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문영 Jan 05. 2019

다원예술?

#이 글은 2009년 발간된 『비평, 나쁘게 말하다』에 수록된 글입니다


2008년 4월 중순 우린(다원예술매개공간 현장비평풀, 이하 비평풀) 다원예술 현장을 비평하기 위해 모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원예술에 대해서 누구도 뚜렷한 정의를 알고 있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흠, 다원예술이란 게 대체 뭘까? 사전에도 그 뜻이 나와 있지 않았다. 다원1과 예술2이 따로 떨어져 담겨있을 뿐. ‘다원예술’이란 정체불명의 것……. 네 정체는 대체 뭐냐! 수번의 워크샵을 통해서도 이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비평풀만 몰랐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음의 단어들을 읊어볼까.

예술형식의 실험(탈장르, 장르해체, 복합장르, 매체융합, 대매체예술, 실험, 다른, 소통매개방식), 가치의 다원성(다양한 가치, 지역성, 다중성, 종다양성, 다문화주의, 문화다양성, 문화다원주의), 개방성과 소통(일방적이지 않은, 소통적, 참여적, 열린, 과정 중인, 등) 새로운 예술(새로운 형식, 신개념, 자유로운, 진보적인, 미래지향성), 삶과 밀착된(일상예술, 생활 속 예술), 무규정성(정해지지 않은, 유동적, 부유하는, 등), 젊은(부상하는, 젊은, 성장 중인, 잠재적인), 저항(저항성, 언더그라운드, 게릴라, 반주류), 탈제도(비주류, 주변부, 소수자 문화) 독립성(비상업적, 저예산주의, 자생적, 자발성, 독립적) 대중성(대중적, 반엘리트적), 상대적(상대적, 대안적)……

어휴 숨차다. 이 단어들은 2006년 12월에 작성된 『다원예술정책수립을 위한 기초연구』에서 발췌했다. 다원예술지원 정책을 입안하는 측에서 조사를 의뢰해 만든 자료다. 그래, ‘다원예술’은 아직 구체적으로 기능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정책을 입안하는 쪽도 정확한 개념을 알지 못해 오락가락하는 판에 비평풀이라고, 나라고 어떻게 구체적인 개념으로 ‘다원예술’에 접근했겠는가. 전문비평가도 아닌 우리는 일차적으로 예술 애호가에 불과했다. 그래서 경험이 중요했다. 경험이 있어야 대충 무엇이라도 정의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비평풀에 들어온 지 수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조금이나마 다원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사업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지금에서야 나는 말한다. ‘다원예술’의 뜻을 규정하는 것보다 그 이름으로 지원되는 사업들을 내 재미와 욕망의 기준으로 점검해야 한다고. 뭐야, 이래서야 그냥 예술과 다를 게 없잖아! 그래, 내게 다원예술은 결국 ‘그냥 예술’이었다. 그렇게 접근해야 했다. 어쭙잖은 개념을 만들 수 없었다. 만들어봐야 소용없었다.

다원예술이란 단어는 근대 이후 출현한 수많은 일본 음차어 번역어들처럼 필요에 의해 만들어(번역되어)졌다. 그간의 제도권 예술지원에서 포착하지 못한 개념이나 사업들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에게 널리 쓰이거나 학자들에 의해 점점 구체성을 띠게 된다면 '다원예술'이란 용어는 살아남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요원하지만. 


다른 것 


앞서 다원예술을 바라보는 내 관점을 이야기했다. 나는 다원예술을 그냥 예술로 본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내 욕망으로 바라 본 예술을 이야기할 차례다. 그렇지만 내가 책임비평에서 언급한 사업들이나 정책 쪽에서 지원한 사업들과는 매우 다른 맥락의''3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자율비평이니만큼 정말 말하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다원예술이라는 단어는 단지 말을 시작하기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장 통속적으로 기능하는 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내 말이 당신에게 기능할 수 있는 부분인 까닭이다. 예술에 대한 전문적 맥락들을 일부러 내 이야기에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담론들을 지금껏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다는 개인의 능력부족으로 인해 담론들을 효과적으로 글에 담지 못할 것이란 한계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이야기하려는 이 사실 이런 전문적 시각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내가 내리는 정의들이 독단적이고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편협한 경험으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한계를 인지하고 나는 이야기한다. 부족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이야기할 것이고, 모순이 가득할지 모르는 내 주장과 이야기들은 적어도 2009년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분명하게 체감한 에의 접근이므로 의미가 있을 것이라 본다.

