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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스티스 Apr 12. 2023

초코송이는 육아 필수품입니다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지난 금요일 남편이 뜻밖의 휴가를 얻었다. 회사에서 갑자기 그동안 고생했다며 선심쓰듯 보너스 휴가를 준 건 아니고 여기 미국에선 부활전 직전 금요일을 ‘성금요일(Good Friday)’라고 부르며 쉬는 전통이 있다. 모든 기업이 쉬는 건 아닌데 운 좋게도 남편 회사는 이 기념일을 챙기는 모양이다.


3일간의 연휴라니. 들떠도 너무 들떴다. 마침 기나긴 우기가 끝나고 화창한 캘리포니아표 날씨가 본격화된다는 일기예보가 들뜬 마음에 맞장구를 쳐줬다.


감정 기복이 있는 나와 달리 늘 평정심을 유지하는 남편은 모처럼 휴가를 얻었는데도 아무런 기색이 없었다. 아이에게 아침으로 줄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며 오늘 해야할 일을 읊조렸다. 그의 ‘오늘의 할 일’ 리스트에는 당연히 놀러 나가는 일정은 없었다. 아침을 먹고 잠시 밀린 회사 업무를 보다가 지난주 이케아에서 산 침대를 조립하고 장을 봐서 저녁을 해먹는 일이 다였다.


나는 은근 슬쩍 피크닉을 제안했다. 날씨가 너무 좋으니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사서 공원에 가자고. 예상대로 볼멘소리가 돌아왔다. 어차피 내일 외출 일정이 있는데 또 나가야 하냐고. 내일 외출 일정은 요즘 가깝게 지내는 아이 친구 엄마들과의 점심 데이트를 말한 거였다. ‘그건 엄마들 끼리 보는 거고 오늘은 간만에 우리 셋이 나가자는 건데’라는 소리가 목끝까지 올라오다가 말았다.


아침을 먹다 만 아이가 배고파하자 어영부영 점심을 떼우고 나니 오후 세시였다. 침대 조립을 시작한 그가 목이 마르다며 커피를 사러 가자고 했다. 더 정확히는 ‘커피는 사러갈 건데 필요한 게 없냐’고 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얼른 옷을 주워입고 따라나섰다.


‘3분 안에 준비 안하면 혼자 간다’며 매정한 선언을 하고 밖에서 우리 여자 둘을 기다리던 남편은 신발을 신고 나오는 내게 휴대폰을 건넸다. 화면에는 동네에서 맛있다는 카페 리스트가 주르륵 나와 있었다. 차로 제법 가야하는 거리의 카페도 있었다. 외출하기 싫다더니 츤데레도 이런 츤데레가 없다.


시계는 오후 네시를 향하고 있었지만 아직 공기는 뜨끈했고 놀러 나가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날씨였다. 커피를 사서 집근처 놀이터에 가서 아이와 실컷 놀았다. 커피는 평점에 비해 형편 없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신나게 논 아이는 피곤한지 집에 오자마자 늦은 낮잠에 들었다. 아이 옆에서 잠시 졸던 나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남편이 헐레벌떡 내려와 방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깼다. 중요한 부품 하나가 없다며 문닫기 전에 이케아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부지런한 남편이 정말 대견하면서도 간만의 휴가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다는 것 같아 안쓰러운 마음이 교차했다.


남편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뒤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뽀로로를 틀고 초코송이 한 봉지를 뜯었다. 뽀로로 오프닝송과 함께 달콤한 초코 냄새가 아이와 내 주변의 공기 속으로 팡하고 터져나왔다. 아이는 작은 손에 쥐어진 버섯 모양의 초코송이 하나에 울음을 뚝 그쳤다. 나도 한숨을 내 쉬고 초코송이 하나를 입에 넣는 순간 곤두서있던 신경이 일제히 나긋하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 이제서야 생각났다. 난 어릴 때부터 초코송이를 참 좋아했지. 초콜릿의 청크한 질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양의 초콜릿 갓 모양에 바삭하고 담백한 과자 기둥으로 구성된 앙증맞은 과자. 피곤하거나 기분이 꿀꿀할 때 이만한 과자가 없었다. ‘너무 맛있다’가 아닌 ‘너무 행복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초코송이 반 봉지를 뺏어먹고는 기운이 나서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문득 어쩌면 지금 이 평범한 순간이 진짜 행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단하게만 느껴졌던 지난날들을 지나오며 나는 늘 행복한 미래를 희망했었다. 늘 불안에 시달리며 내년은, 후내년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철학관 아저씨의 말에 의지하며 내 앞날이 안녕하기를 간절하게 바래왔다.


희망의 끈을 놓치 않으려 발버둥 치는 내 자신을 보며 나는 그래도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부모님이 자주 다투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밝고 바르게 성장했고,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도 당차게 나를 지킬 줄 아는 그런 사람. 그런데 이날 처음으로 어쩌면 나는 자존감이 낮은, 늘 불안에 시달리며 행복이 오길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는 나를 보며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 엄마는 지금이 육아 하느라 힘들어도 돌이켜보면 아이가 주는 기쁨을, 남편과 함께 가족을 이뤄가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시기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이 시기가 지나면 행복 일도 별로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엄마를 원망했었다.


어쩌면 막연한 행복을 좇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추상적이지만 남들이 말하는 행복한 삶. 내가 세운 행복의 기준이 없었기에 열심히 일하고, 사회에서 인정받고, 누구나 꿈꾸는 성공한 삶을 동경해왔다. 지금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육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동기들이 팀장을 달고 해외 파견을 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뒤처지는 기분이다.


그런데 이날 처음으로 스스로 행복을 쌓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절대적인 기준의 행복. 어릴적 유년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과 행복한 기억이 앞으로를 살아나가는데 큰 밑거름이 되는 것처럼, 나는 앞으로 몇십년 남은 생을 살아나갈 힘을 지금 쌓아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일을 하며 얻는 성취감으로 자신을 완성해나갈 수 있겠다. 지금 나의 경우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아이를 키우며 얻는 즐거움 속에서 나의 일부를 완성해나가고 있다.


지금 사회가 육아를 폄하하듯 나도 그랬다. 어릴 적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가 집에 없는 게 싫었으면서도 가정주부보다는 일하는 엄마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의 사회생활 경험 없이 한 평생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한 시어머니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마다 내 커리어에 집착했었다. 신랑의 해외 파견으로 미국행이 결정됐을 때도 타지에서 아이만 돌보며 경력을 썩혀야 한다는 생각에 우울하기도 했다.


부끄럽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엄마이기 전에 한 개인인 나에게 육아와 일 중 무엇이 더 가치있는지. 여전히 나는 사회적으로도 성취를 이뤄낸 멋진 여성이자 일하는 엄마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내게 분명한 것은 육아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육아의 가치를 따지기에는 아직 내가 미숙하지만, 육아가 주는 행복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긍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열 번 중 아홉 번 울고, 한 번 웃는다는 소리가 나올만큼 육아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주변에는 출근하는 게 육아보다 훨 낫다는 사람도 많고 나도 그렇게 느낄 때가 있다. 가끔 부모들 중에서는 영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보면 나는 나의 예상을 깨고 육아가 적성에 잘 맞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언젠가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에 대해 진심으로 인정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래본다. 그 전까지는 지금 이 시기의, 이런 삶이 내게 주는 행복감을 놓치지 않고 흠뻑 느껴보는 데 집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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