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의 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독다독 Dec 29. 2020

'정상적인 남자'라는 그림자

영화 <순응자>

라울에게 총을 건네받은 마르첼로는 신속하게 총구를 겨누는 시늉을 한 뒤 마지막에는 자신의 머리를 겨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살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 그것은 ‘동지’적 관계로 묶인 조직원들이 한 번쯤은 거치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 머리에 총구를 겨누자 모자가 없음을 알게 된다. “모자가 어디 갔지?” 그는 총구를 겨눌 때보다 신속하게 방을 나간다. 영화 내내 벗고 있을 때가 더 많은 모자를 갑자기 찾는 이 행동에서, 마르첼로가 어떤 사람인지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는 결국 누구도 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살하지도 못할 것이다.


전후를 미루어, 라울이 자신을 불렀을 때 마르첼로는 충동적으로 안았던 매춘부 앞에 모자를 두고 라울을 따라 들어갔다. 남성 조직의 전형적인 상징이자 남성 복식의 완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절모를. 그렇다면 모자를 매춘부 앞에, 혹은 매춘부에게 두었다는 사실은 마르첼로가 바라는 남성성의 완성이 매춘부를 욕망하는 데 있다는 의미를 지닐까? 그보다는 라울의 방에 들어갈 때 모자가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는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마르첼로라는 인물의 정향은 남성 조직이 아님을, 오히려 매춘부에 가까움을 영화는 지시하는 것이다. 이 매춘부는 미친 사람이다. 그리고 미쳤음은 이 영화에서 중요하다. 마르첼로가 원하는 것은 정상적인 남자의 삶이다. 반면 미친 매춘부는 비정상의 지표 두 개가 겹쳐진, 시민의 삶이 아닌 정체성이다. 마르첼로는 이념적인 적이 아니라 자신의 비정상성과 싸운다. 그러나 그러한 비정상성이 사회에 의해 규정―고해성사를 하며 그는 신의 용서가 아니라 ‘사회의 용서’를 바란다―되는 한 마르첼로는 이길 수 없다.


이탈로 : 그 사람을 위해 일하고 얻는 게 뭐지?

마르첼로 : 마침내 정상적인 남자가 됐다는 느낌이지, 전에 말한 대로. 정상적인 남자를 어떻게 생각…

이탈로 : 정상적인 남자! 내게, 정상적인 남자란 예쁜 여자의 엉덩이를 보려고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야. 중요한 것은 그저 고개를 돌리는 것만이 아니고 대여섯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는 남들과 동질감을 느끼며 기뻐하는 거지. 그래서 사람들이 붐비는 해변, 축구장, 시내의 바를 좋아하는 거야.

마르첼로 : 베네치아 광장 같은 곳.

이탈로 :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좋아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은 믿지 않지. 그래서 정상적인 남자는 진정한 형제, 진정한 시민이야. 진정한 애국자이고,

마르첼로 : 진정한 파시스트지.

이탈로 : 자넨 왜 우리가 친구가 됐는지 궁금하지 않았어? 우린 다른 사람과 다르기 때문이야. 우리 둘은 똑같아. (마르첼로를 만지려 손을 뻗지만 마르첼로는 피한다.) 거기 있어? (마르첼로가 마지못해 이탈로의 손을 맞잡는다.) 왜 그래, 자네는 동의 안 해?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알아. 난 절대 틀리지 않아.

마르첼로 : (이탈로가 검정색, 갈색 짝짝이로 신고 온 구두를 내려다본다.)


이탈로는 알려준다. 마르첼로가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남들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마르첼로는 파시스트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을 커버링한다. 자발적인 파시스트이자 확신을 가진 파시스트. 콰드리 교수에게 수학한 적 있는, 동굴 우화를 소재로 논문을 쓰려던 그로서는 파시스트가 되는 일은 일종의 전향이다. 또한 마르첼로는 이성애자 기혼 남성이라는 정체성으로도 자신을 커버링한다. 그는 줄리아를 사랑하지 않으며 줄리아에게 성애를 품지도 않는다. 그의 결혼은 어디까지나 적당한 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편입하기를 원하는 사회가 인정하는 남자로 보이기 위해. 줄리아가 자신의 치부를 고백했을 때 그는 지극히 건조하게 받아들인다. 상대방의 과거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줄리아에게 질투심이나 애욕을 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마르첼로가 안나에게 매료되는 지점이다. 그동안 만나지 못한 운명의 상대를 만났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마르첼로는 안나에게 자신이 라울에게 갔을 때 만난, 얼굴에 흉터가 난 매춘부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마르첼로는 장관실에서 안나와 닮은(혹은 같은) 여성을 보았다(줌아웃되는 거리를 감안하면, 그와 눈을 마주친 것이나 그가 안나와 닮은 얼굴이라는 것은 소급적 착각일 수도 있다). 마르첼로가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 이 장면은 마르첼로가 바라보는 조직의 최종심급에 가깝다. 안나는 적어도 세 가지 이미지가 중첩된 인물이다. 장관과 입을 맞추는 여성, 미친 매춘부, 여성인 줄리아를 탐하는 여성(호모). 다시 말해 정상적인 남자의 삶과 덮어버리고 싶은 비정상적 삶이 모두 존재하는 대상이다. 이런 중첩 작용이 안나에 대한 마르첼로의 복합적인 욕망을 설명한다. 그리고 마르첼로는 그런 안나를 죽이지도, 죽이지 않도록 나서지도 못한다. 어느 쪽으로도 나아가지 않고 상황에 순응한다.


망가니엘로는 말한다. 겁쟁이, 호모, 유대인은 다 똑같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면 다 총살했을 것이라고. 아니면 태어날 때 미리 없애버리는 게 낫다고.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남성의 시선으로 만든 남성성에 대한 영화이나) 망가니엘로가 혐오하는 겁쟁이, 호모, 유대인, 그러니까 비정상 남성을 위한 영화다. 마르첼로는 무언가를 할 수도 있었을까. 망가니엘로의 차에 다시 탈 때, 그에게는 리노의 차를 멈춰 세운 오래전 기억이 오버랩된다. 외부의 힘, 나를 끌고 가는 힘에 자신을 의탁한 경험, 어쩔 수 없다고 믿기로 한 믿음은 그의 나약한 부분을 드러내지만, 그의 나약함은 동시에 벗어나고 싶은 소수자로서의 취약함이기도 하다. “Animula vagula blandula, hospes comesque corporis.” 비겁하지만 가련한 자여. 자신의 비정상성과 연결된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목표로서의 정상성과 일치시켰던 체제가 무너지고 나서야 그는 동굴 안을, 희미한 빛을 통해 바라본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매거진의 이전글 부글거림이라는 반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