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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솜 Jun 12. 2019

가난한 아버지의 벌건 얼굴

김사인의 <비둘기호>, <기생충>, 그리고,

여섯살이어야 하는 나는 불안해 식은땀이 흘렀지.

도꾸리는 덥고 목은 따갑고

이가 움직이는지 어깻죽지가 가려웠다.


검표원들이 오고 아버지는 우겼네.

그들이 화를 내자 아버지는 사정했네. 

땟국 섞인 땀을 흘리며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나는 오줌이 찔끔 나왔네.

커다란 여섯살짜리를 사람들은 웃었네.


대전역 출찰구 옆에 벌세워졌네.

해는 저물어가고

기찻길 쪽에서 매운바람은 오고

억울한 일을 당한 얼굴로

아버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는 눈을 보냈네.

섧고 비참해 현기증이 다 났네.


아버지가 사무실로 불려간 뒤

아버지가 맞는 상상을 하며

찬 시멘트 벽에 기대어 나는 울었네.

발은 시리고 번화한 도회지 불빛이 더 차가웠네.


핼쑥해진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어두운 역사를 빠져나갔네.

밤길 오십리를 더 가야 했지.

아버지는 젊은 서른 여덟 막내아들 나는 홑 아홉살


인생이 그런 것인 줄 그때는 몰랐네.

설 쇠고 올라오던 경부선 상행.


<비둘기호> 김사인




가만히 눈을 감고 비둘기호에서 쫓겨난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본다. 도회지의 차가운 불빛을 등지고 아들 손을 잡은 채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앙상하게 굽은 어깨와 비척이는 다리는 그대로 땅속으로 꺼져 내릴 것만 같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분한 마음까지 더해져 얼굴은 점점 더 벌겋게 물든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나 같으면 안 그래" 중얼거린다. 명절에, 어린 아들놈까지 옆에 있는데 그렇게까지 면박을 줘야 했나. 사람들도 참 야속하지. 비웃고 무시하고. 그는 아홉 살 아들의 작은 손을 더 꽉 움켜쥐면서 "나 같으면 안 그래" 또 중얼거린다. 인생은 나 같지 않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란 걸, 서른여덟 아버지는 이날 또 한 번 깨달았을 테고 홑 아홉 살 아들은 너무 일찍 알아버렸을 테다.



영화 <기생충>의 아버지, 기택(송강호)의 얼굴은 영화 내내 유난히 벌겋게 상기돼있다. 아무리 능구렁이처럼 의연한 표정을 지어도 낯빛까지 지어낼 순 없다.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라곤 가난밖에 없다는 참담한 현실, 그 낭떠러지 끝에 서있는 사람.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가난 '때문에' 죄인이 된 가장의 얼굴. 우리들의 아버지. 그리고 내 아버지의 얼굴. 그렇다. 난 그 얼굴빛이 낯설지 않다. 


내 아버지는 술만 한잔 걸치면 자고 있는 나를 깨워 앉혀놓곤 '미안하다'고 했다. 좁은 집에 살아서, 학원을 못 보내서, 좋은 것을 사주지 못해서, 무능한 아빠라 미안하다고 했다. 단 한 번도 내입으로 뭘 갖고 싶다느니 한 적이 없었음에도, 그랬다. 아버지는 오히려 내가 당신에게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는 게 무섭다며 고개를 떨궜다. 


"뭐라고 불평이라도 좀 해라 임마..."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이제 어렴풋이 안다. 어린 딸 조차 일찌감치 체념한 가난과 그걸 알아차린 가장의 심정이란.


가난한 아버지의 얼굴은 벌겋다. 그 빛깔은 너무도 애처로워 차마 마주 볼 수 없어서 외면하고 싶어 진다. <기생충>을 보고 한동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눈물을 쏟았던 건, 아주 오랜만에 내 아버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 것 같아서였다. 


영화를 세 번이나 보고 나서야 알게 된 이 감정을 도저히 잘 적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김사인의 시를 붙여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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