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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독다독 Dec 14. 2021

무엇을 신이라고 말할 것인가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그 생명체'가 정말로 신이었다고 스트릭랜드가 말하는 순간, 그리고 엘라이자의 목에 있던 흉터가 정말로 수중호흡기관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말하고자 했든, 그러지 않았든 말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신앙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은 물에, 아마존에, 그러니까 지구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엘라이자는 그에게 완전히 외부나 다름없는 물속 세계로 진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온 곳으로 돌아간 것이나 다름없다(엘라이자의 집이 물 속에 잠겨 있던 인트로를 떠올리자).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신이 있는 천국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가상의) 전제 하에, 엘라이자는 신이 있는 세계에서 인간의 본령을 철저하게 수행한다. 적어도 이 영화─무신론적인─에서 엘라이자는 그 누구보다 독실하며 다소 광신적이다.


신이 어떤 얼굴로 이 땅에 오는지, 언제 오는지 우리는 모른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신의 형상과 신의 재림은 비어 있는 영역이다. 마침 영화를 본 날, 기업인에서 정치인, 나아가 교주가 된 사람에 관한 TV 프로그램을 보았다. 사이비 종교라면 익숙하기 때문에 새로울 내용도 없었으나, 문제의 교주가 지지자 내지는 신도들을 꼬드기는 방법과 형식이 너무나 진부하다는 점이 오히려 흥미로웠다. 언제나 신을 참칭하는 자는 자신의 형상과 자신의 현재가 신의 형상이며 신의 현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에 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밝히 보고 알게 될 그 때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볼 수 없고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비슷한 듯하지만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어, 우리에게 비어 있는 영역을 무엇으로 굳이 채우지 않는 것이 신앙의 일임을 알게 한다.


신을 백인 남성에 가까운 존재라고 이해하는 스트릭랜드의 전형적인 오만함을 뒤로하고, 결국 스트릭랜드가 내뱉어야만 했던 마지막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너는 정말로 신이구나." 이 인식은 '그 생명체'가 죽어야 하는 상황에 죽지 않았기 때문인가,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는 등 인간의 이해를 벗어나는 초현실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말로 '그 생명체'가 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가?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보기를 제외해야 하겠지만, 신의 형상을 규정하고, 기독교의 교리를 정연하게 해석하는 스트릭랜드에게 그 말은 마지막 보기 외에 다른 이유를 가질 수가 없다. 그가 믿은 신은 신이 아니기에 그에게 마지막 은총을 내리지 않았다. 신은 아가미와 등뼈를 지니고 눈 앞에 서 있었다.


영화가 시도하는 백인 남성-제국주의-기독교관의 해체 방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스트릭랜드가 젤다의 미들네임 딜라일라(데릴라)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언급한 성경 속 이야기다. 스트릭랜드는 젤다를 데릴라, 자신을 삼손에 간단히 대응시켜 자신의 고투를 영웅서사화하지만, 비밀을 누설하는 것은 젤다가 아니라 젤다의 남편이다. 자신의 손가락을 블레셋 신전의 기둥에 비유할 때, 그리고 젤다의 남편으로부터 흘러나온 비밀을 공유할 때, 스트릭랜드는 시시각각 자신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블레셋에 위치한 인물임을 노출한다(그는 연구소에서 이미 이스라엘제 폭탄에 당하지 않았던가).


신은 우주로 쏘아 올려지는 로켓에 있지 않다. 신은 캐딜락에 있지 않다. 신은 다른 이를 짓밟고 나아가는 미래에 있지 않다. 신은 진압봉에도, 괴사하는 손가락에도 있지 않다. 신은 그런 남근의 형상들에 있지 않다. 오히려 신은 장애인의 삶에, 흑인 여성의 우정에, 게이 남성의 그림에, 러시아 과학자의 학문적 열정에 있다.
그리고 신은 불법 행위에, 친구의 근태 불량을 눈감아주는 행동들에, 아름다운 생명체를 구출하기 위해 서슴없이 사람을 죽이는 대담함에 있다. 신은 다른 생명체를 먹어치우는 무지함에 있다. 자연산 단백질을 먹어야 하는 신도 신이라는 말인가? 불신은 자신의 관점을 영화가 비판하는 기독교관에 일치시킬 때, 혹은 유사한 높이와 각도에 둘 때 발생한다. 아닐 이유가 없다.


이 영화의 납작함 속에서, 그럼에도 신은 대상화된다. 끝끝내 무소부재하지 못하고 형상으로 존재하고야 만다. 스트릭랜드의 신이 신이 아니라 '그 생명체'가 신인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진다. 영화의 제목은 무슨 형상이든 될 수 있는 물의 유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서마저 형상을 찾는 인간의 뻣뻣함을 말한다. 형상이 없이는 생태도 소수자도 신도 이야기할 수 없다. 지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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