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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Feb 09. 2021

언덕이라고 했기에 흐르는 것

안희연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어렵다"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봤어요. <하기가 까다로워 힘에 겹다>는 뜻이더라고요. 제게 시는 늘 어려웠어요. 돌이켜보면 시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 앞에서 끙끙대던 것처럼 시를 읽다 보면 눈 앞이 하얘지곤 했으니까요. 좀처럼 해석되지 않는 텍스트가 부담스러웠어요. 그렇게 뒷걸음질 치다 보니 한동안 시를 멀리했어요.


언젠가 그림을 보듯 시를 보라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시를 읽기 시작했어요. 쉽지 않더라고요. 몸에 힘을 빼고 언어가 자아내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느끼려고 노력해봤지만, 문득문득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밑줄 긋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어요. 여전히 연습 중이에요. 답을 찾지 않고 오롯이 감각에만 집중해서 시를 읽어내는 연습이요. 드넓은 해변에서 조개를 줍듯이 시를 읽은 마음들을 주워서 글을 써요.




오늘은 안희연 시인의 시를 읽었어요.


(···)

여름
우리는 아름답게 눈이 멀고
그제야 숲은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서
눈부신 정원을 꺼내주었던 것입니다

색색의 꽃들 아름다워 손대면
검게 굳어버리는 곳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멀찌감치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니 거기서 무얼 하고 계세요 왜 그런
굴러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계세요

무심코 둘러보았는데

모두들
자신을 꼭 닮은 돌 하나를
말없이 닦고 있었습니다


- 안희연 「돌의 정원」 부분


숲이 보이시나요. 시인이 만들어낸 숲의 호주머니 속에서 '눈부신 정원'이 꺼내집니다. 그 아름다운 숲에서 '굴러떨어질 것 같은 얼굴'들이 '자신을 꼭 닮은 돌'을 닦고 있네요. 굴러떨어질 것 같은 얼굴이 저의 얼굴인 것만 같아서 한동안 멍해졌어요. 삶과 죽음 어디쯤 자리한 곳에서 무기력하게 읊조리는 듯한 중얼거림을 읽다 보면 땅에서 발을 떼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안희연 시인은 이렇게 썼어요. "간신히 안간힘으로 흘러왔다. 그러니까 당신도 오래오래 아팠으면 좋겠다. 그 먹먹함의 힘으로 다시 씩씩하게 걸어가주기만 한다면, 서늘했던 당신의 눈빛이 사랑으로 기울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든 아파도 좋다. 더 허물어질 수 있다." 시인에게 건네받은 먹먹함의 힘으로 저는 씩씩하게 걸였어요. 그의 시집 안에서 내내 먹먹하게 걷다가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는 제목의 마지막 시를 만나 비로소 씩씩해졌어요.


(···)

그러나 우리에겐 노래할 입이 있고
문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다
부끄러움이 만드는 길을 따라
서로를 물들이며 갈 수 있다

절벽이라고 한다면 갇혀 있다
언덕이라고 했기에 흐르는 것

(···)


- 안희연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부분
  *빅토르 하라


'노래할 입'과 '문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물들이며 갈 수 있다'라고 말해요. 인용하지 않았지만 시의 앞부분에는 이런 시어들이 나와요. '툭하면 허물어지는 성벽', '내정된 실패', '하루치의 슬픔' 같은 것들이요. 그것을 절벽이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 언덕이라고 하면 흘러가겠죠. 시인이 만든 세계를 더듬더듬 짚어가다 보면 생의 의지가 반짝여요. 암흑 속에서 거울의 반사된 빛 같은 것이 어른거린다고 하면 될까요. 그렇게 시집 한 권을 읽고 나면 그제야 땅을 제대로 딛고 서있는 것 같아요.


오늘의 시가 당신에게 흐르는 언덕이 되길 바라요.


<글머리> Photo by Dongsh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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