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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초 Aug 06. 2020

보이지는 않지만 믿어지는 기적. 밥보다 국시, 윤향숙

내 이름을 불러줘 no.8

<내 이름을 불러줘>는 31개 시군에 거주하고 있는 경기 시민들을 릴레이 인터뷰 형식으로 소개하는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 기획자는 최초의 인터뷰이만 섭외하며, 이후로는 인터뷰이가 자신의 지인 중 다음 차례의 인터뷰이를 추천하는 방식입니다. 첫 번째 인터뷰이는 다섯 번째 인터뷰이를 전혀 알지 못하지만, 어쩌면 여섯 번째 인터뷰이 혹은 열 번째 인터뷰이와는 어떤 접촉점이 있을 수도 있지요. 이런 방식으로 인터뷰이는 지인의 지인 형식으로 모두 연결되고, 우리가 사는 사회의 축소판을 구현해내게 됩니다. 본 프로젝트의 무대는 경기도이지만, 우리 사회를 이루는 이러한 방식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는 실상,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각각의 인터뷰이는 그들 삶을 이루는 행복, 가치, 꿈, 흔들리던 순간 등을 묻는 10가지 질문에 답하며 자신의 경험과 삶을 나누고,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또 다른 모양의 길과 삶을 들여다봅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 그리고 익명으로 존재했던 이웃들의 고유한 삶을 품고 있는 도시의 다양한 얼굴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가 나를 돌아보게 하고, 다른 이의 걸어간 길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며, 불확실한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희망을 만들어갈 힌트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이름과 사는 곳은?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에 사는 윤향숙입니다.



2. 당신이 사는 도시에서 당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요?

제가 살고 있는 곳은 면 단위 소재지로,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가 다니고 수도와 도시가스, 유선방송이 되지 않는 곳이에요(그래도 경기도인데). 이렇다면 첩첩산중 오지 마을쯤으로 생각될 텐데, 그렇게 깡 시골은 아니에요. 손님들이 가게에 와서 의아해하는 것 중 하나가 이 많은 손님들은 어디서 오냐는 거예요. 사실 저도 그게 의문이에요. ‘어디서 오는 걸까요?’ ㅎ 현재까지 국수 하나로 당일 최고 판매 기록이 860인분이라면 믿어질까요?


저는 2002년에 처음 국시 가게를 시작했어요. '밥보다 국시'라는 이름으로 가게를 열면서 주변에 엄나무, 가시오가피, 살구나무, 체리나무, 대추나무도 심어놓았는데, 심어만 놓고 거름이나 약을 하지 않으니 18년 동안 사람보다 새들에게 내어주는 열매가 더 많아요. 다른 사람들이 살기엔 불편한 게 많지만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도 이곳이 좋은 이유는 많아요. 새들이 좋아하는 과일나무, 이제야 주인을 찾은 유기견 골드 레트리버 2마리(맥스, 범근이), 블랙 레브라도 레트리버(퀸), 차돌이, 써니, 사랑이 이렇게 6마리가 맘껏 짖어도 이웃의 민원 걱정 없는 환경 등이요. 

왼쪽 위부터 차례대로 맥스, 퀸, 차돌이, 써니, 사랑이


3. 어떤 일을 해오셨고, 지금 몰입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18년 전, 기술도 경력도 없이 사회에 나와 보니 아이 둘 딸린 엄마에게는 받아주는 곳 하나 없는 냉혹한 현실이었어요. '그래, 음식 장사를 하면 아이들 굶기지는 않겠지' 싶어 겁 없이 가게를 시작했어요. 막상 가게를 열고 보니 시속 80~100km 속도로 달리는 39번 국도에는 지나는 차도 많지 않고, 앞에는 논, 뒤에도 산과 논뿐.. 멀찍이 주유소 하나에 마을이나 회사, 공장도 없고, 저녁에 가게 간판 불을 끄면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 절벽이 되는 곳인 거예요. 처음엔 하루 국수 10그릇을 팔기도 어려웠어요. 


악으로 깡으로 3년을 버티긴 했는데 공과금, 임대료를 제때에 내본 적이 없었죠. 공과금이 계속 밀리니까  전기, 전화, 가스를 끊으러 왔는데 가스가 끊기면 가스비 갚을 길이 없으니 장사를 계속해서 갚을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하기도 했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앞이 깜깜해져요.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시간 동안 국수 10그릇에서 현재 많게는 하루 860그릇까지 팔아 본, 천상 국수에 마음 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가게는 콩국수와 어죽 두 가지 메뉴뿐입니다. 콩국수도 어죽도 싫어하는 제가 국수를 만든다고 하면 사람들은 의아해합니다. 보통은 그 음식을 좋아하거나 자신 있는 것을 하지요. 그런데 저는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제가 싫어하는 음식의 싫은 이유를 아니까, 싫어하는 사람도 먹을 수 있는 장점을 끌어내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생각이 통했는지, 인적도 드물고 대중교통도 원활하지 않고 차 없이는 올 수 없는 이곳이 사람들의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대한민국의 모두가 맛있는 국수를 맛보는 그날까지 매일 꿈꿉니다. 


