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은 『오리엔탈리즘』이 일상에 남긴 질문들
지난 6월, 작업실 근처 철학서점에서 이진이 번역가와 함께 지혜학교, 우리는 문학을 모른다2 라는 이름으로 에드워드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강독을 시작했다. 함께 지식을 습득하고 나누는 활동에 관심이 있던 나는 다양한 관점의 목표가 있었다. 여유를 가지고 어려운 책 한 권을 도움 받아 읽어보자는 간편한 마음 하나와,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텍스트를 매개로 사람들과 어떻게 생각을 나눌 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열다섯 명 남짓의 참여자들과 발제 순서를 정하며 “11월이 언제 오려나” 했던 시간이 어느새 마지막 모임이 되었다.
오리엔탈리즘은 1978년 에드워드 사이드가 서구가 동양을 바라보는 방식을 비판하며 내놓은 개념이다.
서구가 동양을 실제 모습이 아닌 ‘상상된 이미지’로 규정하고, 그 이미지를 통해 우월성과 지배 구조를 정당화해온 과정을 짚는다. 중요한 것은 이 관점이 특정 시대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타자를 하나의 이미지로 재단하는 방식을 무심코 반복하고 있으며, 대중문화 속 논란 역시 이 틀 안에서 다시 읽힌다.
6개월 동안 나는 텍스트를 ‘읽는 법’을 다시 익혔다. 문장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배경과 궤적을 함께 따라가 보는 방식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각 챕터에서 다루는 내용을 뒷받침하는 책을 함께 읽었고, 그렇게 병렬 독서를 반복하다 보니 꽤 많은 책들을 훑을 수 있었다.
강독은 단지 텍스트를 해석하는 행위에 머물지 않았다. 텍스트가 만들어내는 프레임이 우리 삶의 의사결정과 시각 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지속적으로 점검했다. 강독의 결론은 “맥락을 확장하는 습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받은 과제는
각자 영상 매체든 활자 매체든 하나의 텍스트를 선택해
- 그 텍스트에 나타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비판하거나
- 그 텍스트를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지점을 분석한 글을
- 최대 A4 용지 1매 분량으로 정리해오기
그 질문을 메일로 받았을 때, 며칠 전 스친 기사가 떠올랐다.
https://sports.donga.com/ent/article/all/20251121/132807202/1
K-POP 혼성그룹의 한 아티스트가 화보에서 어두운 피부색으로 인해 블랙피싱(Blackfishing) 논란에 휩싸인 사례다. 맥락을 지우고 논란만 소비한 상황이어서 한번은 함께 나눠보고 싶은 내용이었다.
그날 함께 나눴던 글을 함께 나눈다.
논란의 옳고 그름을 확정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오늘의 일상에서 오리엔탈리즘이 어떤 방식으로 여전히 작동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다시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남기기 위함이다.
기사에서 다룬 핵심 쟁점은 피부색 표현의 의도성 여부, 문화 전유의 가능성, 그리고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기억이 해석에 미치는 영향이다. 탈식민주의적 읽기 관점에서 보면 텍스트를 다층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논의는 표현의 자유와 윤리적 책임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 나 역시 특정 사건이나 이미지를 단일한 해석으로 고정시키지 않는 훈련을 갖추게 되었다.
해당 K-POP 아티스트의 화보 속 어두운 피부색이라는 텍스트는 아티스트의 개인적인 미적 선택이나 유전적 특성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접한 일부 글로벌 유저들이 "아시아인이 저렇게 까무잡잡할 리 없다", "흑인처럼 보이려 연출했다"며 블랙피싱 문제를 제기한 지점은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 작동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고정관념을 통한 타자화: 사이드는 서구가 동양을 자신들의 틀에 맞춰 재단하고 고정관념을 부여했다고 지적한다. 이 논란에서 "아시아인은 하얗다"는 암묵적인 고정관념이 어두운 피부색이라는 텍스트와 충돌하며, 이를 '정상적이지 않은 것' 혹은 '의도된 것'으로 해석하게 만든다. 이는 '타자'에 대한 서구 중심적 고정관념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국적' 소비와 문화 전유: 블랙피싱 논란의 본질은 비흑인이 흑인의 외모적 특징을 '힙하고 이국적인' 것으로 소비하면서 흑인이 겪는 사회경제적 불이익이나 차별은 외면하는 '문화 전유(cultural appropriation)'에 있다. 아티스트의 의도가 순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유저들의 시선은 어두운 피부색을 흑인 문화와의 연결 고리로 인식하고 이를 '선택적 소비'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흑인 문화의 특정 요소가 '매력적인 타자'로 소비되는, 일종의 '문화적 오리엔탈리즘'으로 비판받는 지점이다.
