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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문영 Jan 05. 2019

“각자”의 “가슴”으로 듣는 음악

광주인디뮤직페스티벌과 가슴네트워크에 대해

※들어가기 전에...


1. 이 글은 2008년에 작성 된 글이다.

2. 이 글은 2009년에 발행된 『비평, 나쁘게 말하다』에 수록된 글이다. 2008년 다원예술로 선정된 사업들을 비평적 틀로 분석하려는 책이었다. 



광주인디뮤직페스티벌과 가슴네트워크 

두 사업의 공통된 분모는 바로 다수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진행하는 사업이 아니라 개인 혹은 두 세명의 사람들이 주도하는 사업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두 사업 모두 개인의 뜻이 가장 잘 관철될 수 있는 형태로 꾸며지게 되었다.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이것의 정당성 여부를 언급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서로 뜻이 맞는 사람들이 적은가, 정도의 생각은 든다. 다만 이들은 천편일률적 삶의 형태를 벗어난 사람들이다. 더 많아져야 한다. 

광주인디뮤직페스티벌(이하 『광인뮤페』) 

나는 이전에 광주에 한번도 가 본적이 없었다. 광천터미널 근처에 도착했을 때 버스 안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고속도로 방호벽 너머에는 끝을 알 수 없게 아파트가 줄지어 서 있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뭐가 이리 서울과 똑같나”

-서울 촌놈 전문영의 광주 기행기 中-[1] 

1969년 여름 다니엘 드죄즈, 베르나르 파제, 파트리크 세이투르, 클로드 비알라가 조직한 전시회가 통상적인 유통망을 거부하고 미디 지방의 작은 마을 코아라즈에서 열린다. 당시에는 절대적이었던 파리의 전시장을 벗어나 이 지중해 지방의 거리를 택한 이들의 의도에는 분명한 혁명적 의지가 깔려있다. 즉 수도권 중심의 문화 집중을 지역으로 분산함으로써 지역의 문화소외 현상을 최소화하려는 문화의 탈집중화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이 전시회 동안 거리 곳곳에는 캔버스가 깃발처럼 걸리고 현장에서 구한 나무, 돌, 심지어 금속 하수관으로 제작된 조각품들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전시방식과 오브제의 선택은 그동안 미술관이 유일하고 희귀한 오브제를 보관해야 한다는 이유로 줄곧 거부해 온 일상의 미학을 실천한 것이며 동시에 미술의 생활화를 구현해낸 가히 혁명적인 시도였다.

269-270p

『68, 세계를 바꾼 문화혁명』中[2] 

수도권은 다른 도시들과 공존 공생을 바라지 않는다. 마치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 한계치를 시험하듯이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인구가 수백 수십만 쯤 되는 다른 도시들은 다소 의기소침해진 채로, 그저 제2의 서울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아파트는 그 욕망을 가장 시각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 서울이 아파트 붐을 일으킨 후 지방 도시들도 속속 아파트를 짓고 있다. 마치 아파트는 한국적 도시화의 상징인 듯하다. 한국인은 현재 아파트를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편하다고 생각한다.

발레리 줄레조의 저서 『아파트 공화국』에는, 이삼십년 전 한국인들이 아파트에 대해 그리 좋지 못한 인식을 가졌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기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건설사마다, 브랜드마다 조금씩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한정된 공간에 동일한 구조의 방을 수백, 수천 개씩 찍어 공급하는 아파트가 좋을 게 뭐 있겠는가. 가격이 싸다는 것 외에.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부자고 가난한 사람이고 할 것 없이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한다.[3] 한치의 의구심도 없이. 지금도 이런 욕망을 좇아 각 지방도시와 신도시에서 속속 짓고 있는 아파트들을 보면 이건 마치 사회주의 국가에서 체제선전을 위해 단기간에 수많은 가구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뚝딱 찍어내는 것 같다. 오늘날 우리에게 아파트는 거주의 수단이라기보다는 돈을 불려내는 도구로 전락했다. 이제 더 이상 아파트는 주택보다 매력적인 가격이 아니다.

