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CBS 박선영 PD, 오마이뉴스 유지영 기자 지음 '말하는 몸'
"내 몸으로 산다는 것의 현실은 이렇다. 나는 감옥에 갇혀 있다. (중략) 내 몸은 우리(cage)다. 내 스스로가 만든 감옥이다. 지금도 여기에서 어떻게든 탈출할 방법을 찾고 있다. 20년이 넘도록 이 안에서 나갈 방법을 알아내려고 나도 노력을 하고 있다." - <헝거> 36~38쪽 중에서
<헝거>를 쓴 미국인 작가 록산 게이는 흑인이고, 여성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성폭력 피해 생존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평생 겪은 트라우마까지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성범죄 피해 이후 "무거운 사람은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해서 몇 년에 걸쳐 폭식을 했고, 한때 몸무게가 261kg까지 늘어났으며, 이후에는 '체중 감량'을 강요하는 세상의 시선과 다시 싸워야 했다고 말이다.
자신의 몸을 '감옥'이자 '우리'라고 표현한 록산 게이의 책 <헝거>는 여러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 듯하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제작한 CBS 박선영 PD와 <오마이뉴스> 유지영 기자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록산 게이가 영혼의 갈망을 담아 88챕터에 걸쳐 몸에 관한 고백을 풀어놓은 것처럼, 이들은 88개의 에피소드에서 '여성들이 자신에 몸에 관해 말하는 방송'을 기획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2021년 1월 마침내 같은 제목의 책으로도 출간됐다.
'헝거'에서 시작된 프로젝트 '말하는 몸'
저자 박선영 PD와 유지영 기자는 과거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계 블랙리스트 취재 현장에서 만나 함께 밤을 지새우며 서로 알게 됐다고 한다. 책의 앞부분에 따르면,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SNS를 통해 각자 <헝거>를 읽었다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유지영 기자가 "낭독을 해보고 싶다"라고 <헝거>를 읽은 소감을 자신의 SNS에 남겼고, 이에 박선영 PD가 "문득 각자 다른 목소리로 이 책 오디오북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라는 댓글을 썼던 게 시작이라고 한다. 이후 출연자들이 <헝거>의 한 구절을 읽은 뒤 자신의 몸에 관해 말하는 구성으로 팟캐스트 <말하는 몸>이 약 2년에 걸쳐 제작됐다.
프로젝트 구상부터 섭외, 녹음, 편집까지 둘이서 해낸 <말하는 몸>에는 연령대와 직업, 살아온 삶이 제각기 다른 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와 생각이 담겼다. 1화에는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활동가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담겼다.
이 밖에도 타투이스트·배우·트레이너·성범죄 피해 생존자·생리중단 시술 경험자·변호사·성매매 경험 당사자·정치인·목수 등 자신의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헝거>처럼 총 88화로 제작된 방송은 "다시 태어나도 노동 운동을 할 것"이라는 해고노동자 김진숙의 다짐으로 마무리됐다.
팟캐스트와 책은 다른 방식으로 매력을 드러낸다. 팟캐스트에는 출연자들의 목소리만 마치 독백처럼 편집돼 담겼지만, 책에서는 제작자와 인터뷰어로서 두 저자의 생각도 함께 읽을 수 있다. 준비한 인터뷰 내용을 뛰어넘어, 출연자가 친족 성범죄 피해 사실을 말하는 순간도 인상 깊다.
"오드리가 녹음실에 앉아 입을 떼기 직전까지 나는 액티비티(야외활동)를 하는 여성으로서 그를 조명하고자 질문지를 준비했다. (중략) 뜻밖에도 그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돼지발정제를 먹어본 적이 있어요." 그후 나와 박선영 피디는 아무런 질문을 던질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 1권 139쪽 중에서
몸에 관한 기억, 그리고 고백
팟캐스트 <말하는 몸>은 "몸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요?"와 "당신의 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라는 두 질문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총 2권으로 엮은 책 중에서 1권 '몸의 기억과 마주하는 여성들'에서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쓴 백세희 작가가 우울증에 관해 이야기하고, 정치인 신지예가 "젠더 문제를 정치권에서 무겁게 받아들이면 좋겠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세월호 참사 유족인 박보나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왜 여성은 죽어서도, 혹은 유족이라도 외모를 평가당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진다.