이 논란은 단순히 피부색에 대한 선호를 넘어, 인종과 권력, 그리고 역사적 상흔이 얽힌 복합적인 텍스트로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분석될 수 있다.
블랙페이스의 망령: 논란의 배경에는 백인이 피부를 까맣게 칠해 흑인을 조롱했던 블랙페이스(Blackface)의 아픈 역사가 존재한다. 블랙페이스는 흑인을 열등하고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묘사하며 인종차별을 강화했던 강력한 상징이다. 불과 10여년 전 우리의 개그프로에도 얼굴을 검게 칠하거나, '깜둥이'라고 불리는 캐릭터가 아무렇지 않게 등장했었다.
해당 아티스트의 화보가 블랙페이스와 직접적인 의도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실제 흑인이 아닌 인종이 더 까맣게 보이도록 표현한 것' 자체가 서구권에서는 이 역사적 상처를 자극하는 민감한 지점으로 읽힐 수 있다. 이는 텍스트(화보)가 가진 표면적 의미를 넘어,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기억이 어떻게 현재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탈식민주의적 읽기의 중요한 지점이다.
피부색과 권력의 전이: 마이클 잭슨이 백반증으로 인해 피부색이 변했음에도 백인이 되려 했다는 오해를 받았던 사례는, 백인 중심 사회에서 흑인이 겪는 내부화된 오리엔탈리즘의 비극을 보여준다. 이 논란은 비흑인 아티스트의 어두운 피부색이 블랙피싱으로 해석될 때, 피부색이 단순한 미적 요소가 아니라 인종적 정체성, 역사적 고통, 그리고 문화적 권력 관계가 투영된 민감한 기표임을 드러낸다. 흑인들이 수세기 동안 피부색으로 인해 겪었던 차별과 고통의 역사가, 비흑인의 '피부색 연출'에 대한 민감한 반응으로 전이되는 탈식민주의적 현상이다.
'지나친 민감함'이나 '인종차별 프레임'에 대한 비판은 논의를 비약시킬 수 있다. 아티스트의 의도와 무관하게 논란이 발생한 것은, 글로벌 대중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있어 문화적 감수성과 역사적 맥락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준다. 아티스트의 개인적인 미적 선택이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특정 집단에게 역사적 상처나 모욕감을 줄 수 있는 문화적 표현과 겹쳐질 때는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K-POP 아티스트의 피부색 논란은 2025년 현재, 사이드가 경고했던 오리엔탈리즘이 어떻게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이 텍스트는 다양한 인종적, 문화적 경계 속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타자화'와 '문화 전유'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 사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탈식민주의적 질문을 던진다: 아티스트의 개인적인 미적 선택과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특정 집단의 역사적 고통과 문화적 자산과 겹쳐질 때 어떤 윤리적 책임을 지녀야 하는가? 해당 아티스트의 의도가 순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대중의 시선이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바탕으로 형성되며 의도치 않은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2025년, 우리는 글로벌 시대의 상호 연결성 속에서 문화적 감수성을 높여야 한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올바름'을 넘어, 각 문화가 지닌 고유한 역사와 맥락을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타인의 문화를 '이국적인 것'으로 소비하거나, '매력적인 트렌드'로 전유하기보다는, 그 문화가 지닌 깊이와 의미를 탐구하고,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고통에 공감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오리엔탈리즘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진정한 문화적 이해와 공존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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