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의 이야기
5월 20일, H와 영화 메이트-데이트 겸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녹음된 인터뷰 대화 내용을 읽기 자연스럽게 다듬었습니다.
# 무던한 기브 앤 테이크
- Q. 어린이날에 뭐했나요?
음, 무슨 일이 있었지만, 인터뷰에선 밝힐 수 없는 내용이라, 노코멘트요!
- 저는 '나를 위한 선물'로 레고 버스를 샀어요. 그리고 만들었죠! 동심으로 돌아간 듯 재미있었어요.
저는 요새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려요. 오늘 그리다가 온 것은 치타예요. 치타 사진을 투명하게 놓고 그 위에 레이어를 덧대어 그려요. 레이어를 막 바꿀 수 있으니까 다른 버전도 그려보고요.
- 아이패드 기본 앱인가요? 유료 앱인가요?
4~5천 원 하는 유료 앱인데, 하나 사서 되게 만족하며 쓰고 있어요.
- Q. 어버이날은 어땠나요?
스트레스받고 부모님께 선물을 해드렸어요. 금액으로 치면 20-30만 원이에요. 의무감에 해서 그런지, 별로 기쁘지는 않네요.
- 전 꽃만 드렸어요.
이번 해는 현금으로 20만 원 드리고, 꽃이랑 케이크를 드렸어요. 예전에 양재 가서 꽃 사다 드렸을 때, 엄마가 '꽃으로 때우면 다냐'류의 짤을 보내시는 거예요. 스트레스받으면서 잔소리 듣느니, 제 마음의 깔끔함을 위해 꽃 이상을 해드렸죠. 앞으로는 신경 안 쓰려 고요.
- 앞으로 기대가 커지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 기대는 제 마음대로 정하려고요. 어버이날 한 번, 생일 때 한번, 적당히 챙기는 것으로요. 이번 아빠 생일 때도 한 번 챙겨드렸는데, 5만 원 이내의 선물을 드렸어요.
- Q. 스승의 날에는 뭐하셨나요?(웃음) 저는 작년까지만 해도 당일에 페이스북을 통해서라도 부랴부랴 챙겼어요. 그나마 이번 주에 한 교수님을 우연히 뵈어서, 선물 준비하고 카드 써드렸는 데, '아차'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제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지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네 좀 무뎌지고 있어요. 스승의날에도 특별히 하려고 한 건 없네요. 음, 아니, 저는 사실 옛날부터 챙긴 적이 별로 없어요. 그런 챙김을 받은 적도 별로 없고, 챙긴 적도 없던 것 같아요.
- 그럼 기브 앤 테이크를 안 좋아하는 스타일인가요?
아니요. 그냥 해본 적이 없어요. 좋고 싫고를 판단하기 전에요. 저는 이런 것도 약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부모님이 안 하는 성격이시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무던하게 자랐어요.
# 역마살과 치타
- 가족 이야기를 하니 최근에 언니와 다툰 일이 생각나네요. 아무리 가족이어도 받아줄 수 없는 범위의 행동을 해서, 다시 독립해서 살고 싶더라고요. 다시 집에 들어간 지 1년 정도 되니까, 공간의 지루함도 생기고요.
에디터 K도 약간 역마살이 있는 것 아닐까요?
- 글쎄요. 가족도 일주일에 한 번씩 보면 절대 안 싸우지 않을까요? 맨날 부딪히니까 싸울 일도 생기는 것 같아요. 7일에 하루 정도는 다툼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일주일에 한 번 다툼도 힘들 것 같아요. 예전에 학교에서 공부 자리를 정할 때, 한 달에 한 번씩 옮겼어요. 의도한 것은 아니고 그때마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는데, 친구가 그것을 보고 '저 녀석 역마살 꼈다.'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아직도 그 말이 생각이 나요. 좋은 뜻이나 나쁜 뜻으로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머리에 남아 있어요. 가끔은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 사주 본 적이 있나요? 이번 주에 만난 교수님이 스승의 날 기념으로 어떤 제자가 사주를 봐준 이야기를 하셨어요. 너무 잘 맞았대요. 사주라는 게 웃긴 게, 과학적인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2000년간의 사람들 통계를 바탕으로 한다고 하니까요. 사이비라고 하기엔 데이터가 있어서 애매해요. 아무튼 교수님 생각으로, 그 사람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알아서 잘 맞추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잘 맞았대요. 그리고 그 결과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대요. 아까 역마살 말한 것처럼 자신도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지'라며 행동한다고 느낀다는 거예요. 재미있는 일이죠.
