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이민 HEYMIN Jul 01. 2023

[서평]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고

구토는 존재에 대한 발작이다.


인생 책을 만나다!


'구토'는 정말 생각지 못한 순간에 찾아와 인생책이 되었다. 다른 대상과의 관계에 대한 사유, 통찰, 감정, 감각이 아주 잘게 잘게 서술되어 있는데 평소에 하던 생각들과 상당히 겹치고 맞물린다. 맞장구의 연속이다. 뒤로 갈수록 '나도 이런 생각했는데! 나도 느껴봤어!'라고 공감할 일이 너무 많아서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느려진다. 와닿는 문장에 치여서 곱씹다 보면 속도가 느려지고 만다. 마치 눈에 담을 게 너무 많아서 천천히 걷게 되는 여행지의 감각과 비슷하다.    


내겐 책을 읽을 때 포스트잇을 적는 습관이 있다. 구토를 다 읽었을 때, 표지 뒤에 붙여둔 포스트잇이 층을 이룬 보면 붙잡는 대목이 많았단 뜻이다.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적었다. (1) 마음에 드는 구절, (2) 인상적인 비유와 묘사, (3) 스쳐가는 생각들.


'구토'가 인생책이 된 걸 기념할 겸 마구마구 적었던 세 가지를 '잘'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포스트잇을 펼쳐두고 나름의 그룹핑을 거쳐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제목인 '구토'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지, 주인공인 로캉탱과 주변인물들을 통해 무엇을 느꼈는지 남겨본다.







구토가 상징하는 것은?


p.34
물체들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을 만질 수 없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하고, 사용한 수에는 제자리에 두고, 그것들 가운데에서 살아간다. 그것들은 유용한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내게는 다르다. 그것들은 나를 만지는데, 이게 견딜 수 없이 느껴진다. 난 마치 살아 있는 짐승들과 접촉하듯 그것들과 접촉하는 것이 두렵다.
 이제 알겠다. 내가 언젠가 바닷가에서 그 돌멩이를 들고 있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생각난다. 그것은 일종의 달착지근한 욕지기였다. 얼마나 불쾌한 느낌이었던가! 그 느낌은 분명 돌멩이로부터 왔다. 돌멩이에서 내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그거였다. 바로 그거였다. 손안에 느껴지는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주인공 로캉탱은 어느 날 바닷가에서 물수제비를 던지다가 손에 쥐고 있던 돌로 인해 불쾌감을 느낀다. 그가 '구토'라고 이름 붙인 이 불쾌감은 어떤 물체의 존재를 인지할 때 혹은 사물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인지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눈여겨보지 않았던, 너무도 익숙해서 거기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던 것들이 문득 존재감을 드러낼 때 다가오는 생경한 느낌! 또는 우리가 정의 내린 규칙과 습관의 지배하에 아무렇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어색해지는 느낌! 나는 이것이 일종의 미시감(자메뷰)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구토의 한 줄 정의는 이러하다.


'구토는 존재에 대한 발작이다.'




Some of these days

'머지 않은 날' 찾아온 혁명


p.21
나는 내가 변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가장 간단한 해답이다. 가장 불쾌한 해답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종종 겪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중략)
내가 주의하지 않는 사이에 무수한 작은 변화들이 내 안에 축적되다가 어느 날 말 그대로 혁명이 일어난다. 그래서 내 삶은 이런 급작스럽고도 일관성 없는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초반에 나오는 대목으로, 로캉탱은 마치 나중에 겪게 될 자신의 변화를 예견한 듯 말하고 있다. 물론 이때의 그는 '혁명'같은 순간이 올 거라 전혀 예상못했겠지만!


p.406
"마들렌, 그 음반을 다시 한번 틀어줄래요? 떠나기 전에 딱 한 번만 더."


부빌을 떠나기 직전, 로캉탱은 자주 들르던 카페 랑데부 데 슈미노에서 직원의 권유로 좋아하는 재즈곡 'Some of these days'를 듣고 한번 더 틀어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곡을 만들었을 유대인 작곡가와 허스키한 목소리로 부르고 있는 흑인 여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다. 창작자에 대한 애정과 애틋함에 빠진 그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동시에 자신이 쓴 글을 읽으면서 누군가도 이렇게 나를 떠올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는다.