수백만 가구 사람들 개개의 취향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반영될 수 없는) 아파트들은 모든 대중문화 향유를 텔레비전에 의지하는 문화맹[4]들과 닮은꼴이다. 그리고 그 문화맹들은 현재 우리가 아파트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 인식들이 점점 사라져 간 것처럼 어느새 한국인 평균의 모습이 되어있다. 평균적 한국인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이제 좀 살만해졌으니[5]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봐야 될 때가 아니냐고 말해 봐도 사치스러운 소리하지 말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반복되는 공부, 공부, 공부, 취업, 승진… 한국의 직업 수는 수만 개가 넘는다는데 자녀들을 교육하는 부모의 머리에 들어있는 직업들은 10개 내외가 고작이다. 검사, 판사, 의사, 공무원, 교수… 편견은 대물림된다.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 갑갑한 세상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음악은 이 상상력을 도와줄 수 있는 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음악, 그중에서도 인디independent음악은 말 그대로 독립음악을 지칭한다. 인디음악의 틀에서 뮤지션들은 자본의 지원과 마케팅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음악적 취향을 모색 한다. 인디라는 단어와 지금부터 언급할 지역 자생성이라는 단어는 서로 통한다. 사회가, 미디어가, 국가가 개인에게, 지역에 강제하는 가치에 휩쓸리지 말고 각자의 방식으로 음악을, 삶을 기획해보자는 것이다. 『광주인디뮤직페스티벌』은 이름에서 드러나듯 이런 인디 개념과 광주의 지역성을 동시에 결합시켰다.

광주엔 두 번 갔다. 지역성에 주목하는 만큼 한 번 내려가는 것으론 충분치 않으리라는 비평풀 내부의 판단 때문이었다. 처음에 가서는 『광주팝뮤직페스티벌』(이하 『팝뮤직』)을 관람했고 두 번째 내려갈 때 『광인뮤페』를 관람했다. 두 공연 모두 남유진 씨가 감독했다. 『광인뮤페』는 2004년부터 자비로 계속해오고 있는 공연행사다.

『팝뮤직』 공연은 광천터미널 뒤편의 유스퀘어 광장에서 정오부터 시작했다. 제 시각에 도착하지 못했던 탓에 5시부터 관람을 시작했다. 장소가 터미널이니만치 많은 사람들이 몰리리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오랫동안 공연을 관람하지 않았다. 「피아」, 「두번째 달」, 「이장혁」, 「브로콜리너마저」, 「훌리건」, 「락타이거즈」 등의 인디뮤지션들과 「윈디켓」 같은 지역밴드 등 『팝뮤직』은 출중한 라인업을 자랑했으나 그에 반해 시민들의 반응은 어쩐지 시큰둥했다. 서울에서 열었다면 천명을 족히 넘길만한 라인업이었음에도 계속해서 지켜보는 시민들은 100명을 조금 넘길까 말까했다.

밴드공연은 관객들이 무대를 바라보며 서서 몸을 흔들며 관람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런데 『팝뮤직』에서는 앉아서 관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중에 남유진 씨에게 물어보니 광주에선 아직 스텐딩 문화가 보편화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화적 간극이 서울과 몇 년씩 차이가 난다고 했다. 2008년 광주청소년음악페스티벌 감독을 맡은『가슴네트워크』 박준흠씨도 공감했던 말이다.

