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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절미 Aug 20. 2017

동물에서 인간으로: 냉소를 넘어 다시 연대하는 사회

<냉소 사회> X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두 책을 같이 읽고 나서

<냉소 사회>, 김민하 저 //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아즈마 히로키 저

준우



15년의 세월을 넘어 서로 우군이 되어주는 책, <냉소 사회>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올해 초, 탄핵 정국과 조기 대선 뉴스가 맞물리던 시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나가다 들른 수원역 지하의 서점에서 이 책과 마주하게 되었다. 평소처럼 읽을 책이 있나 서점의 책장을 둘러보다, 이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냉소 사회>라. 그럼 그렇지, 요새 이 혼란한 세상에 믿을 게 어디 있나, 하고 반쯤 속아주는 심정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네가 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을까?'라고 도발하는 듯한 검은색 배경과 영문 모를 팩맨 그림이 그려진 책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불친절함을 이겨보겠다는 오기에 이 책을 사버렸지만 말이다. 그렇게 샀던 책이어서 그랬나, 한 달 넘게 책의 첫 몇 장을 넘기지 못했다.


마음을 다잡고 이 책을 다시 읽어내려가며, 흥미로운 구석을 여럿 발견하게 되었다. 저자 김민하는 이전에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는 재밌는 인물이다. 처음에는 여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책을 읽어내려가며 내가 이 부분을 간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이널 판타지>를 예시로 든다거나, 게임의 세이브 기능을 인터넷상의 기행과 연결짓는 대목은 일정 수준의 '덕력'이 없으면 들기 힘든 예시다. 이 '덕후'의 주장을 읽어보고 있자니, 나도 이런저런 온라인 커뮤니티에 죽치며 시간을 낭비하던 덕후였기에 쉽게 공감하며 읽었다. 이를 다시 곱씹어 보다가, 이러한 주장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다른 책이 떠올랐다. 그 책이 바로 2000년대 초반에 쓰여진,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다.


<냉소 사회>는 2016년 말의 우리나라 사회 및 정치 현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2000년대 초반까지의 일본 오타쿠 문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두 책 사이에 15년의 세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인상 깊게 읽은 덕후로서 이 책은 <냉소 사회>의 강력한 우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한 권을 제대로 논하기도 어려운데, 두 권을 엮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더 혼란스럽지 않은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상관없다. 표면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도, 이 두 책은 붙여 놓고 이해할 때 그 주장이 훨씬 세련되고 날카로워진다.



모든 세대가 인터넷 세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냉소 사회>의 내용 전반은 인터넷 문화 분석에 크게 기대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잉절미 모임에 처음 가져와 나누었을 때, 책의 내용이 너무 인터넷 문화에 맞추어져 있지 않은가?'라던가 '젊은 세대에는 유효한 책일지 모르나 모든 세대를 설명할 수 있는 책인가?' 와 같은 지적을 받았다. 학문적인 책이나 교과서가 아니라 하더라도, 책의 중반의 인터넷 문화 설명 부분이 설득력을 가지는 데는 다소 무리수가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책에서 언급하는 PC 통신, 제로보드, 게임 커뮤니티와 같은 요소들이 2017년 현재의 청장년 계층에게는 익숙할지 몰라도,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한 두 세대 정도만 공감할 것 같은 문화를 가지고 우리나라 전체를 '냉소 사회'로 규정하기는 힘들 수도 있다.


<냉소 사회>에서 언급되는 예시들이 저자의 덕후 경력에서 나오는 보편적이지 않은 예시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예시들이 가지고 있는 주요 특징은 오히려 지금에 와서 모든 세대에 적용되고 있다. 바로 스마트폰이 가져온 전 국민 인터넷 시대 때문이다. 세대별로 사용하는 플랫폼은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저자가 언급하는 인터넷상의 메시지의 일회성, 사이버 테러리즘의 전면화, 그리고 세이브-로드의 게임적 감각은 페이스북, 유튜브, 그리고 카카오스토리까지 세대를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던가. 젊은 세대야 말할 것도 없고, 이전 정권에서 국정원까지 앞서서 '사이버 전사'를 육성한 것에서 보듯 인터넷은 이미 세대를 가리지 않고 서로를 향해 '죽창'을 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으로 변해버렸다. 청소년부터 어르신까지, 인터넷상에서 각자의 공간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내용을 열심히 퍼 나르며 1인 미디어를 자처한다.