타로에 대한 발표를 들은 적이 있어요. 사주도 그렇고, 점도 그렇고, 타로도 결국에 종이에 써져있는 단어들은 추상적이에요. 웬만하면 거의 다 맞을 수밖에 없는 말이죠. 그런데 아까 '이 사람이 날 알아서 그런 건가'라는 말처럼, 같은 상징적인 말을 어떻게 해석하냐가 그 사람의 능력이 되는 거예요. 발표자분이 타로 별로 상징을 설명해주셨는데, 예를 들면 1번 카드는 바보인가 초심자 카드였어요. 초심자는 되게 바보인데, 그래서 행운이 따르기도 하죠. 카드 앞에는 강아지가 그려져 있고 절벽이 있어요. 그게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 일수도 있고, 행운이 따른다는 말일 수도 있어요. 초심자는 바보라서 앞의 절벽을 안 보고 뒤를 보면서 걸어가는데, 그걸 강아지가 알려줘요. 위험이 있다고요. 그래서 강아지에 집중해서 말할 수도 있죠. 해석하기 나름인 거예요. 그래서 그분이 교수님을 조금이라도 알아서 더 잘 맞추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그래서 사주를 본 적이 있나요? 강남역 포장마차에서 오천 원 내고하는 타로 같은 것을 포함해서?
의도적으로 가서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한 친구가 그런 것을 좋아해서 따라간 적은 있어요. 우리 집 앞에 있는 곳이었죠. 근데 잘 안 맞았어요. 그렇게 따라서 일생에 두 번 가봤는데, 한 번도 안 맞았어요.
관계를 이야기하니까 생각나는 게, 저는 부모님도 안 챙기고 스승도 안 챙기고 어린이날도 안 챙겼잖아요. 그런데 한편으로 그건 것을 되게 갈망한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 에디터 K와 만났을 때, 제가 엄청 오랜만에 본 것 같다고 했는데 에디터 K는 2주밖에 안됐다고 했잖아요. 그때 큰 깨달음이 있었어요. 저는 2주가 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2주를 기억 못 하는 것도 있지만, 저는 더 자주 만나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뭐랄까, 친해짐의 속도나 자주 보고픈 바람의 속도가 일반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빠르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에 아는 언니와 또 이런 이야기가 나누었어요. 제가 치타라는 말이 나왔지요, 그 언니는 거북이고요. 저는 치타라, 거북이랑 지내면 조급한 마음이 안 채워진다는 말도요. 그 언니가 그럼 치타인 사람을 만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는데, 스스로 짜증나는 게 저는 거북이들이 궁금해요!
- 치타는 안 궁금하나요?
안 궁금하기보다는 제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다 거북이예요.
- 치타랑 거북이 사이는 없나요? 토끼 정도?
에디터 K가 그 사이인 것 같아요. 거북이는 아니고...... 적당한 동물이 생각나지 않네요.(인터뷰 이 후 에디터K는, 치타와 거북이 사이, 자기만의 흥미가 많은 고양이 같다는 H의 추가 답변이 있었다.) 그래서 제가 그리려던 것도 그거예요. 그림에서 치타가 뒤돌아보고 있잖아요, 그 뒤에 거북이를 그릴 거예요. 그래서 그리는 중인 그림이죠.(아래 그림)
- 거북이 류의 사람을 좋아하는 것 아닐까요?
