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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혜 Oct 22. 2019

재테크 책은 왜 '해피'를 '엔딩'에 배치할까?

절약, 그 낭만적 철학 - 절약은 '지금, 여기'의 행복을 만끽하는 일

'돈이면 다 된다'는 말이 대수롭지 않게 두루 쓰이는 세계에 산다.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단다! 다 된다니까 분명 긍정형 문장이다. 하지만 이토록 희망적인 말에서 나는 불행했고, 불안했다. 돈이 부족한 현재에 불행했고, 돈이 부족할 미래에 불안했다.


미래에 대한 으름장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소수 지적 엘리트에 의해 산업이 주도되는 4차 산업 혁명에 따른 일자리 감소, 100세 시대에 따른 수명 연장, 지방 소멸 등 어두운 미래에 대한 예언이 나돌았다. 작고 약한 개인인 나는 겁이 났다. 


미래 시나리오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미래에 나는 돈이 없을 것이다.'였다. 아, 하나 더 있다. '내 자식들도 미래에 돈이 없을 확률이 크다.'


굶어 죽을 까봐 걱정됐다. 서둘러 재테크 책을 폈다. 부자가 되는 길이 쓰여있었다. 이대로만 한다면 나는 미래에 잘 먹고 잘 살 예정이었다. 책에서 시키는 대로 종잣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재테크의 시작은 늘 절약과 종잣돈 모으기였기 때문이다.


종잣돈이 될 월급만을 사랑하느라,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두고 일터로 가버렸다. 나의 첫 아이, 연우. 나는 아이를 지키지 못 했다. 


먼 훗날의 재난을 막기 위해 나갔던 직장은, 매일이 재난 상황이었다. 아이는 종일반에서 자주 아팠다. 아파도 내가 돌볼 수 없었다. 아이는 열이 나서 울었고, 때로는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었다. 아이가 잘 달래지지 않는다는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 전화를 받고도 발만 동동 굴렀다.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갈 수는 없었다.


뱃 속 둘째도 지키지 못 했다. 무거운 장구를 들고 나르며, 자진모리 장단에 '모심는 소리'를 4시간 동안 불러댔던 탓일까. 아이는 37주 3일만에 태어났다. 다행히 3.54kg. 40주 채워 태어났으면 어쩔 뻔 했나 싶긴 하지만, 뱃속에서 3주 성장할 기회를 놓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종잣돈이 될 월급만을 좇느라, 더 소중한 두 아이와의 시간을 놓쳤다.


종잣돈을 모으던 중에 벌어졌던 험난했던 나날은 내 사정만은 아니었다. 그간 절약 서적이나 재테크 서적의 숱한 사례로 많이 나왔다. 지루하고 힘겹기만 한 오늘과 오늘을 버티고 버틴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투자에 성공하면 드디어 많이 벌어 많이 쓰는 부자 궤도로 입성! 이들의 해피엔딩은 언제나 미래였다. 


재테크 서적은 '10억 부자'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게 목적이다. 때문에 절약의 즐거움에 대해 잘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당연하다. 절약하는 과정에서 행복하다면, 책이 끝나버린다. 언제나 '해피'를 '엔딩'으로 배치한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많이 벌어 많이 쓰는 얘기말고, 버는 돈 보다 적게 쓰는 삶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한다. 알고보면 절약이 더 재밌다.


40대에 10억 부자가 되고 싶어 시작한 재테크였지만, 절약하면서 너무 즐거웠다. 봉투에 만 원 한 장 씩 뽑아 쓰는 것도 성취감 있었고, 불필요한 물건을 비워내면서 작은 집을 넓게 쓰니 쾌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내 행복이 큰 돈에 좌우되지 않고, 소박한 일상에서도 채워짐을 깨달았다. 돈만 있으면 다 된다던 세상에서, 적은 돈으로도 다 됨을 깨달았다.


집밥을 했고, 물건을 비웠다. 최신 가전 제품 대신 옛 것을 구했고, 고장난 물건을 고쳤다. 헬스장 대신 걷고 채소를 먹었고, 영아 사교육 대신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아이 책을 짊어지고 다녔다. 책 읽고 글 쓰는 즐거움에 집중할 수 있게 됐고, 이웃과 나누면서 곳간을 채워갔다. 독서모임에서 쉬다 왔고, 절약 모임과 글쓰기 모임을 구성했다.

재테크 책은 언제나 해피 '엔딩'만을 그린다. 절약은 참고 견디는 일로 묘사되기 일쑤다. 하지만 절약은 행복 현재 진행형인 일이다.

재테크는 언제나 '해피 엔딩'을 외친다. 돈 덜 쓰는 일은 그 동안 재테크를 성공하기 위해 종잣돈을 만드는 과정으로서 존재했다. 참고 견뎌야 할 힘들기만 한 일. '10억' 앞에 소박한 씀씀이는 존재감이 몹시 미약했다. 늘 수단일 뿐,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 없었다. 


그 동안 왜 간소하고 소박한 삶은 촌스럽고 낡은 생활 양식으로만 치부되었던 걸까. 부자되는 온갖 방법이 나열되어 있는 시끌벅적한 재테크 세계의 옆에서 돈 안 쓰는 이야기는 고요할 뿐이었다. 


하지만 절약은 '해피ing', 즉 적은 돈으로도 오늘 행복할 수 있다. 우리 집 4인 가족은 생활비 한 달 90만원. 딱 이 정도면 충분했다. 10억 부자가 되어 통 크게 지갑을 열어 얻는 쾌감보다, 오늘 하루 세 끼 따뜻한 밥 먹고, 가족들과 산책 하고, 책 읽을 시간 있는 삶이 더 만족스럽다. 버는 돈 보다 적게 소비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절약 훈련을 한 덕분이다.


40대 10억 부자가 되기 위한 꿈을 꾸던 나는 무급 육아 휴직을 시작했다. 맞벌이에서 외벌이 살림이 되었다. 한 쪽 소득은 숭덩 짤려버렸다. 그렇지만 아이가 아프면 방바닥을 잘 덥혀 집에서 함께 동화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걸로 충분하다. 더 이상 현재가 불행하지도, 미래가 불안하지도 않았다. 큰 돈 없이도 오늘을 즐겁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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