세대 간 갈등은 점점 첨예해지고 있지만, 이런 파편화 속에서 세대 간의 공통점은 오히려 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인터넷이 이 공통점의 본질일까? 나는 인터넷 문화의 기저에 조금 더 근본적인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고, 마침 그에 대한 아이디어를 아즈마 히로키에게서 얻었다.



'커다란 이야기'가 사라진 시대: 허구적 거대 서사를 찾거나, 거대 서사 자체가 필요 없거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초반은 일본의 "오타쿠계 문화는 J-pop처럼 전 국민적으로 확산된 문화는 아니지만 결코 마이너한 문화도 아니다."고 언급하고 있다. 세계적인 포스트모던적 현상 중 하나로서 일본의 오타쿠계 문화를 바라본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포스트모던의 한 현상으로서 인터넷 문화에 밀접히 연관된 한국의 현 정치사회 현실을 바라본다면, <냉소 사회>가 제시하는 담론의 확장성을 탐구해볼 여지는 충분하다. 


포스트모던의 주된 기반 중 하나는 사회를 지배하는 종교, 사상 등 '커다란 이야기'의 쇠락에서 나온 냉소주의이다.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일본의 오타쿠계 문화는 이러한 냉소주의를 '소비'를 통해 표출하고 있다.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기를 주도한 '커다란 이야기'가 붕괴하기 시작하던 70년대에 등장한 1세대 오타쿠들은 이 사라져 가는 커다란 이야기를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와 같은 작품에서 허구의 세계관에 집착하며 메꾸려고 하였다. 옴진리교 사건을 통해 일본 사회의 '허구적인' 커다란 이야기에 대한 추구 또한 붕괴해버린 뒤, 오타쿠들은 이러한 이야기에 대한 필요 자체를 느끼지 않고 오리지널과 복제의 경계가 희미해질 수준으로까지 양산된 만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비주얼 노벨 게임 등의 콘텐츠를 소비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인데, 제작사조차 하나의 캐릭터를 원작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극장판 애니메이션, 만화책, 또는 게임에서 작품 설정에 집착하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시킨다. 오타쿠 문화의 기반인 소비주의는 이런 식으로 오리지널과 그 파생 작품 간의 경계를 희미하게 하며 소비할 거리를 늘려나간다. 


이러한 논지 가운데 계속하여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등장하는 개념이 '시뮬라크르'다. 시뮬라크르는 이전부터 존재한 개념이기는 하나, 오타쿠계 문화 분석만으로 한정 짓자면 시뮬라크르는 일본 오타쿠계 문화에서 나온 만화, 애니메이션, 비주얼 노벨 게임 및 이에서 파생된 2차 창작물들을 통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작과 파생작품, 즉 오리지널과 복제품의 구별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고, 캐릭터를 구성하는 기호요소인 '모에'요소의 데이터베이스에서 무수히 많은 시뮬라크르만이 조합되어 양산되는 것이 현재 오타쿠계 문화의 창작 양상이다. 그리고 그 무수한 시뮬라크르를 오타쿠계 문화에서 계속 소비하는 것이 커다란 이야기가 몰락한 자리를 대신한 '냉소적 소비주의'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이러한 허구적인 시뮬라크르에 오타쿠층이 깊이 이입하는 것에서 '해리'와 '동물화'를 관찰해낸다. 여러 시뮬라크르의 충돌, 예컨대 많은 비주얼 노벨 게임에서 남주인공이 '여러 명'의 히로인과 '하나'뿐인 순애를 나누는 모순적인 구조는 데이터베이스에서 조합되어 양산된 뒤 '해리'적으로 공존하는 작은 이야기들을 감동의 소재로 소비하는 오타쿠계 문화의 일반적인 양상이다. 욕구 충족을 위해 제조된 콘텐츠를 동물적 본능마냥 끊임없이 소비하는 행동이 바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책 제목이 말하는 바 중 하나이다. 냉소주의에서 소비주의로, 또 소비주의에서 동물화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인간 특유의 공감 능력은 사라지고 데이터베이스에 기반을 둔 피상적 연대만 남은 현실이 아즈마 히로키가 보는 2000년도 초반 오타쿠계 문화의 현주소다. 개인적으로는, 15년 넘게 지난 지금도 그 특징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본다.


