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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스티스 Dec 05. 2023

미세스 커리

엄마도 격려가 필요해요

미세스 커리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꼈던 주말이었다. 지난 금요일 첫째 아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갔을 때 미세스 커리는 아이의 낮잠 담요를 건네주며 내일 생일파티에 오냐고 물었다. 지난 토요일은 아이의 반 친구 한명이 생일을 맞이해 스무명이 넘는 반 친구들을 모두 집에 초대해 파티를 여는 날이었다. 한 달 전에 초대장을 받긴했지만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을 때라 선뜻 내키지 않았다.


못 갈 것 같다고 대답하는 내 모습에서 갈팡질팡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던 것인지 미세스 커리는 그냥 와서 놀라고 설득했다. 생일파티에 참석하려면 연락을 받았던 한 달 전쯤에 의사를 밝혔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간다는 건 또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지금 와서 가는 건 너무 늦었다고 말하자 미세스 커리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Who cares?)며 그냥 오면 된다고 했다. 본인이 직접 생일 아이의 엄마에게 얘기를 해주겠다며.


이런저런 핑계를 나열한 나의 거절과 그것들이 별 것 아닌 양 비눗방울처럼 팡팡팡 터트려 버리는 그녀의 설득이 몇 번을 더 오갔다. 유치원을 나설 때쯤 이미 나는 내일 생일파티에 가져갈 선물로 뭘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멀찍이 서서 우리의 대화를 듣던 다른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미세스 커리는 설득력이 대단하죠(She is very persuasive).” 미세스 커리는 이제 갓 유치원을 시작한 아이의 첫 담임 선생님이다.


다음날 아침 서둘러 첫째 아이의 손을 잡고 둘째 아이는 아기띠로 안은 채 생일 파티가 열리는 집으로 갔다. 미세스 커리도 선물을 손에 든 채로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너 왔구나. 잘 왔어. 네 덕분이지 뭐. 인사를 주고받고 우리는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반 아이들 대부분이 부모들과 함께 파티에 왔다. 아이들은 다 같이 앞치마를 두르고 슬라임을 만들고 뒷마당에 있는 작은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놀았다. 예상대로 부모들과는 어색하긴 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모두가 각자의 아이들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고 나도 수시로 둘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첫째가 잘 노는지 보느라 주변사람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이가 평소 유치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는데 이번 기회에 살짝 엿보기를 할 수 있었다. 어떤 아이와 가깝게 지내는지, 반 아이가 무리한 요구를 할 때 어떻게 대응하는지, 아이들이 내 아이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조금 당황스럽고 속상한 장면도 있긴 했지만 모두가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이니 그러려니 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무엇보다 아이는 집에 돌아갈 때쯤 입에는 케익 크림을 잔뜩 묻히고 양손에는 게임에서 얻은 사탕을 가득 쥐고서 세상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밌었냐고 물었더니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했다.


나는 길을 나서기 전 미세스 커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파티에 가라고 강요해 줘서 고맙지?.” “응. 그리고 엄청난 설득력을 가져줘서 고마워(Thanks for being persuasive).”


미세스 커리는 어쩌면 내가 낯선 땅에 와서 만난 사람 중 친근감을 느끼는 몇 안 되는 사람일 것이다. 그녀의 첫인상은 물음표만 남겼었다. 위엄이 넘치는 교육 경력을 지닌 60대 백인 여성이지만 겉모습은 나이와 달리 매우 자유분방해 보였다. 정리되지 않은 긴 금발 머리에 앞머리는 분홍색 브릿지가 물들어 있어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했던 기억이 난다.


교육자에게 기대했던 차분하고 정돈된 인상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을 대할 때 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끔 아이가 점심을 먹으며 묻힌 소스를 얼굴에 그대로 남긴 채로 돌아오면 속상할 때도 있었지만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쉽지 않으니 그 또한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미세스 커리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학부모인 나를 대할 때 스스럼없는 태도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선을 넘지는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편안하게 다가가는 일은 쉽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그녀는 수십 년간의 교직 생활을 하며 이같이 노련한 관계 기술을 연마했겠지만 말이다.


30대 이후, 특히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가는 일이 점점 어렵게 느껴진다. 무심코 뱉은 말이 선을 넘는 말은 아니었는지, 기쁜 마음에 건넨 제안이 상대방을 부담스럽게 한 건 아닌지 대화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가볍지 않다.


그 와중에 미세스 커리가 생일파티에 ‘그냥 가라’고 끈질기게 설득한 일은 학부모의 인간관계라는 하나의 관문을 넘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내가 세상에 발을 내디딘 아이에게 별일이 아니라고 해주듯, 그녀도 이제 엄마의 세계에 들어선 내게 격려의 말을 건네준 것 같았다.


실수 좀 하면 어때, 그래도 괜찮아. 별일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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