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대 여자의 인상
‘흉터가 제대로 남았나보네.’
최근 휴대폰을 새로 장만한 기념으로 요리조리 셀카를 찍어보는데 사진에 담긴 내 얼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콧등에 남은 흉터였다. 한동안 거울도 대충 보고 사진도 거의 찍지 않고 지내다보니 꽤 오래전에 생긴 상처가 새삼 눈에 들어온 것이다.
착색이 된 건 아닌데 아주 얇게 살이 패여 명암이 강하게 지는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눈에 잘 띄는 흉터다. 얼굴에서 가장 도드라진 코, 그 중에서도 코의 중심인 콧등에 생긴 흉터이다보니 자세히 보면 남들도 알아차릴 수 있겠다. 날 그렇게 가까이서 보는 사람은 요즘 매우 드물지만.
기억하기로 이 흉터는 약 5년 전쯤 생겼다. 콧등에 귀찮은 뾰루지가 생겼었는데 그걸 손으로 억지로 짜내다 깊은 상처가 생겼고 이후 흉터로 남았다. 그 당시만 해도 여드름 하나 손으로 짰다고 이렇게 제법 깊은 흉터가 생길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래서 이후 주변인들이 가끔 내 콧등 흉터에 대한 얘기를 꺼낼때 나이가 들어 코에 주름이 진 것이라 답했고 실제로 그렇게 믿기도 했다. 나는 웃을 때마다 코를 찡긋하는 습관이 있는데 서른이 넘는 세월 동안 수천번은 찡그렸을테니 지금쯤이면 주름이 생길 법하다고 여겼다.
내 흉터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시점은 첫째 아이의 돌 무렵이었다. 아이의 돌 기념으로 스냅 사진을 찍은 뒤 결과물들을 보는데 콧등의 상처가 매우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가끔 셀카나 남들이 찍어주는 사진 속에서는 전혀 발견을 못하다가 상처가 난 지 약 3년이 지나 제대로 보게 된 것이었다.
아마 콧등은 피부조직이 매우 얇아 조금만 건드려도 회복이 어려운 것이겠지. 그리고 세월이 지나 상처가 아무는 과정을 거쳐 흉터가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흉터가 신경쓰이긴 했지만 육아에 여념 없던 시기라 병원에 가볼 생각도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한때 얼굴에 대한 집착이 지독했던 시기가 있었다. 좋다는 수입 화장품도 사보고 피부과도 들락날락했었다. 그래서 얻은 결과물은 어땠을까. 아마 내 생애 최악의 얼굴을 가졌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틈만 나면 올라오는 뾰루지를 손이나 압출기로 뜯어내느라 피부는 늘 붉은 자국으로 가득했고 여드름 패치나 밴드가 덕지덕지 얼굴을 채우고 있었다. 날이 갈 수록 피부는 예민해졌고, 굳이 짜낼 필요 없는 작은 피지에도 결벽을 느끼며 손을 대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쳤었다. 새로 옮긴 부서에서 팀장과의 갈등, 동생의 갑작스러운 상경으로 좁아터진 원룸에서 매일 벌어진 말다툼, 주변의 간섭으로 쉽지 않은 결혼 준비 등 의지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에 압도됐었다. 당시 유일하게 내 손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얼굴 피부였다. 물론 결과가 좋지 않아 스트레스는 더 쌓였지만 얼굴에 솟아난 뾰루지를 짜낼 때 쾌감으로 스트레스를 날렸다.
얼굴 피부만 해결되면 모든게 좋아질 것처럼 간절했던 그때였다. 그런데 부서가 바뀌고, 결혼식을 무사히 치르고, 넓은 신혼집으로 옮겨 지내는 환경이 좋아지면서 거짓말처럼 피부가 좋아졌다. 물론 가끔 피곤할 때 뾰루지가 한두개 올라오긴했지만 신경쓰지 않고 내버려두니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피부 집착병에 시달렸던 그때였더라면 깨끗한 얼굴에 단 하나의 뾰루지만 올라와도 금세 기분이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마음이 쓰이지 않았던 것이다. 때로는 볼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분홍색 여드름이 볼터치를 한 것 마냥 내 얼굴을 더 귀엽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 만족스럽기도 했다.
뾰루지든, 상처든, 흉터든, 결국에는 몸의 주인인 내가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렸다. 새삼 나는 이 깨달음을 아주 어릴때부터 체득하고 있었다. 여섯살 꼬마 시절 뒷집 남자 아이가 내 뺨을 손톱으로 할퀴어 3센치 정도의 제법 큰 상처가 생겼다. 상처는 흉터로 남아 내 젊은 시절을 내내 따라다녔다. 가끔 사람들이 이 흉터에 대해 물을 정도로 아주 깊고 선명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 상처에 애착을 키우고 있었다. 이 흉터를 얘기할 때마다 인상을 쓰며 속상해하는 건 엄마뿐이었다. 뺨 한쪽에 핏방울이 맺힌채 집에 돌아온 나를 다시 데리고 그 아이의 집에 찾아가 대차게 따지던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안그래도 목소리가 크기로 유명한 엄마인데 불같이 화를 냈으니 그날 저녁 동네 분위기가 꽤 살벌했다.
나는 그날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이후 중학교에 들어갔을 땐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르면서 잠시 흉터가 옅어졌고, 대학생이 된 후 볼살이 빠지면서 짙어진 흉터는 내 얼굴을 묘하게 사연있어 보이는(?), 분위기 있는 얼굴을 만들어 주는데 한 몫했던 것 같다. 몇몇 친구들은 내 흉터를 좋아해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만사에 거침이 없고 자신감이 넘쳤던 어린 시절이었다. 취업의 문턱에서 여러번 고꾸라지고 사회생활을 하며 이리저리 치이면서 너덜너덜해진 삼십대 초반의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반짝이던 때였다. 힘든 일이 거짓말처럼 한꺼번에 닥치는 불운도 없었을 뿐더러 역경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스스로를 괴롭힐 만큼 자존감이 낮지도 않았던 날들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흉터를 추억하며 뺨을 요리조리 살펴보니 그게 잘 보이질 않았다. 어느새 사라져버린 것인가. 수많은 뾰루지들과 콧등의 상처와 씨름하는 동안 내 오랜 그 흉터는 나도 모르는 사이 점점 옅어져간 것이었다. 딱히 반갑지도 아쉽지도 않았다.
다시 거울을 보며 콧등 위의 흉터와 정면으로 마주해본다. 이 흉터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내버려두거나 피부과에 가서 흉터 제거술을 받는 방법이 있다. 시술을 받아가면서까지 없애고 싶은 열정은 없다. 그렇다고 뺨에 생겼던 흉터에게 줬던 정을 일부러 만들어주고 싶지도 않다.
지금은 그저 무심하게 데리고 있기로 마음먹어 본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던 삼십대 초반보다는 내 마음이 평온하니 그런 마음가짐이 가능하겠지. 또 그 시기를 지나오며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이 있다면 앞으로 어떠한 시련이 닥쳐도 절대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기로 한 것이기에.
요즘은 사람의 얼굴을 볼 때 잡티보다는 전체적인 인상을 먼저 보게 된다. 우선순위가 바뀐 것이다. 지난 주말 마트에서 본 남자의 얼굴은 주근깨가 많았지만 웃는 얼굴이 편안해보였고, 놀이터에서 만난 여자는 상당한 미모를 가졌는데도 내내 미간을 찌푸리고 있어 아름답다는 인상을 갖기 어려웠다.
거울을 보며 평소처럼 코를 찡긋하며 한껏 미소지으니 잠깐 동안이지만 흉터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