공연 내용은 좋았지만, 내내 산만한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공연을 보기보다는 공연을 멀찍이서 흘겨보다 발길을 돌리는 시민들이 대다수였다. 다소 편중된 관중들의 반응도 눈에 띄었다. 어느 정도 공중파를 탄 『슈퍼키즈』, 『다이나믹 듀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으나 나머지 밴드들의 반응은 그에 못 미쳤다.[6] 내가 가장 주목한 밴드는 광주에서 활동하는 「윈디캣」이었는데, 라이브 실력이 웬만한 인디 밴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공연이 끝나고 그들[7]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공연수입이 별로 되지 않기 때문에 밴드활동 외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는 「윈디캣」 뿐만 아니라 광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밴드 모두 비슷한 형편이라고 답했다.[8] 홍대나 기타 서울 쪽으로 가면 사정이 나아지지 않겠느냐는 내 말에 광주에서 활동하다가 이따금 다른 곳에서 공연할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광주를 떠나서는 밴드활동을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들은 자신의 밴드와 광주라는 지역이 어떻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잘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머지 공연들을 감상한 뒤에 남유진 씨와 술을 가운데 놓고 이야기를 했다. 후일 『광인뮤페』에서 잔잔한 기타 선율을 선보일 오영묵씨가 뒤따라 들어와 합석을 했는데 그는 광주에서 진행되는 행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일침을 놓았다. “관에서 진행하는 이벤트들은 광주라는 지역의 예술 자생성을 생각하지 않는다. 서울에서 인원이 몰려와서 행사가 끝나면 죽 빠져나가는 식이다. 분재를 한시적으로 심었다가 다시 뽑아가는 격이다. 광주에서 행사를 진행하면 광주의 인원과 인프라를(어설프더라도)이용하고 지속적으로 운영해야 하는데, 성과주의에 집착하는 공무원이 그때그때의 행사에 집착할 뿐 광주에서 행사를 진행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려 하지 않는다.” 광주가 고향인 지인 몇몇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은 광주가 문화도시라는 후광을 가지고는 있지만 대부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예술의 기운을 바란다기보다 학교나 기타 사람들이 '동원'되어 예술행사에 투입된다는 것이다. 한숨이 나올 만도 했다.

11월 15일 전남대학교 대강당에서 『광인뮤페』가 열렸다. 「무경계뮤직환타지」[9]와 「변방의 노래」[10]라는 구도로 라인업이 구성됐는데, 전자가 서울, 홍대 등지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이라면 후자는 광주밴드 위주의 지역밴드들로 짜여졌다. 장소 선정과정에서 조금 문제가 있었는데, 2007년 당시 보안업체측이 공연도중 대강당의 전원을 끊어버리는 사태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장소를 선정하려고 했지만 기타 제반 사정 때문에 다시 전남대 대강당에서 공연을 진행하게 됐다. 불행하게도 2008년에도 또 전기는 끊어지고 말았다. 마땅한 장소 찾기가 힘든 까닭은 비용문제가 가장 크지만 혼자서 거의 모든 업무를 부담하는 남유진 씨의 과다한 업무부담 때문이기도 하다. 저렴한 가격으로 『광인뮤페』 같은 음악전용행사를 진행할 공간 자체가 광주 내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공연 현장에서 지역밴드는 서울 지역 밴드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동맥경화」, 「수시아 블루」의 경우 정말 압도적인 실력을 엿볼 수 있었다. 왜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을까 궁금할 정도로. 나로서는 「윈디켓」과 더불어 지역밴드를 새롭게 재발견 한 셈이다. 기실 『광인뮤페』가 의도하는 것도 그런 것일 터였다. 지역에서 실력이 출중한 밴드가 많아진다면, 혹은 각자의 독자성이 지역과 맞물려 음악으로서 표출될 수 있다면, 그들을 보러 다른 지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 수 있다면, 그로 인해 지역 인프라가 쌓이고 지속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지역자생성일 테다. 나는 그렇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물론 아직은 요원한 일이다. 문제도 많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광주에 그리 많지 않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문화도시 광주의 “문화”자(字)에 쌓인 먼지를 쓸쓸히 털고 있는 것은 한줌의 사람밖에는 없다. 