이 책을 읽고 얼마 안 됐을 때만 해도 심오하고 아득한 분위기가 너무 짙어 로캉탱이 진정한 행복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재즈곡 제목처럼 정말 '머지 않은 날' 그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좋아하는 재즈를 들으면서 앞으로 쓸 새로운 글과 독자를 상상하며 행복을 말하고 있다. 나는 비로소 로캉탱이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자각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이제 롤르봉으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할 필요도 없고, 존재를 지탱하던 안니와의 과거는 그저 옛일로 남았다. 로캉탱의 존재를 증명하는 대상들은 모두 사라졌고, 마침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에게서 찾게  것이다. 롤르봉을 부활시키려던 목표는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로캉탱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남을 위한 글쓰기 아닌 나를 위한 글쓰기를 실천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아래에 적어둔 대목은 주인공 로캉탱의 말이지만, 마치 사르트르가 '구토'라는 책을 왜 쓰게 됐는지 설명하는 것처럼 읽힌다.


p.409
나도 한 번은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물론 어떤 음악은 아닐 테고... 다른 장르로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어떤 책이어야 하리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니까. 하지만 어떤 역사책은 아니다. 역사는 존재했던 것에 대해 말하는바, 존재자는 결코 다른 존재자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다. 내가 범한 실수는 롤르봉 씨를 부활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다른 종류의 책이 필요하다. 그게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읽으며 인쇄된 단어들 뒤에서, 페이지들 뒤에서 존재하지 않을 어떤 것, 존재 위에 있는 어떤 것을 짐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이야기,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어떤 것, 어떤 모험 같은 것이리라. 그것은 아름답고 강철처럼 단단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존재를 부끄럽게 느끼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중략)
한 권의 책. 물론 그것은 우선은 지루하고도 피곤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롤르봉과 로캉탱

서로의 존재를 위한 존재


p.230
롤르봉씨는 나의 동업자였다. 그는 존재하기 위해 내가 필요했고, 나는 내 존재를 느끼지 않기 위해 그가 필요했다. 나는 원료를 제공했다. 내가 되팔아야만 하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원료, 바로 존재. 나의 존재를 제공했다. 그의 역할은 연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내 앞에 있었고, 그의 멋진 삶을 연기하여 내게 보여주기 위해 내 삶을 빼앗았다. 내가 먹고, 숨 쉬는 것은 그를 위해서였고, 나의 동작 하나하나의 의미는 바깥에, 저기에, 내 앞에, 그에게 있었다.


로캉탱이 롤르봉에게 느끼던 것을 가장 가감 없이 드러낸 부분! 로캉탱은 그동안 롤르봉에게 자신의 존재를 제공해왔다고 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앞서 등장했던 '부빌미술관의 거북한 초상화들'이 떠올랐다. 화가인 보르뒤랭의 손에서 카메라필터를 씌운 듯 새로 태어난 부빌의 인사들. '장점'만 드러나도록 허구 섞여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서 로캉탱은 롤르봉과 그림 속 인물들이 별반 다르지 않다느낀 듯 했다. 롤르봉본인이 쓴 글 에서 부활하겠지만 결국 멋진 삶을 연기하는 허구 섞인 위인이니까!


나중에 로캉탱이 에 대한 역사적 글쓰기를 관두고 다른 글을 쓰겠다고 다짐할 때, 나도 모르게 벅찬 감정을 느꼈다. 다른 존재를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던 수동적 사고를 주체적으로 변화시킨 로캉탱에게 깊은 애정을 느꼈다. 이 벅찬 감정은 타인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픈 나의 바램과도 닿아있었다.




독학자와 로캉탱

모험에 대한 새로운 정의


독학자는 모험을 동경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간다. 이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면서 누구보다 개성 강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도서관에서 그 많은 책을 알파벳 순으로 읽고,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휴머니스트인 '척'을 한다. 그리고 나름 반전이었던,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그의 불미스러운 사건! 독학자는 날 것의 욕망은 감춘 채 '있어 보이고' 싶어하는 가식적인 지식인의 이중성을 잘 보여준다.


책에 더 빠져들게 된 부분 중 하나가 독학자가 로캉탱에게 '모험'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대목이었다. 그 뒤로 로캉탱이 모험에 대한 생각을 막 펼쳐놓는데 그 구간이 흥미로웠다. 덕분에 '구토' 뿐만 아니라 '모험'이라는 단어를 재정의할 수 있었고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해석했을 때, 로캉탱이 말하는 '모험'은 예기치 못한 특별한 감정의 시작과 끝, 그 사이의 여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험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어떤 '굉장한 사건'이 필요한 게 아니라 '뭔가가 일어나고 있어!'라고 느끼는 감정의 시작점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감정이 사그라들면 그때야 비로소 하나의 모험이 남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작은 배낭 하나만 들고 세계여행을 다녀왔어. 엄청난 에피소드들이 쌓였지!"와 같이 누가 봐도 대단한 일만 모험이 아니라 "그 재즈곡은 도입부터 미쳤어!"와 같이 감정을 동요하게 만드는 3분짜리 재즈곡을 듣는 순간도 모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저 흘러가는, 끝이 날 것을 알기에 더 아쉬운 여정이라면 그 어떤 순간도 다 모험이 될 수 있다.  


