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서재에 꽂혀 있던 책. 수많은 지인들이 추천을 했지만 왠지 쉽게 손이 가지 않는 책이었다. Nike라는 회사에 딱히 관심이 없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또 다른 billionaire의 자서전이라니. 너무 진부한 소재인 것 같았다.
하지만 새해에는 정말로 독서를 좀 하자는 다짐에 조금은 만만해 보였던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지금이라도 읽게 되어서 너무 기뻤고, 이제야 읽게 된 것이 조금 애석하기도 했다.
줄거리는 사실 뻔한 이야기다. Nike 창업자 Phil Knight의 성공 이야기. Oregon 육상선수 출신인 그는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다 좋은 신발을 만들고 싶다는 일념으로 세계 일주를 한 뒤 집으로 돌아와 투잡을 뛰며 Blue Ribbon Sports라는 운동화 스타트업을 만든다. 수많은 땀과 눈물, 기쁨과 고통 뒤 이 회사는 우리가 지금 아는 알고 있는 Nike로 변화한다.
기승전결 자체는 뻔한 헤피 엔딩이지만 이 책이 대작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몇 있었다.
1. Phil Knight가 직접 책을 썼는지 아니면 대필 작가를 구해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엄청난 필력을 갖고 있는 좋은 스토리 텔러다. 문학적으로 가치가 높다기보다는 간결한 문장 하나하나에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고 Phil의 목소리가 잘 긷들여져 있는 느낌. 그를 만나본적은 당연히 없지만 이 책을 통해 그가 누군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자세히 알게 된 느낌이다.
2. 이래 다국적 기업의 CEO라고 하면 (게다가 스포츠 기업) 엄청 외향적이고 마케팅에 능할 사람 같지만 책에 나온 Phil은 그런 편견을 모두 깨버린다. 어찌 보면 고지식하고 내향적인 이 사람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그가 성공한 것은 순전한 운이었는가? 물론 운도 따랐지만 '좋은 운동화'에 대한 집착과 말도 안 되는 이 비전을 어떻게든 밀어붙인 승부근성이 결국 그를 성공의 길로 이끈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은 세일즈가 잼병이었지만 Nike 신발을 파는 것만큼은 본인의 신념이 깃들어 있는 만큼 어렵지 않았다는 회고가 인상적.
3. 운동화 산업이라 하면 간단한 산업구조와 더불어 전혀 혁신적일 것 같지가 않지만 1960년대에 일본에 있는 공장을 방문해 존재하지도 않는 회사의 이름을 갖고 계약서를 따낸 뒤 막무가내로 신발 판매를 시작한 그의 사업가 정신은 전율을 일으킬만하다. 배 한 척 없이 영국으로 가 조선 계약을 따낸 정주영 회장이나 21세기 실리콘 밸리에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여러 창업자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고 느껴졌다.
4. Phil 본인도 고백하지만 고집스러운 자신을 보조해줄 '멋진 얼간이' 들이 없었다면 Nike는 절대 성공하지 못했을 거다. 육상 코칭의 전설이자 동업자인 Bowerman, 세일즈가 하고 싶다고 삼고초려를 해 결국 첫 직원이 된 Johnson, 하반신이 마비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한 Woodell. 이밖에도 불확실한 미래를 담보로 청춘을 바친 수많은 초창기 멤버들. 남들이 보기에는 미국의 구석 Oregon에서 모인 얼간이들이 집합이었겠지만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미래와 세계 스포츠 시장을 변화시킨 선구자들이었다. 왠지 슬램덩크의 북산이 자꾸 오버랩된다.
5. 창업이라는 단어는 sexy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새로운 신소재를 개발하고 스타 선수의 endorsement 계약을 따내는 것과 같은 멋진 순간도 있지만 그 외에도 공장 새로운 공장 부지를 확보, 아시아로 떠나 새로운 공장을 물색, 금융 조달을 위해 다양한 은행과 종합상사를 전전긍긍하던 순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금 문제로 인해 미국 정부와 소송까지 갔던 장면들을 보면 하나의 회사를 일으켜 유지시키고 키운다는 것은 정말로 골치 아픈 일들이 많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을 인내하려면 본업, 즉 underlying product에 대한 믿음과 기쁨이 공존해야 된다.
6. 마지막 챕터는 Phil Knight가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와 이 모든 것들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자신은 1960년대에 집구석에서 신발을 팔기 시작한 청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어느덧 Nike라는 세계적 대기업을 일으킨 창업주가 되었고 billionaire가 됐다는 고백이 참신했다. 내가 billionaire가 될 일은 사실상 제로겠지만 왠지 나도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 대목이다.
글을 쓰는 것을 즐기는 것은 어쩌면 큰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갖고 있는 여러 혼잡스러운 생각을 기록해 놨다가 훗날 세상에 크게 공헌하는 이가 되었을 때 남들과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도 큰 즐거움이 아닐까. 실제로 이 책을 수많은 다른 자서전과 차별시킨 점은 바로 Phil의 솔직한 자기 고백과 내면의 갈등이 아닐까 싶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 그러니 틈틈이 기록해 놓자.
무기력한 새해에 내게 약함을 통해 강함을 알려준 Phil과 Shoe Dog에게 고맙다. Inspiration을 원하는 워너비 창업가들이나 용기가 필요한 현직 창업가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The unknown journey will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