일부러 거북이이면 궁금해하는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신기하게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거북이인 경우가 있어요. 물론 에디터 K도 궁금한데, 제가 10만큼 빠른 사람이라고 치면, 거북이는 1이에요, 에디터 K는 3-7 사이라 이런 사람들을 모아서 그래도 좀 행복할 수 있는데, 1인 사람들이 자꾸 신경이 쓰여요.
- 1인 사람들은 1도 충족이 안 되는 거군요. 엄청난 발견이에요! H는 10의 치타 같은 사람이네요! 치타, 거북이 이야기가 관계와 무슨 관련이 있나요?
저는 제게 주어진 것은 안 챙기고, 자꾸 없는 것을 바라본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모님, 스승은 안 챙기죠. 여행 같은 것도 외국은 가고 싶어 하면서, 막상 한국 여행은 안 해봤거든요. 그런 것들도 연관 있는 것 같아요.
-신기하네요! 왜 그럴까요? 왜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저도 궁금해요.
역마살도 관련 있다고 생각해요.(웃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생각을 하다 보면 그 옆에 있던 자극들이 이어져서, '어 이것 때문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 영화 <버닝>
- Q. 오늘 본 영화는 어땠나요? 저는 그냥 그랬어요. 5점 만점에 2.5점 정도?
엄청 낮네요, 저는 그 정도는 아닌데 말이에요.
- 저는 일단 영상과 음악의 겉멋만 있고, 스토리가 너무 단순하다고 느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 원작이라고 하더군요.
- 각색한 걸까요?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읽었는데, 인물이 단순하고 그렇지 않거든요. 근데 이 영화는 사건도 단순해서 '하루키 소설이 맞나?'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소설은 하나인가 두 개 밖에 안 읽어봤고, 영화를 몇 편 봤어요. 각색이 아니라 영화화한 것이요. 그 영화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이번 편은 그렇지 않았어요. 오히려 각색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이해하기 쉽게, 스토리를 확실하게 한 것 같아요. 제가 느끼기에 이 영화의 원작은 안 읽어 봤지만, 그전에 봤을 때는 흐름들이 산발적으로 있고 뭔가 모아진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이 영화는 확실하게 떡밥을 다 챙긴 것 같아요.
- 그래서 저는 오히려 '뭐지?'라고 생각했나 보네요. 음, 다시 생각해보니 영상이나 음악이 한국에서 보기 힘든 분위기가 있다는 점은 괜찮네요. 3점으로 올리겠어요.
(웃음) 저는 3.5점-4점 정도예요.
# 25살, Hump Day와 영국
- 최근에 25살에 대한 재밌는 비유를 들었어요. "20대의 수요일". 평일에 일하다 보면 금요일은 주말이 있어서 기대가 있는데, 수요일은 중간이어서 앞뒤에 연휴가 없으면 진짜 수요일이잖아요. Q. 이 비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중간을 잘 표현한 것 같네요. 제가 하는 영어 스터디의 텍스트 북 내용 중에 일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어요. 함께 하는 사람들도 모르고 진행을 했는데, 제가 중간에 발견한 게 뭐냐면, 챕터들이 요일 순서대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앞 챕터는 monday blues, 우리로 치면 월요병 같은 내용이고, 몇 챕터 뒤에 Humpday가 나오는 거예요. 그게 wednesday의 별칭이래요. 튀어나온 날이다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 저는 영어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방법 탐색에 대한 귀찮아서 안 하고 있어요.
뭐라도 하는 게 나은 것 같아요. 요새 영어 스터디를 하니까, 프로세스 하나가 영어로 돌아가고 있고, 그 와중에 스트리밍 정액권으로 영화를 자주 보고 있어요. 저는 아무래도 영어가 나온 영화를 한국/일본 영화보다 좋아해요. 보다 보면 영어가 생각나고 더 잘 들리는 게 있어요. 그리고 신기하게 최근에 배운 표현들이 나와서 복습도 잘 되는 것 같아요.