가슴네트워크(이하 가슴) 

『가슴』은 아직까지는 박준흠 씨가 운영을 전담하고 있는 음악평론 매체라고 말해야 정확하다. 그동안 가슴필자들의 글과 박준흠씨의 글과 기획들이 주로 노출되었다. 지금은 홈페이지 3차 리뉴얼을 끝내고 변신을 위해 재정비중이다. 재정비가 끝나면 문화예술 전반에 관련한 콘텐츠가 아마추어적 혹은 전문적 시선으로 담기게 될 것이다.[11]

사실 이 사업을 이야기하기는 『광인뮤페』보다 난감한 측면이 있다. 비평풀에 들어온 시기가 2008년 4월 중순쯤인데 그 때부터 2008년 12중순까지 『가슴』은 거의 침묵 상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음악평론이 현실적인 판매량에 별 영향을 끼지지 못하게 된 요즘에 있어서는 객관적으로 『가슴』의 영향력이나 효용을 판별할 기준도 없다. 확연하게 성과가 드러난 작업은 박준흠씨의 저서와 가슴과 연동해서 혹은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기획 프로젝트인데, 이 글은 박준흠 개인을 소개하기 위한 글이 아니므로 그런 것을 다루기에는 좀 문제가 있다. 결국 가슴의 대략적인 소개와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미흡한 부분을 벌충하고자 한다.

박준흠씨의 말에 따르면 2007년 말 완성된 홈페이지는 애초에 의도에 부합하지 않은 상태였고 그동안 시스템을 다시 정비하느라 거의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2009년 1월) 3차 리뉴얼이 끝나고 게시물들이 활발하게 올라오기 시작하는 중인데, 아직까지는 그동안 가슴싸이트에 올라왔던 글들과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누구나 글을 올릴 수 있었던 종전의 방식과는 다르게 지금은 박준흠 씨가 승인을 해주어야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인 필자네트워크가 새로 생겼다. 기본 골격자체는 별로 달라 보이지 않으나, 이전에는 모든 편집과 운영을 박준흠씨가 감당해야 했었다면 지금은 필자 각자의 블로그에서 글을 가져와 가슴사이트에 실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전에는 필자가 열 명만 되어도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수백명이 필자가 되어도 감당할 수 있다고 한다.

가슴 네트워크의 큰 카테고리는 다음과 같다. 「필자네트워크」, 「홍보」, 「웹진가슴」, 「대중음악DB」, 「공연정보」, 「가슴네트워크총서」(도서 출판을 연동 된 카테고리), 「문화기획자그룹」

『가슴』과 『광인뮤페』는(좀 더 정확히는 박준흠씨와 남유진씨) 인디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인디음악 자체에 주목하는 남유진씨와는 달리 박준흠씨는 인디음악을 대중음악 카테고리로 가져가려하고 또 대중음악을 문화예술전반의 틀로 이야기해야 효율적이라고 믿는다. 이것에 대해서 호불호를 가릴 수는 있겠지만 무엇이 옳으냐하고 물을 수는 없겠다. 『가슴』은 『가슴』의 길이 있고 『광인뮤페』는 『광인뮤페』가 추구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앞으로 다수의 필자가 활동한다고 하나 가슴이 다루려는 문화예술전반이라는 개념이 너무 포괄적인 개념이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은 든다. 홈페이지 성격을 특화하는 것이 사이트의 특성을 살리는 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가슴』은 그동안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에 오게 되었다. 앞으로 『가슴』의 건투를 빈다. 

노래, 음악이라… 

처음 음반을 샀던 때가 기억난다. 당시 나는 대중음악을 혐오했었다.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이 교실에서 난리법석을 피우며 인기가요를 불렀다. 나는 그들이 부르는 그 노래에 그들에 대한 혐오를 덧씌웠다. 때문에 나는 텔레비전에서 어떤 노래가 흘러나와도 시끄럽다고 귀를 틀어막고 살았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였나, 친구네 집에서 처음 「조규찬 5집」을 들었다. 독특한 느낌이 드는, 듣기 좋은 노래들이었다. 바로 그의 음반을 샀다. 조규찬을 시작으로 음반을 사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듣고 노래의 주인공을 필사적으로 찾으려 했던 「언니네이발관」 음반도 곧 가지게 되었다. 그 음악들이 없었다면 무료한 수험생활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어떻게 남들과 좀 다르게 살 마음을 먹었을까.

