는 것도 그래서일까. 아무도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지만, 아무도 삶을 멈추거나 훼손할 마음이 없다. 동생이, 혹은 자식이 생긴 삶이 있다가, 있었던 삶이 되었을 뿐이다. 현재와 미래의 일이 과거의 일이 되어버리는 고통은 작지 않겠지. 그런 일은 부글거림 없이 소화할 수 없겠지. 그런데 주리는 두 번째 부글거림을 두고, 이유를 추측하는 영화의 초반과 달리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한다. 주리와 윤아가 함께 웃어넘기기 때문에 누구의 속이 부글거린 것인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 주리의 변명이라고 추측할 뿐. 어쩌면 윤아의 속이 부글거렸을지 모르는 일이다. 동생은 윤아에게도 동생이라서. 죽은 동생을 먼저 자신의 동생이라 천명한 이는 윤아라서.


산 사람은 어떻게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걸까. 견디기 어려운 일들은 특정한 몸의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종기나 종양, 염증이 생기고 뼈나 근육이 손상된다. 가역적으로, 비가역적으로 몸은 변화한다. 기억하는 몸이기 때문이다. 떠안아야 하는 불편과 고통의 흔적을 남기면서, 몸은 산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결코 순결하고 명쾌하지 않음을 알려준다. <미성년>이라는 제목은 이에, 삶에 대해 각자가 가진 상을 환상 속에 묻어두지 말라는 의미에서, 성년이라는 말이 유발하는 착란은 여기에 없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미성년’이라는 보편의 해석으로 이어져야 할 듯하다.


부글거림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다만 삶을 도모하는 방식으로써 부글거림을 받아들일 뿐이다. 뼛가루를 타 먹는 애도의 방식을 주리와 윤아의 동생은, 할 수 있었다면, 원하거나 찬성했을까? 현실에서 죽음을 대하는 일은 철저히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주리와 윤아는 계속 자신들의 삶을 살아낼 것이다. 부글거림이라는 반응은 그렇게 현재와 미래의 일을 위한 불가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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