일단 그 을 큰 돈을 쓰지 않고 삶에 위안을 주고 무의식중에 삶에 가치관에 영향을 주는 활동, 작품으로 가치규정을 내린다. 내 경험에 따르면 위의 규정에 훌륭히 복무하는 이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음악, 책(only text)[4]이다. 이것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문적 지식도 필요 없다. 그저 그것을 하면(do it!)된다. 지금부터 한 학생의 몇 가지 에피소드를 말함으로써 각 이 구체적으로 기능하는 순간을 말할 것이다. 다소 생뚱맞다고, 왜 이렇게 글을 쓰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할 독자도 있겠다. 사실, 나도 약간 마찬가지의 심정이다. 


책 


중학생이다. 그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그에겐 뭔가 집중할 것이 필요하다. 구태여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될 무언가. 책을 선택한다. 이전의 그에게 독서는 단지 소일거리에 불과했다. 이제 책을 꺼내드는 행위는 그에게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 그것엔 좋은 점이 몇 가지 있다. 일단 책에 눈을 돌리고 있으면 다른 이들이 귀찮게 굴지 않는다. 평소에 그들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 머리를 툭툭 치거나 굴욕적인 장난을 종용했다. 그들이 한 인간에게 그렇게 대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뚱뚱하고 소심한 성격이라는 것. 나 좀 귀찮게 굴지 말아줘.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고 싶어. 이윽고 그는 서랍에서 책을 하나 꺼낸다. 그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매개물이다. 하나의 자부심이다. 남들이 그를 함부로 볼 수 없게 하는 도구다. 누군가 괴롭힌다는 것은 책을 본다는 행위에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누구와의 관계에도 기대감을 갖지 않게 하고 오로지 읽는 행위에 집중시킨다. 읽는 동안에 그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고 무엇도 인지하지 못한다. 그를 괴롭히려 하는 누군가 다가와 그에게 뭐라고 하지만 그는 듣는지 안 듣는지 알 수 없다. 화가 난 그놈이 책을 빼앗아 든다. 책장이 찢어진다. 그는 자신이 싸움을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화가 난다. 덤비면 필패하리라는 사실을 알지만 덤비고 싶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책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당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것으로써 보이고 싶다. 그는 눈을 치켜뜨고 녀석을 바라본다. 녀석은 “뭐 어쩔건데? 시발아”라는 눈깔로 그를 내려다본다. 잠시 뒤 녀석은 조금 망설이다가 내던지듯이 그에게 책을 돌려주고는 다른 놈과 발랄하게 지껄이며 그의 곁을 떠난다. 그는 책장이 찢긴 책을 펼쳐본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활자들을 읽으며 이상한 흥분에 휩싸인다. 


게임 


그가 처음 컴퓨터를 가진 때는 초등학교 3학년 때다. 그에게 컴퓨터란 게임을 구동할 수 있는 기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반 아이들이 모두 그것을 가지고 있어. 나만 없단 말야. 게임? 그거는 잘 모르겠고 공부를 할 수 있어. 그것을 가진 아이들은 모두 성적이 높아.”

