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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쟤와 별 Oct 08. 2021

읽기의 (흑)역사 part 1

읽기 일기(1)

1.

 당신이 나를 처음 봤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게임 잘하게 생겼어요."

 "축구 좋아하죠?"


 대충 이런 첫인상 이야기를 듣고 산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어색함이 싫어서 시시한 농담을 일삼거나 안 웃긴 상황에도 하하하- 웃곤 하는 한없이 가벼운 내 모습. 대충 가늠이 가실런지. 아마 당신 주위에도 나 같은 이미지의 인간이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첫인상과는 다르게 꽤 많이 책을 좋아하고, 놀랍게도 감성적이기까지 하다. 어느 정도냐면 지금도 바탕화면 한 켠에 그동안 썼던 시나 소설 따위가 한 묶음 쌓여있다. (폴더를 정리하다가 한 번씩 꺼내어 읽노라면 참혹한 퀄리티와 곰팡이 필 듯 눅눅한 감성에 그만 마음이 경건해질 지경이다.) 과연 책스타그램 속의 친구들은 나를 실물과 매칭할 수 있을까, 가끔 궁금해지곤 한다.


아무튼 나는 책을 정말이지 좋아한다는 말이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2.

 나는 오랜 시간 읽었다. 독서량을 권수로 세어본 적은 없으나 몇 천권은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책이 아닌 '활자'를 읽었다. 지적 욕구인지 허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시기였다. 이렇게 말하는 내게 누군가 말했다. 지나친 겸양은 기만이라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예컨대 중학생이 리처드 파인만이 설명하는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내가 과학고 준비생이었다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수학을 못해서 문과에 갔다.)


 그러나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칭찬들("어머, OO는 이런 책도 읽어? 진짜 똑똑하다.") 때문에 나는 그 세계를 탈출할 수 없었다. 운동도, 인간관계도, 공부도, 외모도 그저 평범한 나로서는 그런 스마트한 이미지가 구축한 초자아를 깨뜨릴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 보편적인 학창시절을 겪은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 욕망의 텃밭엔 나르시스가 자랐다. 그렇게 나는 텃밭으로 부질없는 물붓기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적 경험이 축적되면 넘쳐 흘러 어떻게든 길을 내고 결국은 가야할 길로 가기 마련이다.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내가 꾸역꾸역 무언가를 하는 이유다. 내게 가야할 길이란 '이야기'였다. 중학생 시절, 두껍고 전문적인 과학서를 읽다가 흥미가 동해 경제경영 서가를 기웃거리던 시절이었다. 잭 웰치가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 사의 성공 원인을 분석하는 책이었는데 나는 그 책에서 GE가 성공하게 된 6시그마 원칙이 아니라, 자신감이 부족했던 어린 시절 잭 웰치의 이야기가 자꾸 생각났다. 말을 더듬던 잭은  Tuna sandwich를 Tu, tuna sandwich로 발음해서 두 개의 샌드위치를 사게 된 에피소드를 상상하니 그때의 모멸감이 내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집에 돌아와 책장을 보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여태껏 내가 관심을 가진 건 인물의 '이야기' 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 도서분류기호 700번대, 이야기로 꽉꽉 채워 둔 문학 서가에 처음 발을 들였고, 그건 가장 오래된 취향의 시작이었다.

  

  

3.

 입대 직전까지 나는 문학 지상주의자였다. 경제학부에 입학했지만 세계의 빈 자리는 문학이 아니면 채울 수 없다고 믿었고, 낭만 없는 삶이란 죽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독서 모임을 했던 형의 말에 따르면 나는 이 캠퍼스에 남은 마지막 낭만주의자였다. 이것도 좋게 표현해준 거고 나는 IMF 금융위기 전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순진한 대학생처럼 살았다. 알바를 하는 목적은 오로지 해외여행이었고, 스펙 쌓기에 골몰하는 친구들을 보며 그들의 '불안 감수성'이 '낭만 감수성'을 장악해버렸구나 싶어서 못내 마음이 아팠다. 그들의 인생의 서사는 너무나도, 진부해보였다.

 

 당시 내 눈으로, 내 피부로 스며든 모든 경험들은 문학의 필터링을 거쳐서만 비로소 기억이 되었다. 그러느라 과도한 감상주의에 빠지기도 했고 어느 정도 입대 직전의 삶을 망치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문학을 전투적으로 내 삶에 편입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한동안 유행이었던 인문학 붐에 힘입어 파워 북블로거들이 책을 많이 출간했고 이미 시들해진 유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그런 책들은 출판되었다. (기실 위기라고 말할 때는 위기가 아니다. 당시에도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많았지만 그 유명한 <꿈꾸는 다락방>도 고물상에 쌓여있는 지금은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인기 많았던 필자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로쟈'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던 이현우라는 사람이었다. 그의 책을 가이드로 삼아 나는 수많은 책들을, 또 초등학생 때처럼 뜻모르고 읽어대기 시작했다. 물론 소화하기에는 상당히 벅찼지만 이미 활자를 읽어내려 가는 데 이골이 났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새로 산 청소기의 사용 설명서쯤이야 졸지 않고 한 번에 정독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른 시절이었다.)


 당시 사들인 책들의 리스트를 보아하면 세계 각국의 고전들과 아주 진중한 사회과학서들이었다. 고전도 그냥 고전이 아니라 토마스 만의 <마의 산>같은 두껍고 난해한 책이었고,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와 같은 본격적 학술서적도 있었다. 돌이켜 볼 때마다 나의 독서엔 정말 아무런 체계가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의 단계마저도 밟지 않은 일련의 불확실, 비체계적 과정 속에서 개인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책과 조우하게 되었다.

   

   

4.

 소설가 김연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2007).


 당시엔 이 책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지는 잘 알 수 없었으나 1900년대 후반의 역사를 가로지르며 묘사하는 개인의 감정, 그 와중에도 구불구불 흘러가는 이야기들은 작가가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 적어도 뭔가를 겪어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나'가 되고 싶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의 욕망에 매혹되었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좀 달라 보이고 싶었다.) 이후 나는 김연수의 저작을 따라 읽으며 그의 가치관을 내면화하려고 애썼다. 이때의 경험은 매우 강렬해서 지금까지도 생에 관한 태도의 저변을 이루고 있다. 낭만의 유효함을 믿고, 인간의 선의를 믿고, 언제나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하며, 끝을 알면서도 묵묵히 행하는 자들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게 된 것이다. 예컨대 사회는 유기체이므로 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뒤르켐의 말을 뒤집으면 다음과 같다. 개인은 개별적 우주이므로 사회라는 단위로 환치할 수 없다. 인류애가 자주 바닥을 치지만 이런 명제는 여전히 내게 유효하다.

 지금은 그의 글이 70년대생이라는 세대론적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쉽게 비관하지 않도록 만들어준 그의 글에 아주 많이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김연수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욱 침침한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이유도 없이 외로워하는 자의식 과잉 소년이었던 내게 가장 효과적인 '뽕'이었고 그 맛을 잊지 못해 아직도 문학을 읽고 있다. 나에게 수많은 문학들은 '곁'에 있어주는 말들이었다. 내가 누구이건, 얼마나 외롭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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