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연락처를 정리했다. 2012년에 잠깐 다녔던 회사 동료 전화번호가 아직도 남아있는 걸 보니 거의 10년만 인가보다. 주소록에서 연락처를 지우고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업데이트하니 모르는 얼굴들이 싹 사라져서 쾌적하게 느껴졌다. 남아있는 익숙한 이름들을 주르륵 훑어보다가, 작년 11월 즈음 내게 절교를 선언한 고등학교 동창 H의 프로필 사진에서 손이 멈췄다. 예쁜 청첩장에 정갈하게 새겨진 낯익은 이름. 결혼식 날짜를 보니 6월 5일, 바로 내일이었다.
‘오후 3시, 상암이니까 오전에 기차 타고 서울역으로 가면 되겠다. 아침엔 쌀쌀할 텐데 스타킹을 신어야 할까. 아, 스타킹이 있던가?’
이런 생각이 멋대로 달음질치다가 우뚝 멈춰 섰다.
'초대도 못 받은 주제에'
머릿속이 멍 해졌다가 이내 더듬더듬 생각을 이어갔다.
'아니, 그래도, 가는 게 맞지 않나? 그래도, 친구였는데. 친구, 였는데...'
과거형 친구로 남은 내 처지가 초라해서 쓴 입이 다셔졌다. H에게 나는 그야말로 ‘불청객’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구나.
H가 내게(정확히는 나를 포함한 셋에게) 절교를 선언했을 때, 줄 바꿈도 없이 빽빽하게 쓰여진 장문의 카톡에는 단 한 줄의 분노도 비난도 없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생각 정리를 마친 듯 차분했다. H는 최근 인간관계에 대한 전환점이 있었고, 나를 포함한 셋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다는 걸 알았고, 자신이 겁쟁이라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카톡을 마지막으로 H는 단톡방을 나갔고 이후 몇 번에 개인톡에도 답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가 당황스럽고 슬펐지만, 난 H의 결심과 행동을 존중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이별할 용기는 존중받아 마땅하니까. 질척이지 않기로 했다.
나는 H가 나와의 절교로 한없이 후련해졌기를 바란다. 한 톨에 죄책감이나 아쉬움도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 오랜 시간 H는 항상 거기에 있겠거니 관성에 의한 관계에 일방적인 편안함을 느끼고, H만큼 노력하지 않은 건 분명히 나니까. 후회든 미련이든 뭐든, 남은 감정의 불순물은 모두 내 몫이다.
드디어 만난 인생의 반려자와 함께 만들어갈 H의 새로운 삶을 축복하며.
H, 부디 행복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