대체 컴퓨터를 가진 것과 성적이 높은 것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그럴듯하게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어머니는 단칸방 살림에 300만원(1995년) 들여 컴퓨터를 샀다. 공부는 무슨. 그가 처음 하게 된 게임은 『삼국지 영걸전』이었다. 그 게임은 롤플레잉게임 roll playing game 이었고 이후 그는 『어스토니시아스토리』, 『창세기전2』등의 게임들을 섭렵해갔다. 현실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는 학교에서 별 재미를 못 느꼈다. 집에 돌아와 게임에 열중하며 거대한 무엇인가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사실 그래픽 뒤에 숨은 코드 덩어리에 휘둘리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꽉 짜인 수업을 마치고 학원마저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도대체 정을 붙일 일이 없었다. 현실의 삶이 왜 그렇게 재미가 없었을까. 나중에 그는 『동급생』이니 『미행2』이니 『인공소녀』니 하는 포르노 게임들로 현실에선 충족되지 못하는 성욕을 대리 충족하기도 한다. 온라인게임에 대해서 그는 할 말이 별로 없다. 팀플레이에 그는 항상 서툴다. 


음악 


책임비평 참고. 마지막 문단에서의 '나'를 '그'로 바꾸면 된다. 


만화, 애니메이션 


그는 어두운 방에서 멍하니 텔레비전을 바라본다. 브라운관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그의 얼굴을 다채롭게 수놓는다. 『쥐라기월드컵』, 『축구왕슛돌이』,『피구왕통키』,『머털도사』니 하는 작품들이 그의 얼굴을 수놓아갔고, 그것들을 보고 있는 순간, 그는 온전히 “재미” 속에 있었다. 완전히 재미 속에 온 몸을 담구었다는 말이다. 멀뚱멀뚱 선과 색이 그의 눈을 휘젓고 있는 것을 가만히 방임하고 있노라면 자신이 별 것 아니라는 허무감 자책감에서 조금은 빠져나올 수 있다. 단지 눈을 뜨고 무엇인가를 보고만 있는 데도 말이다. 얼마나 환상적인 마법인가? 


이제는 끝낼 때가 되었다 


계속 딴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실 간단하다. 위의 들은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학벌도 배경도 자본도 변변치 않은 한 버러지가 저것들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때에는 오롯이 하나의 인간이었다. 그래, 이제 다 까놓고 말하자, 계급얘기다. 기실 돈이 많다면 예술에 목매지 않아도 된다. 돈이 많은 자에겐 모든 기회가 널려 있다. 분명한 사실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대다수는 돈이 별로 없다는 얘기고 그들 대다수가 성취하지 못할 돈과 명예와 직업의 욕구로 삶을 탕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들에게 삶의 기쁨이란 잠시 잠깐 텔레비전을 시청하거나 책을 보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는 것뿐이다. 이들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접근성이 높은 들이다. 따분하게 가르치려고 들지만 않는다면 한 작품의 감동을 통해 한 인간의 가치관을 구성하고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것들이다. 이런 들을 통해서 다들 좀 인생을 맘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공부할 사람은 공부하고 취업할 사람은 취업하고 연애할 사람은 연애하고 그림 그릴 사람은 그림 그리고 담배 피울 사람은 담배 피우고 싸움할 사람은 싸움하고 영화보고 만들고 싶은 사람은 영화보고 만들고 만화 보고 그리고 싶은 사람은 만화 보고 그리고 책보고 쓰고 싶은 사람은 책 보고 쓰고 그리고 그러고도, 적당한 각자의 인생들을 영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취업이라는. 돈이라는 모두가 함께 가질 수 없는 가치에 매몰된 삶이 아닌 스스로의 개성적인 삶의 기획으로도 다들 그럭저럭 살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1 多元, 근원이 많음. 또는 그 근원

2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 공간 예술, 시간 예술, 종합 예술 따위로 나눌 수 있다.

3 나는 이것들을 예술로 판단하지만 내 개념은 너무 포괄적이고 엄밀하지 않다. 내가 정의하는 예술과 기존의 예술이 혼동되기도 할 것이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내가 생각하는 예술을 담는 '것'은 굵은 글자로 표기할 것이다.

4 엄밀한 개념 구분을 짓지 않았다. 책과 관련된 모든 행위들이 예술에 속한다. 책을 읽는 것 책을 쓰는 것 책을 만드는 것 모든 책에 관한 활동들이 예술이다. 오해를 할 독자들을 위해 이야기를 해둔다.


작가의 이전글 “각자”의 “가슴”으로 듣는 음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