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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Aug 28. 2022

나의 창가에 의자를 내어놓는 마음

신유진, <창문 너머 어렴풋이>, 시간의 흐름




시소를 타는 기분이었다. 나의 하루가 저녁에서 밤으로 향할  친구들은  곳에서 아침을 맞고, 나의 아침에 그들은 하루의 끝에서 곤한 잠에 드니까. 한국에 새로운 계절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놀라곤 했다. ‘비가 그렇게나 많이 왔다고? 이제 쌀쌀한 바람이 분다고? 벌써 단풍이 져버렸다고?’ 날씨처럼 다들 알고 있고 당연히 공유하는 자연스러운 감각에서조차 나만 소외되어 있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곳은 삼한사온도 없고, 장마도 없고, 태풍도 없고, 단풍도, 눈도 없으니까. 저메이카 킨케이드가 <루시>에서 묘사한 그대로 ‘빛을 내느라 너무 애쓴 나머지 쇠약해진 듯한 창백한 노란색 태양만이 사계절 가득할 뿐이니까. 날씨 하나는 기막히게 좋다고들 하는 캘리포니아의 날씨가 나에게는 지루하기만 했다.  지루함은  뚜렷한 변화가 없는 계절에서 오는  알았는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날씨나 계절의 감각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살아간다는 감각을 준다.  곳으로 떠나오면서 내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의 목록에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추가로 어넣는다.

어제는 예외적으로 찌찌뽕! 을 여러 번 외치고픈 날이었다. 친구가 읽고 있는 시집이 내 장바구니에서도 결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과 친구와 내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평범한 인생>의 리뷰를 올린 것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고 통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었다! 서로의 글 아래에 댓글에 재댓글을 이어갔다. 책과 삶을 주제로 한 진지하고 진솔한 우리의 대화가 좋았다. 물리적 거리가 늘 벽처럼 느껴지곤 했었는데 거기에 창문 하나를 내고 그 너머로 친구와 대화를 주고받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멀지만, 외치면 들을 수 있고 던지면 받을 수 있는 거리에 친구가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주고받는 말들은 대부분 내게 편지처럼 도착하곤 했다. 밤 사이 도착한 카톡 메시지에는 나의 아침에, 그러니까 그들의 밤 사이에 답장을 남겼다. 친구는 다음 날 아침에야 받아볼 수 있을 거였다. 오늘 보내면 내일이나 모레쯤 느리게 받아보고 느리게 답장하는 일에도 나름의 정겨움과 애틋함이 있었다. 하지만 시소에서 내려와 평평한 땅 위에 함께 섰을 때의 안정감, 혹은 테이블 양끝에 서서 핑퐁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즐거움이야말로 내게 너무 그립고 소중한 감각이었다. 간만에 이야기를 뭉쳐서 던지고 받고 다시 던지는 일이 놀이처럼 즐거웠다. 내 창 너머에도 나의 이야기에 응답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소중하고 기쁠 수 없었다.

신유진 작가의 에세이 <창문 너머 어렴풋이>에 이러한 창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글들은 그 창을 지나 누군가에게 닿는다. 나의 가장 먼 곳과 타인의 가장 가까운 곳이 만나는 경계에서 그런 식으로 의사소통이 일어난다.* * 김연수, 「거울이 아니라 창에서 글쓰기」, <사물함> 5호 ‘창문’ 이제 나는 완전히 열지 못했던 창을 활짝 열고 이 기록을 힘껏 던진다. 내게 가장 먼 곳이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곳임을 기억하며. 여기, 이 글을 저기 멀리서 보고 있으리라는 믿음, 그것으로 한 글자씩 써 내려간다. 내가 사랑하는 타인들은 그들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내 글을 마중 나올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계속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믿음은 쉽게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_ 신유진 <창문 너머 어렴풋이>, 시간의 흐름, 2022, p144-145

나를 위한 글쓰기에서 독자를 향한 글쓰기로 나아가게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아니, 그 마음은 무엇이어야 할까를 고민하곤 했다. 나의 글이 세상에 무슨 쓸모가 있을까 의심하고, 책의 형태로 삶의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이 사라진 지금에도, 글쓰기는 여전히 필요했고 중요했다. 독서와 더불어 글쓰기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를 알아가는, 내 좁은 세계를 넓혀가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안다. 하지만 누군가 읽어주기를 기대하지 않으면서, 쓰지 않는 날이 훨씬 많아졌다. 작가는 아니지만 스스로를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제는 나 스스로도 그렇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체력이나 시간이 부족한 것은 핑계라는 걸 안다. 글쓰기에 사로잡혔던 어떤 마음이, 쓰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린 거였다. 내가 잃어버린 마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오랫동안 알 수 없었다.

이곳 시각으로 새벽 세 시. 어젯밤 <창문 너머 어렴풋이>의 북토크가 있었다. 장혜령 작가님이 사회를 보시고 신유진 작가님이 대답을 이어가는 자리였다. 그중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책과 더불어 작가님이 좀더 애틋해졌다. ‘글쓰기란 나의 세계가 여기까지임을 인정하고 나보다 더 먼 곳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는 말씀이었는데, 이야기를 건네는 데에서 글쓰기의 모든 과정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 시선과 인식의 한계, 나의 가장 먼 곳, 그곳의 창 너머에는 나와는 조금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도 경계 너머에서 온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어서 내 이야기에 덧붙여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갈 거라는 믿음을 품는 일과 그 연결을 확인하는 일까지가 모두 글쓰기의 과정이라는 말씀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니 자신의 창가에 그 누군가를 위해 편안한 의자를 가져다 놓겠다는 마음은 얼마나 다정하고 어여쁜지. 작가님은 그 ‘연결’을 확인하는 요즘이 무척 기쁘다고 하셨다.


나만 보는 일기에서 독자를 향한 글쓰기로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은 ‘자신감’ 이거나 ‘용기’ 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불특정한 사람들에게 나를 열어 보이는 일이니까. 간혹 이해와 공감을 만나기도 할 테지만 대부분 오해나 외면을 받는 일이기도 할 테니까. 그 가운데 나 자신을 의심하고 상처받을 일을 염려했으니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혼자만의 글쓰기가 독자를 향해 나아가는 데 진짜로 필요한 것은 독자를, 나와 다른 타인의 존재를 상상하고 그를 위해 편안한 의자를 마련해 놓는 일임을 깨달았다. 이름도 알지 못하고 낯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건네는 일, 나의 창 너머로 누군가와 연결을 꿈꾸는 일, 달리 말해 사랑. 사랑하는 마음 없이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아, 내가 잃어버린 것은 연결을 향한 꿈과 미지의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나 보다.

신유진 작가님 말씀처럼 글쓰기는 자신을 열게 되는 과정일 것이다. 팔짱 끼고서 바라보던 세상을 한껏 안아도 볼 요량으로 두 팔을 쭈욱 뻗는 상상을 한다. 상처나 비난에 대한 두려움 없이 나를 활짝 여는 상상. 기지개를 켜듯 맘껏 쭈욱, 맘껏 활짝. 그런 자세에 미소 짓지 않고 지나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내 품으로 만들 수 있는 최선의 기지개를 켜볼까. 먼 곳에 나만 혼자 떨어져 있다는 외로움은 이제 그만 지우고 창문이나 더욱 활짝 열어야겠다. 창 너머에서 나의 기지개를 보고 활짝 미소지을 누군가를 꿈꾸며. 연결을 꿈꾸는 한, 삶은 조금씩 더 좋은 방향으로 기울 것이다. 어느 순간, 반짝 하고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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