대학에 들어가서, 나를 괴롭혔던 이들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90년대 대중음악을 듣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당시 음악들을 지금 곰곰이 씹어보면 신기하다. 지금의 기준에서 '인디'라고 불릴만한 성향의 음악들이 버젓이 한국주류음악계에서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실험들이 주류 음악계에 받아들여졌었다. 당시의 음악에는 독자성과 음악성과 대중성 세 가지 모두를 놓치려하지 않았던 분투가 느껴진다. 왜 지금은 그런 기운들이 사라졌을까?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 많지 않은 음반을 사 모으게 된 지금도 어렸을 때와 비근하게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지 않는다. 그곳에는 천편일률적인 현란한 춤과 리듬과 발성이 있지만 뚜렷한 독자성에 수반되는 다양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독특한 음악들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오천만 명 각각의 취향에 복무하는 음악들이 좀 더 쉽게 대중에게 접해졌으면 한다. 부조리한 사회의 면면에 반항하고 비판하는 음악이 서서히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으면 좋겠다. 어두운 아래(under ground)에 존재하던 그들의 음악이 밝은 곳으로 드러났으면 좋겠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고, 이런 관점에서 음악에 관련된 두 사업[12](『광주인디뮤직페스티벌』, 『가슴네트워크』을 볼 수밖에 없었다. 편향된 관점인가? 그리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음악을 좀 들었다 싶은 사람들은 누구나 당위로써 말하는 문제일 뿐이다. 


      

[1] 거짓말이다. 그런 책이 있을 턱이 있나.

[2] 이건 절판됐지만 실존하는 책이다.

[3] 가난한 이들은 임대아파트, 부자인 자들은 캐슬류의 주상복합아파트.

[4] 필자의 자의적 조어다. “단지” 텔레비전에서 송출하는 문화만을 즐기는 행위를 비꼰 것이다. 텔레비전은 대중의 욕구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모양새를 보이나 대체적으로 스스로 욕구를 창출하여 대중의 무의식에 개입한다. 그리하여 개인들은 다양한 사회경험을 통한 스스로의 직관으로써 삶의 모양새를 꾸며나가지 못하게 되어 텔레비전에서 설파하는 가치에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삶을 재단하게 된다. 이 관점은 프랑크프르트 학파의 이론을 빌렸다.

[5] 한국전쟁 20년 전후와 상대적으로 비교해 말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 돈을 열심히 벌려는 이유는 남들 앞에서 번듯하기 위해서 이다. 자살 소식은 들릴지언정 이제 누군가가 굶어죽었다는 소식은 잘 들리지 않는다.

[6] 물론 무대매너와 음악 에너지의 차이도 결부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슈퍼키드」, 「다이나믹 듀오」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은(물론 출중한 실력이었지만) 과연 '공중파'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7] 두 분이었다. 주로 리더인 오영석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멤버 중 한분이 얼마전 탈퇴했다고 했다.

[8] 10여 밴드 정도가 광주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한다.

[9] 라인업- 그때 그사람들 : 「허클베리핀」(2004), 「오부라더스」(2004,2005), 「훌리건」(2004,2007), 뮤직 환타지 : 「크라잉넛」, 「스키조」, 「갤럭시익스프레스」, 「고고스타」, 「루네」, 「펑카프릭부스터」, 「윈디펑보이즈」

클럽빵 우정출연진 : 「오리엔탈루시」, 「더플라스틱데이」, 「굴소년단」(불참)

[10] 라인업- 빛의 공화국 : 「베티애스」, 「윈디캣」, 「수트케이스」, 「더티라콘」, 「나비밴드」, 「한보리」, 「수시아블루」, 「동맥경화」 변방의 노래 : 「하우스보트」

[11] http://www.gaseum.com/ 사이트 메인화면을 보면 어떤 방향으로 이 사이트가 나아가려는지 짐작할 수 있다.

[12] 이 단어에 대해서 좀 망설였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예술이라는 단어와 매치되기는 좀 무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사업”이라고 지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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