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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l 19. 2021

휴양지 옷이 가진 의외의 효과

누구나 휴양지의 옷은 있다

휴양지에 갈 때 꼭 챙겨가는 옷들이 있다. 휴양지의 무더움을 잘 걸러주는 얇은 소재지만 돌아와서 입고 다니기엔 살짝 부담스러운 디자인의 옷들. 깊숙이 있던 휴양지의 옷을 꺼내 입었다. 서울은 이틀째 열대야다. 작년보다 23일이나 이른 열대야라고 한다. 점점 더 모든 늦게 와야 할 것들이 빨리 오고 있는 것 같다. 해가 져도 뜨거운 밤은 러닝을 하기에도 너무 가혹했다. 그래서 휴양지 옷을 꺼내 입은 것이다.


뛰고 돌아와서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습식 사우나에서 아버지가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기 전까지 안 내보내 줄 때의 모습과 같았다. 사우나에 가지 않아도 이렇게 땀이 날 수 있구나. 땀구멍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닿을 때 즈음 내가 누른 층에 도착했다.


땀에 전 옷을 벗고 샤워를 하러 들어가기 직전에 아내는 생일 선물로 받은 오일 바디 스크럽을 건넸다. 향기가 아주 향긋하다고 했다. 소금과 기름으로 만들어진 스크럽을 (생각해보니 소금과 기름이면 고기 찍어 먹는 기름장과 같은 구성이다) 설명서에 나온 대로 2스푼씩 상체, 하체에 발랐다. 설명서는 어떤 기준으로 정한 건지 내 몸은 구석구석 씻겨내도 너무 기름졌다. 덕분에 아내가 말한 향기가 내 몸에 가득했다. 휴양지가 떠오르는 향기였다. 정확히는 휴양지, 그러니까 어느 외국의 호텔 문을 처음 열었을 때 그 향기. 그래서 몸의 물기를 닦으며 휴양지의 옷을 꺼내 입었다.


코끼리와 꽃, 페이즐리 문양이 어지럽게 그려진 냉장고 바지 재질의 반바지와 물고기 한 마리가 떡하니 그려있는 민소매 티. 이 옷들이 나에게 휴양지의 옷인 이유는 소재와 디자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더 특히 휴양지의 옷인 이유는 휴양지에서 산 옷이기 때문이다. 아직 옷감이 많이 상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몇 년 전이다.


태국의 이름 모를 섬으로 휴양 가기로 결정하고 방콕으로 떠났을 때다. 방콕에서 그 섬까지 가기 위해선 몇 시간 동안 차를 타고 선착장으로 간 다음 배를 타고 또 얼마간 들어가야 했다. 배를 타기 직전 선착장이 있는 마을을 둘러볼 시간이 생겼고 나는 완벽한 휴양을 위해서는 태국스러운 (정확히는 이국의 편견이 형상화된) 옷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걷다 보니 질이 그다지 좋지 못한 옷을 조금 비싼 값에 파는 옷가게를 발견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커다란 옷걸이에는 이국적인 옷들이 즐비했고 나는 그곳에서 코끼리 문양 바지와 코끼리 한 마리 밑에 THAILAND라고 쓰여 어디서 샀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모시 소재 반팔티를 샀다. 이것이 나의 첫 휴양지 옷이었다. 인적이 드물었던 섬에선 줄기차게 입었던 그 옷을 교복과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방콕 시내에서 입었을 때는 조금 부끄러웠다. 그렇게 코끼리 바지는 옷장 맨 밑 칸에 묻혔다.




그로부터 1년 뒤 아버지 환갑 기념으로 가족과 함께 사이판에 휴양을 하러 갔다. 아버지는 수영을 위해 래시가드를 사셨지만 나는 입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튀어나온 뱃살은 감춰야 했다. 고민하며 첫날 저녁을 먹고 귀가하던 중 작은 쇼핑몰이 보였다. 바로 호텔로 돌아가 봤자 할 일도 없으니 구경이나 하러 들어갔다. 쇼핑몰엔 온갖 여름스러운 옷들을 팔고 있었다. 찬찬히 구경하다 내 손에 들려 나온 게 커다란 생선이 한 마리 그려진 민소매 티였다. 뒤이어 나오는 아버지의 손에도 또 다른 물고기가 그려진 민소매 티가 들려있었다. 물고기 부자는 며칠 동안 사이판의 바다를 헤엄쳤다. 휴양에 취해 사이판의 절경을 배경으로 멋진 물고기 민소매 티를 입은 사진을 SNS에 올렸더니 반응은 얇은 내 팔뚝에 대한 조롱뿐이었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물고기 민소매 티는 코끼리 바지 위에 묻혔다.


그렇게 휴양지의 옷은 맨 밑에 차곡차곡 내 옷들의 뿌리가 되어주었다. 떠나지 않으면 들춰보지도 않게 되었다. 오늘 밤엔 호텔의 향과 함께 휴양지의 옷을 입고 잠자리에 들려고 한다. 휴양지의 옷을 꺼내며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지금 바로 휴양지로 떠나지 못할 이유는 너무 많지만, 오늘 밤만은 휴양지에 있는 기분이 날 듯하다. 나에게는 휴양지의 옷이 있다. 알게 모르게 사연이 묻어있는 옷들. 작년보다 23일이나 이르게 온 열대야는 그날 휴양지에서 산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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