p.96-97
무언가가 시작되는 것은 끝나기 위해서다. 모험은 한정 없이 늘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죽어야만 의미를 갖는다. (중략)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가 딱 하고 부러져버린다. 모험이 끝나고, 시간은 그 일상적인 느슨함을 되찾는다. 고개를 돌려보면, 내 뒤에서 선율 같은 저 아름다운 형태가 온통 과거에 잠겨 들고 있다. 그것은 줄어들고, 힘을 잃으며 쪼그라들고, 이제 끝은 시작과 하나가 된다.




안니와 로캉탱

그들의 모험 같은 사랑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안니에 대한 로캉탱의 사랑이었다. 모든 대상과 필요 이상의 거리를 두는 그가 유일하게 거리를 두지 않는 안니. 타인에겐 지나치게 적대적이고 염세적인 그가 유일하게 안니 앞에서 긴장하고 작아진다. 그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인걸까?


안니와 로캉탱이 아주 오랜만에 만나 한참 얘기를 나누는데 안니가 이런 말을 건넨다.


p.349
"그거 알아? 우리가 모험가 놀이를 하고 있을 때, 자기는 일어나는 모험을 겪는 사람이었고 나는 모험을 일어나게 하는 사람이었어. 나는 '난 행동하는 인간이야'라고 말하곤 했지. 기억이 나? 자, 이제 난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어. 우리는 행동하는 인간이 될 수 없어."


여기서 로캉탱이 왜 안니를 사랑하게 됐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안니는 사람 자체가 '모험'인 인물이었고 로캉탱은 그녀를 통해 모험을 경험하는데, 이건 그의 사랑과 그리움을 증폭시키는 큰 이유가 되었다. 안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걸 로캉탱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내 덕에 모험을 했다고!


이런 거침없는 모험형(?) 안니에게 필요한 건 당연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이정표였을 것이고, 그래서 안니는 로캉탱에게 당신이 내 이정표였다고도 고백한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세드앤딩. 안니는 더 이상 행동하는 삶을 포기하고, 로캉탱은 그런 안니에게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서로가 사랑했던 건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서로라는 걸 깨닫는다.


둘이 주고받는 대화를 보면서 사르트르와 그의 아내였던 보부아르가 떠올랐는데, 사람이 나누던 대화의 결도 어느 정도 반영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다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로캉탱은 사르트르의 페르소나, 안니는 보부아르의 페르소나가 아니었을까?




더 떠들고 싶은 이야기


실존주의 - 인간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사유

이 책은 사르트르가 서른셋이었던 1983년 출간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하는 사유는 결국 비슷하다는 걸 읽는 내내 느꼈다. 분명 시대적 상황과 환경은 크게 다르지만 '살아가는 존재'라는 본질이 같아서인지 우리는 결국 '나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하는 물음에 본능적으로 답을 찾으려고 애쓰게 된다. '구토' 덕분에 실존주의에 대한 흥미가 더 깊어진 것도 반가운 일이었다.


이제 구토를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예전에 어떤 강의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김춘수가 쓴 '꽃'이라는 시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한 말이었는데, 어떤 현상도 이름이 붙여졌을 때 생명력을 갖는다는 말이었다. 그동안 내가 느끼던 이름 없던 감각반응도 '구토'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이제 나는 분명하게 알아차릴 것이다. '아, 지금 내가 구토를 느끼고 있구나!'라고. 이제 이 책을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가는 건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특별한 사랑방식

사르트르의 평생 짝이었던 보부아르에게도 관심이 간다. 두 사람은 사랑을 둘만의 전유물로 여기지 않고, 각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해도 그것을 이해하는 관계였다고 한다. 나라면 정말 허락할 수 없는 일이라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의문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생을 마무리하는 순간까지 서로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표현했다. 두 사람을 모두 다룬 책인 '사르트르 VS 보부아르'에도 흥미가 가는데 한번 읽어 볼 생각이다.






이제 진짜 마무리. '구토'를 읽는 내내 로캉탱에게서 나를 보았다. 어느 순간에는 로캉탱인지 나인지도 헷갈릴 정도로 빠져들었다. 몰입의 시간이 끝나서 아쉬운 책이지만 로캉탱의 앞날을 응원하는 마음을 스스로에 대한 응원으로 이어갈 생각이다. 내게도 '머지 않은 날' 찾아올 '모험' 같은 사건들을 꿈꾸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