- (대화 중 영국 여행 이야기를 나눔) Q. 영국은 왜 갑자기 가는 건가요? 언제 마음 먹었나요?
일단 제가 유럽여행을 한다고 하면, 가고 싶은 나라로 프랑스가 당연히 1등이었고, 그 다음이 영국이랑 스페인, 이탈리아 순이었어요. 뉴욕 갔을 때 만난 친구가 영국에 살고 있었고, 영드 본 것들도 좋았죠. 뉴욕 갔을 때 느꼈던 게, 영어가 통하는 게 너무 좋아요. 그냥 말이 통한다는 것을 떠나서, 제가 영어를 좋아한다는 것을 더 깨달았어요. 그래서 영어를 하는 나라에 가고 싶었어요.
- 저는 옛날에 영어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아닌 것 같아요. 예전에 언어 자체를 좋아했는 데, 흥미가 떨어졌어요.
그럴 수 있죠. 영어 못한다고 느낄 때, 답답하고 하기 싫었는데, 또 다시 잘하고 싶다는 마음을 버리고 관찰하니까 재밌긴 해요.
- 정액권 스트리밍 영상 서비스는 계속했던 건가요?
3월에 결제했던 게 4월에 끝났는데, 안 한고 있다가 또 다시 끊었어요. 그렇게 영화를 보니까 삶이 좀 풍족해져서 좋아요. 집에 갔을 때 스트레스 푸는 법을 모르고 있었는데, 집에 가서 영화 한 편 적당히 보는 게 저한테 좋은 것 같아요.
- 저는 최근에 보고 싶던 다양성 영화가 있었는데, <인피티니 워>가 스크린 독점을 해서 짜증 났어요. 그런데 제 주변의 어떤 회사분은 다양성 영화를 못 보겠대요. 다수의 삶에 맞춰져 있긴 하지만, 회사원들은 복잡한 영화를 보기 싫어한다면서요. 감정적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보다 마블 영화가 좋대요. 자신도 젊었을 때는 그런 영화를 많이 봤지만 말이에요. 어떻게 보면 저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아까 25살 비유와 같은 맥락인데, 저는 20대 초반일 때에 마블 영화 혹은 대형 상업영화는 안 봤어요. 시간 아깝다고 생각했고, 특히 돈 내고 영화관에서 볼 건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때는 '다운로드해서 여행 갈 때 킬링 타임으로 봐야지' 생각했는데, 25살 되니까 그 중간에 있는 느낌이 딱 들어요. 20살과 30대의 중간에 있는 느낌이. 이제 골고루 보거든요.(웃음) 설정에 빠지면 재밌게 놀 수 있어요.
그러네요, 문턱에 있는 느낌이 있어요. 연애도요. 예전에는 친한 남자 사람은 그냥 다 친구라고 생각하고 아무 생각이 없었거든요. 근데 이제는 제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사람들이 왜 이해 안 간다고 했는지, 제 자신을 알 것 같아요.
- 비슷하게, 예전의 저는 사람이 변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를 못했어요. 그냥 변하지 않고 그대로 살면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럼 세상이 너무 젤리 같이 박제되어 똑같이 되겠구나 생각해요. 그래서 받아 들기로 했어요.
요새 보고 있는 책 중 하나가 <사상 최강의 철학 입문>이에요. 마지막에 레비나스가 나와서 '타인은 지옥이다'부터 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요. 타자라는 걸 자기가 생각하는 것의 반대, 즉 여집합이라고 퉁치거든요. 그 여집합은 다른 생각이라 마주하는 게 괴롭고, 제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집합이죠.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집합은 다 정해져 있으니까, 여집합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마주하는 게 괴로운데, 여집합이 있기 때문에 제가 또 변화할 수 있고, 마주하지 않고 나만 보고 있으면 고지식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결국 괴로운 다른 것을 바라봄으로써, 변화하고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거죠. 방금 말한 젤리를 넘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