물론 이제 오타쿠계 문화는 우리 일상에도 많이 들어와 있다. 위의 캐릭터들은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의 등장인물이다.


이쪽 문화에 배경지식이 없는 이들을 위해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 내용을 줄줄이 늘어놓은 이유는, '오타쿠계 문화'라는 포스트모던의 지류가 가진 특징들이 <냉소 사회>가 짚어내는 우리나라의 정치사회 상황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오래도록 지배해온 커다란 이야기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바로 '박정희-박근혜'로 대표되는 국가 주도의 고도 경제 성장과 그에 복무하는 군대 사회 한국 아닌가. 박근혜가 탄핵당하는 그 커다란 이야기의 붕괴를 목도한 박근혜 지지자들이 보인 극단적인 반응은, 커다란 이야기에 끝끝내 집착하다가 테러를 일으킨 일본의 옴진리교와 같은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통해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는 또 어떠한가. 데이터베이스에서 추출된 정보를 보여주는 웹의 논리에 익숙한 이들은 어떠한 주체가 만들어낸 커다란 이야기를 보는 것보다 데이터베이스를 조합하여 만들어진 시뮬라크르를 보는 데 더욱 익숙한 세대이다. 커다란 이야기의 의미 자체가 사라진 포스트모던 세대는 이미 우리 사회의 주축을 차지하고 있다.




인터넷 시대: 커다란 이야기가 사라지고 공감이 없는 '동물의 시대'가 오다


<냉소 사회>의 기본적인 흐름은 이렇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열등감과 그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인터넷을 통해 증폭되고, 결국 과열된 "감정의 전장"이 되어 버린 인터넷상에서 사람들은 핵심 가치에 대한 '판단 중지'를 한다. 이러한 판단 중지 속에서는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 냉소주의에 빠지거나 어떠한 대상에 극단적으로 열광하는 현상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다시 그 냉소주의는 '어차피 속는 거 우리를 더 잘 속여보라'는 소비주의로 발전하고, 이러한 소비주의적 태도가 정치 현실에 적용되면서 정치적 메시지가 가지는 핵심 가치는 무시된 채 신선한 '제3의 대안'이라는 상품만을 찾는 작금의 현실을 형성하게 된다.


앞서 이야기한 아즈마 히로키의 이야기를 <냉소 사회>의 논지에 구체적으로 접목해 이야기해보자.


<냉소 사회>에서 저자 김민하가 짚어내는 열등감의 전반에는 우리 사회가 추구해온 '성장'이라는 거대 서사가 붕괴한 흔적이 남아 있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는 TV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보여주는 커다란 이야기가 사라지고,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 입시에 목매고 가성비를 따지며 내가 더 잘 했네 비교하게 된 것이다. 이번 대선을 통해 드러난 60대 이상의 자유한국당 지지 성향 또한, 범람하는 가짜 뉴스의 시뮬라크르 속에서 '안보와 성장'이라는 커다란 이야기를 스마트폰과 종편을 통해 (그것이 허구일지라도) 충족시키며 젊은 세대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비단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국가적 단계에도 적용되는데, 저자가 세월호 사건의 원인이 된 안전불감증이 국가가 고도성장을 추구하며 규제를 완화한 결과임을 주장하는 부분 또한 '고도성장'이라는 커다란 이야기가 붕괴하고 있다고 아즈마 히로키 식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드라마로 보면 저 시절이 아름다워 보이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지나간 경제적 황금기를 추억할 뿐이다.

