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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냥 Aug 03. 2023

사랑은 네 길을 가라, 호을로 견딜 만하다.

김명순 에세이 '사랑은 무한대이외다'

1896년 조선에서 태어난 기생의 딸이 이런 시를 썼다.


온 하늘이 그에게 호령하다

"전진하라 전진하라"

...

누군지 그의 손을 이끌다

그러나 그는 호을로였다.


<탄실의 초몽> 일부



애드가 알랜 포의 소설을 국내에 소개하고 보들레를의 시를 번역했다는, 그의 호을로는 어디까지 견딜 만했을까. 그의 책 <<사랑은 무한대이외다>>를 앞에 두고 사랑이 무한대인지 아닌지 관심 없다,고 조용히 말해본다. 무한대인들 혹은 아닌들 사랑에 대해 할 말이 없다. 모욕적인 소문에 치이다 절필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일본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결말을 우선 챙긴다. 백인 남성의 세계를 엿보고 그 문명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한 여자의 결말이 아름답기 어렵다. 근대문명을 좇아가기도 바빴던 키작은 비백인 남자들이 보를레르 운운하는 여자를 참아냈을 리 없으므로. 호을로 서서 거친 비바람에 맨몸으로 맞섰던 여자를 단죄하고 비참한 결말로 인생을 마무리했음을 '추정'하게 한다. 한창 주목되었던 나혜석 이후, <<네 사랑받기를 허락지 않는다>>고 썼던 최영숙을 거쳐 세 번째 알게 된 비참한 조선 여자 탄실 김명순을 맞는다.

신자유주의 파고와 노화의 초입에서 당황하는 내게, 그는 익숙한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뭘 버려야 하는지 알려준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식민지배가 인생 전반에 빈틈없이 골고루 깔아놓은 대로 진부한 삶을 지지부진하게 끌고 다니다 번쩍 정신을 차려본다. 내 길을 간다 생각했는데 갈수록 남의 길이었다. 남의 감정이 내 것인 양 표현하고 아양 떨어서 목숨을 부지했다. 남의 생활의식에 몸을 맡기고 대충 남만큼이라도 살고 싶어 안달했다. 탄실의 절규에 납작 엎드려 원수의 것을 더듬어본다. 전부 내놓기 위해.   


이 사무친 한을 어찌 면하랴. 사람의 계급에 '귀하지 않은' 사람이 생겨나서 구차하게 살아가노라니, 만물의 영장이라는 그 사람들의 일원으로 어떤 때는 썩은 낙엽에 그 생명이 비기어지며 어떤 때는 짚 꺼풀에 비기어지며 어떤 때는 생사가 임의롭지 못한 꽃에도 비기어졌었으며 어떤 때는 새장 속의 새에도 비기어졌으리라, 그러나 사람이야 어찌 참으랴. 남의 생활의식에 그 몸을 맡기고 남의 감정에 그 웃음을 던짐이 오로지 흥미 없는 일이 아니랴. 젊은 수색자야, 해녀야, 네 길을 간다 할지라도 갈수록 남의 길일 것이며 남아 보이는 것이 학대일 뿐이니 부질없는 등산을 멈추고 네 몸 위에 값없이 던져지던 남의 생활의식 남의 감정을 전부 뽑아내어 던져라! 그것이 네 피를 빨았으며 네 고기를 저몄으며 네 꽃을 값도 없이 시들게 했을 것이다. 창백한 속 썩은 등산자야, 네 앞길이 갈수록 험할 뿐이다. 원수의 것을 전부 내놓아라!! (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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