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가을. 어릴 때 잘하고 좋아했던 것들을 하면서 날 일깨우려 했다. 한때 전공을 하려고 했던 바이올린부터. 한 번쯤 전공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 것들.
죽기보단 이런 거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진짜로 죽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 때였다. 허무감과 자책감이 밀려들어와 완전히 날 휘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관 시술 때문일까(거의 맞다). 나를 위해 허무감과 자기 탐색에 대한 그동안의 감정일기를 써놓는다.
1. 바이올린
(과거)
바이올린은 내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악기이다. 소리가 들리면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피아노부터 시작했는데 청음테스트에서 절대음감이라는 평을 듣고(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바이올린으로 넘어갔다. 청음/ 음감 좋은 사람에겐 건반악기보다 현악기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바이올린을 전공하려 하기엔 좀 늦게 한 케이스였는데, 초2부터 초6까지 4년 조금 안 돼서, 스즈키 8권까지 빠르게 끝냈고, 다른 명곡들을 나갔다. 다른 사람보다 2-3배 정도의 빠른 진도라 들었다. 연습은 잘 안 해서 혼나기도 했는데, 안 좋아해서 연습을 잘 안 한 건 아니다.
엄마가 언젠가
"애기 때 다른 애들은 재롱잔치를 하면 연습도 하고, 피아노도 집에서도 쳐보고 하는데 너는 연습이라는 걸 안 하더라. 레슨만 끝나면 딱 쉬더라고. 진짜 특이하다 했어. 싫어하냐고 하면 좋아한다 그러더라고."라고 하셨는데,
음, 그냥 난 그때도 워라밸을 중시한 아이였나 보다;; 어느 수업이든지 수업시간엔 정말 잘 듣지만 연습, 숙제 이런 걸 잘 안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좋아한다'라고 하는 수준이 얕거나 감정에 비해 행동을 안 하는 거 같은데, 어쨌든 그게 나로선 좋아한 거다!
대회에 나가면 소질이 있다고 키워주고 싶다고 하신 음대 교수님들도 있었다(평소보다 실전에서 더 잘했다고도 한다). 교회 오케스트라는 행복하고 따뜻한 추억으로 남았다. 결혼식 축가 연주도 했었는데 아주 재밌었다.
보통 스즈키 책을 8권까지 끝내는 아이들 대부분은, 전공할 마음이 있는 경우가 많다. 취미로만 끝낼 경우는 4-5권, 많으면 6권에서 멈춘다. 지금은 달라졌다 싶어서 찾아봤더니 현재도 그런 거 같다. 악기를 들고 여기저기, 자세만 따로 배우러 다니기도 했는데, 생각해 보면 워킹맘 엄마한테 참 감사한 일이다.
진로 고민을 할 무렵에 음악과 인문계 중 고민하다가, 인문계로 결정했는데 나는 그 뒤부터 바이올린을 뚝 끊고 살았다. 그러다가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오케스트라 동아리에 잠깐 들어갔었는데, 또 곧 탈퇴했다. 라떼만 해도 동아리 합주 연주곡 수준은 좀 낮았었다.
그 뒤에 다시 또 손을 뗐고, 언젠가 해야지, 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나도 참.. 저 정도까지 배워놓고, 아예 손도 안 대다니. 핑계를 대자면 악기 가격 때문이다.
바이올린을 중간중간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 적이 있는데, 예전에 쓰던 건 처분했고(내가), 바이올린은 가격에 따라 소리가 너무 달라진다는 걸 알기에 아무 거나 살 수는 또 없었다. 30만 원, 300만 원, 3000만 원짜리들 다 만져봤을 때 소리가 너무너무 다른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에. 싼 악기는 깨갱 소리 장난이 아니다.
그렇다고 전공자용을 살 수도 없고 적당히 몇 백만 원짜리 사기에도 지금까지는 비용이 부담이 되었다.
(현재)
이번에 몇십 년 만에 다시 시작해 볼 맘이 생겼을 때도, 악기 때문에 고민이 됐다. 그런데 바이올린 대여가 되는 학원을 못 찾았다가, 딱 한 군데 찾았다. 프랜차이즈인데 올드 바이올린까지 구비돼 있는 곳이고, 집에서 30분 거리. 몇 달 하다가 사치품 가방 가격 정도의 악기는 그 뒤 구입하리라 큰 맘을 먹었다.
서론이 길었는데, 현재 나의 상태부터 이야기하자면 바이올린 한 달 하고 일단 쉬고 있고, 보류 중이다.
허허허.
배움 일지를 써보자면,
첫날은 자세만 잡는 데 시간 다 썼다. 목, 어깨, 손가락 등에 너무 힘을 줘서 몸 푸는 데만 1시간 걸렸다. 그리고 어릴 때 했던 스즈키 8권 악보를 보고는 뜨악했다. 내가 정말 이걸 했다고??? 이걸 그렇게 빨리 진도 나갔다고? 어릴 때 나 천재였네 ㅋㅋ
현재의 나는, 다시 활을 잡아보니까 그래도 스즈키 4권에 있는 <비발디 협주곡 가단조 1악장>은 할 수 있었다(유창하겐 아니고).
하긴 거의 몇십 년 만에 잡아보는 건데.
선생님과 합의를 해서, 그냥 처음부터 스즈키 1권부터 차근차근, 대신에 빠르게 나가기로 했다.
실제로 스즈키 1권을 이틀 만에 다 떼긴 했는데(처음 배우는 일반인들은 3-6개월 걸리는 듯),
여기서 회의가 드는 것이다.
1) 이 무렵 피아노도 같이 시작했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병원비 때문에 지금 돈이 없는데...
2) 나 예전에 배울 땐 선생님이 피아노 반주 해줬는데 여기 학원은 피아노가 없다. 피아노 반주해 주는 곳이면 좋은데...
3) 결정적으로 드는 생각은,
근데 이거 해서 뭐 하지? ㅋㅋㅋ
아기 낳고도 할 수 있나? (물론 뭔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거 해서 뭐 하지 하는 생각은 안 할 것이다. 그냥 내가 이 정도 사람이다.)
물론 오랜만에 설렜고 즐거웠다. 레슨 끝나고 혼자 스즈키 2,3,4권들 켜 보면서 그때의 기록들이 새록새록 나고, 어릴 때 정도의 감각을 다시 익히려면 얼마나 걸릴까 혼자 상상도 해보고.
그런데 청음 좋다는 장점은 어디다 써먹나? 절대음감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앞으로 바빠지면 다시 중간에 쉴 수밖에 없는데, 악기는 계속하지 않고 쉬면 감각이 전과 같지 않은데... 이렇게 현실적인 생각들이 꼬리를 물다가 일단 멈췄다.
사실 한 달 레슨도 오래 끌었다. 하필 중간에 계속 병원 날짜가 겹쳐서.
향수 악기라 언젠가 다시 시작할 거고, 어릴 때 했던 게 아까워서 할 건데, 일단은 보류하기로 했다. 이러다 다시 하러 갈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