이러한 한국적 열등감을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일어나는 커다란 이야기의 붕괴로 본다면, 이러한 열등감이 냉소주의로 이행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커다란 이야기가 사라진 자리를 오리지널과 복제의 구별이 희박한 시뮬라크르의 범람이 대신하는 과정은, <냉소 사회>에서 묘사된 인터넷이 감정의 전장이 되어버린 과정에 충분히 대입할 수 있다. PC 통신 시절의 게시판, 블로그, 또는 SNS에서, 개인이 담론을 생산하며 세대 불문하고 서로에 대한 투쟁이 가열화되는 것은 그 담론의 오리지널을 추적해내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인터넷 담론 문화에서 세이브-로드의 게임적 감각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나온 비주얼 노벨 게임의 특징과 일맥상통한다. 비주얼 노벨 게임 속에서 여러 미소녀와 순애를 나누는 '가상'과 이것은 단지 세이브-로드로 이루러진 게임일 뿐이라는 '현실'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이에 이입해왔던 오타쿠계 문화는, 게임의 세이브-로드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드디어 보편적인 문화가 되어 버렸다.




냉소 끝에 각자의 욕구만을 쫓아 '동물화한' 한국 사회


이렇게 가상에 속아 넘어가는 게임적 현실에 익숙한 우리 사회는 그러한 속아 넘어감에 순응하여 버리고, 경쟁 사회 속에서 나 죽겠다고 울부짖으면서도 '프로듀스 101'의 국민 프로듀서가 되어 연습생들의 이미지를 소비하며 욕구를 충족하는 '동물화'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일베의 젊은 남성들은 세월호 유가족을 '우리를 속이려는 또 다른 존재'로 규정하여 그 진정성을 시험하고, '진정한 정치는 없다'는 가상적 명제를 끊임없이 소비하며 욕구를 충족하며 동물화하여 버렸다.


고승덕은 '고시3관왕 엘리트' 이미지 덕분에 잘 팔리는 정치적 상품이었지만, 결국 '딸을 버린 부도덕한 아버지'라는 비웃음거리 이미지로 소비당하고 정치 생명이 끝나버렸다.


김민하는 이러한 정치적 소비주의의 또 다른 예시로 '이명박에게 진정한 정치 따윈 없었다'고 폭로하고 냉소하며 문재인이라는 새로운 소비재를 내세운 <나는 꼼수다>를 제시한다. 이에 더해 지금은 시효를 다한 안철수의 '새정치'도 여기서 해당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진보정당들이 제대로 권력을 잡지 못한 원인 또한 기성 정치에 대한 정치적 냉소주의에 기반을 두어 다른 정치 세력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전략으로 민심을 잡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진정한 정치는 없다, 우리에게 와라'라고 주장하면서도 거기에도 진정한 정치가 없는 이러한 속고 속이기에는 한계가 극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냉소적이고 소비주의적인 속고 속이기 끝에 탄생한 것이 박근혜 정부라는 역대 최악의 정부이다. 김민하와 아즈마 히로키의 논지를 혼합하여 이야기하자면, 박근혜 정부가 당선 1년 만에 자신의 공약을 모두 무효로 한 것은 '신뢰의 아이콘 박근혜'라는 속고 속이는 시뮬라크르를 소비해온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결과다. 박근혜를 지지한 이들조차 그 진정성에 아무런 관심 없이 그 이미지만을 소비했다는 이야기다. 그 박근혜를 탄핵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또한 게이트를 촉발한 우리나라 정치사회 시스템이라는 '핵심 가치'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기호 요소가 고갈되어버린 박근혜에 대한 일종의 불매이자 냉소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시대에도 여전히 김민하가 <냉소 사회>에서 지적하는 '냉소와 열광의 교차'는 계속되고 있는데,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것 다 해', '문재인 반대하는 모든 기득권은 적폐'는 그러한 냉소와 열광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디 정치뿐인가. <냉소 사회>에 따르면 여성 혐오의 창궐과 메갈리아의 등장도 사실은 냉소주의라는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물론 김민하도 나도 동의하는 것은,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사회적 약자의 자력구제'라는 점에서 '강자의 횡포'인 여성 혐오와는 질적으로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메갈리아 사이트가 이미 서버가 죽은 지 한참 되었음에도 남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메갈'이라는 단어가 끝없이 등장하는 지점이다. 미러링이 등장한 본연의 목적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에 냉소하며 이를 남녀 간의 허구적 대립으로 재규정하여 소비하는 것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형식을 내용에서 분리해내는 오타쿠적 냉소주의의 일종이다. 이들 온라인 커뮤니티의 주 이용자가 청소년이거나 젊은 남성인 것을 생각하면, 지금 '적폐 청산'을 열심히 외친들 미래 세대에 대한 전망이 긍정적이기는 힘들다.