"세월호 참사 이후 언론 인터뷰를 하면서 제 사진이 기사에 올라가곤 했거든요. 그 기사 댓글 중에 제 외모를 평가하는 글도 봤어요. (중략) 희생된 여학생들에게는 더한 댓글들이 달린 거예요."
"왜 여성은 고통받는 순간에도, 살아있을 때도, 죽어서도 그렇게 평가를 당하는 존재여야 하는가. 충격적이었죠." - 1권 237~238쪽 중에서
2권 '몸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여성들'에서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담배 피우는 여성'이 겪어야 했던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정치인 장혜영은 발달장애인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삶을 소개하며 '장혜정과 나는 같은 인간이다'라고 말한다. 뮤지션 요조는 운동과 인간관계를 언급하며 '말랑말랑하게 나이 드는 법'을 이야기하고, 아나운서 임현주는 자신의 직업을 향한 편견을 짚으며 안경을 쓰기로 시도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한다.
"'왜 여성 아나운서는 안경을 쓰면 안 되지?' 생각하고 실행에 옮긴 거죠. 파격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건 아니에요. 내 자유로움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살겠다는 정도인 거죠." - 2권 214쪽 중에서
'말하는 몸'이 늘어날수록, '정상성'의 잣대는 줄어들 것
팟캐스트 또는 책으로 <말하는 몸>을 듣거나 읽다 보면, '몸'에 대한 기억들이 저마다 다른 삶과 이야기에 가득 녹아들어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출연자들의 나이, 거주지, 직업은 천차만별이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편견과 차별에 맞서고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화상 경험자, 암 생존자, 그리고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조한진희는 <말하는 몸>에서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은 몸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과연 괜찮은지 돌아보게 만든다.
해외에서 인종차별을 경험한 이의 경험과 함께 한국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을 다룬 부분도 있다. 여성의 몸에 '까만 털'이 많아 고민이었다는 사연이나,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라는 영상으로 화제가 됐던 유튜버 배리나의 '탈코르셋' 선언도 <말하는 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그뿐만 아니라 장애, 채식,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이나 각종 직업에 대한 차별들이 사회 곳곳에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도 출연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깨닫게 된다. 작업 현장에 여성용 화장실이 적어서 "방광염이 애인 같다"라고 말한 여성 목수, 비행기에서도 높은 굽의 구두를 신어야 하는 항공 승무원의 사례를 보면 더욱 그렇다. 특히 작가 이슬아는 개인의 외모 검열이 심해질 수밖에 없는 한국 현실을 얘기한다.
"이전에는 몸에 대한 콤플렉스가 아주 많았던 것 같아요. 늘 통통한 아이였고, 한국 사회가 특히 마른 몸에 대한 기준이 가혹하다고 느꼈어요. (중략) 누군가가 나를 예쁘다고 혹은 괜찮다고 말해줘야만 진짜 그렇다고 믿게 되는 일은 너무 위태로워요. 그렇지만 지금껏 그런 말에 아주 의지했던 것 같아요." - 1권 52~53쪽 중에서
책의 내용에 따르면 저자들이 섭외한 출연자도 있었지만, SNS 등을 통해 팟캐스트 출연 의사를 밝혀와 평생 처음 마이크 앞에 섰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헝거>가 박 PD와 유 기자로 하여금 '몸에 관해 말하는 방송'을 만들도록 이끌었다면, <말하는 몸> 역시 누군가에게 몸에 얽힌 기억을 되짚어 삶을 고백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몸에 대해 말할수록, 거대한 '정상성' 개념에 균열이 생길 것 같다. 이런 흐름이 이어진다면 누군가가 불필요한 잣대로 다른 개인을 평가하는 일도 줄어들지도 모른다. 편견을 깨는 일에 동참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말하는 몸>을 읽는 것도 좋은 시작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