이러한 상황이 개인적인 악의나 집단적인 악의에서 시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커다란 이야기 대신 파편화된 각자의 작은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 개인들이 각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인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이 거대 서사가 개인에게 가하는 억압을 거부하는 참신한 시도였을지는 몰라도, 이러한 거대 서사를 거부하는 것이 혐오로 분출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귀결된다면 그것 또한 아이러니다. 갈등을 만들어내서 고독하게 욕구를 채우는 동물화 속에는 인간성을 기초로 한 연대가 없기에, 우리는 파멸을 향해 다 같이 열심히 달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표층에 갇힌 파편화된 '동물적'인 소비자 사회가 아닌, 심층을 직시하며 연대하는 '인간적'인 사회를 꿈꾸며


지금까지의 이야기만 보았을 때, 소비주의적 동물이 되어버린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 본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고 싶지는 않다.


<냉소 사회>의 후반부에서 김민하는 열등감, 냉소주의, 그리고 소비주의와의 '화해'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그러한 현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내부자이기 때문에 그런 우리의 모습을 인정하고 출발하자고 제안한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후반부에도 비슷하게 볼 수 있는 대목이 등장한다. <YU-NO>와 같은 비주얼 노벨 게임을 '이야기 소비'의 한계를 지적하는 '포스트모던의 우화'로서 이해하는 것을 통해 오타쿠계 문화 내부에서도 성찰적인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주장은, <냉소 사회>에서 우리가 냉소주의의 내부자라는 굴레를 쓰고 있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한계가 아니라 이야기하는 바와 연결지어 이해할 때 설득력이 배가된다.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박근혜 정부를 향한 '소비주의적 냉소주의'가 결과론적으로 맞았고 이를 통해 촛불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냉소를 통해 폭로된 구조적 모순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또 다른 극우가 나타날 것이지만, 이번 기회에 그 구조적 모순에 제대로 집중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희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잘 먹고 잘사는' 거대 서사를 이룰 수 없는 열등한 우리지만, 그렇게 열등한 존재들만이 문제를 제기하고 현 시스템에 저항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적 소비재일 뿐인 '제3의 대안'이라는 시뮬라크르가 무한히 증식하는 순환을 끊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안의 냉소주의와 소비주의를 성찰하며 표층적 이해관계만 보는 소비자적 태도를 넘어서서, 정치적 시뮬라크르에 대한 소비주의적 열광을 끌어내는 심층의 데이터베이스가 무엇인지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 데이터베이스의 생산자를 인지할 때에, 우리가 모두 어디선가는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임을 다시 깨닫게 될 것이다. 


동물적 소비라는 고독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가 생산자라는 데에 기초하여 연대할 때, 정치는 잘 만들어진 속고 속이는 쇼로 '동물화'하기를 멈추고 다시 인류의 발전을 위해 작동하는 '인간적'인 시스템이 될 것이다.


덕질과 정치참여는 이렇게 조화를 이룰 수 있다(...) https://twitter.com/TeamAllegretto/status/278999050102132736 에서다운 가능.


※ 본 글은 이성규 님의 블로그 포스트 '일베와 오타쿠, 포스트모던 세대의 전면화' http://blog.ohmynews.com/dangun76/502780 에서 영감을 받아서 쓰기 시작했고, 이 포스트에서 제시된 관점이 제 글에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음을 밝히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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