영양콩국수와 어죽칼국수


4. 무엇이 당신의 생각과 행동에 영감/영향력을 주나요? 혹은 그런 사람이 있나요?

음식을 만든다는 건, 그 음식을 먹으러 와주시는 손님을 만나는 일일 거예요. 매일 수 백 명의 손님을 만나다 보면 일일이 얼굴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마음에 남는 손님들이 많아요. 그분들의 등에 떠밀려 지금까지 올 수 있었어요. 


국수 한 그릇 파는 게 어렵던 시절에, 한 손님이 국수를 드시고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미셨어요. 차마 돈이 없다는 말은 못 하고 '잔돈을 못 바꿔 놨으니, 다음에 지나가시다 주세요' 했더니, 가만히 서 있으시다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분 또한 여유 있는 분이 아니고, 철 스크랩을 운반하시며 하루에 두 번 39번 국도를 지나가시는 기사님이셨어요.) '그럼 10만 원을 맡겨놓고 갈 테니, 밥 먹을 때마다 까시라'고 하시면서 그 후로는 10만 원씩 선불을 놓고 가셨어요. 

그분이 넉넉하셔서 그러진 않았을 거예요.  어렵게 사는 사람들끼리 도우며 살자는 선한 마음이지 않았을까요. 그 어려운 때에 너무 큰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제가 그 손님에게 붙인 별명이 있어요. 별 아저씨. 저에게는 정말 하나의 빛이자 별이었어요. 혹시라도 다시 찾아오셔서 뵙게 되면 국시는 평생 무료로 대접해드리고 싶어요. 그 '별 아저씨'를 꼭 다시 뵙고 싶어요. 


그 뒤로도 잊지 못할 손님들이 참 많았어요. 어느 날 한 손님이 두툼한 서류봉투를 건네주셔서 열어보니, 당시 전자 장부가 없던 시절이라 주문을 일일이 종이에 쓰는 걸 보시고는 a4용지 100장에 주문지를 만들어 가져다 주신 거예요. 고마워서 국수 값을  안 받겠다고 하니까, 국수 값 안 받으면 다시는 안 온다며 엄포를 놓으시며 응원해주셨어요. 어떤 손님은 정원에 있는 조경석을 나르시는 기사님이셨는데 가게 주변을 꾸며보라고 지나가실 때마다 커다란 돌 한 덩어리씩 놓고 가시고, 어떤 손님은 한겨울 철 이른 귀한 딸기를 가져다주시고, 어떤 손님은 장미꽃 농장에 들러 양쪽 팔로 다 안을 수도 없는 양의 장미를 선물로 주시고는 감동하는 저를 보며 더 행복해하시고, 어떤 손님은 계절마다 꽃씨를 받아 봉지 별 이름을 써서 건네주시고, 바빠서 끼니때를 놓치고 굶는 저를 위해 주위에서 구하기 어려운 찐 옥수수, 호떡, 꽈배기 등 간식을 식기 전에 가져다주시는 손님도 계시고, 생각해보니 이 국숫집은 한 분 한 분이 만들어가는 미담 제작소 같은 곳이에요. 힘든 시기에 그분들의 응원이 없었으면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요. 살다 보니 매일이 선물이고, 반가운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네요.



5. 당신이 아끼는 7가지 아이템으로 당신의 취향을 소개해주세요.

요즘은 실시간 깜박이라서 읽은 책도 다시 보면 처음 본 책 같고, 영화도 모두 재밌게 봤는데 꼬집어 고르라면 제목이 기억이 안 나요. 그런데 희한하게, 노래 제목은 생각이 안 나도 노래는 금방 따라 흥얼거리는 거 보면 신기해요. 연극이든 영화든 콘서트든 가리지 않고, 그저 기회 주어지면 열심히 달려가요.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엄두도 못 내고 있어요.



6. 일상에서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아침부터 저녁까지라고 하면 모두 웃을 거예요. 저는 지금 매 순간이 행복하고 감사해요. 오늘 하루가 감사하고, 하루가 무사해서 다행이고, 친구들이며 지인들과 수다를 떠는 시간도 행복하고, 가게 간판의 불이 꺼지고 모두가 퇴근하고 나면 그때부터 울타리 속 갇혀있던 강아지들을 풀어주고 산책하며 같이 눈 맞추고 노는 그 한가로움이 저에게는 휴식이고 위안이에요.  이렇게 말하면 위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진짜 평범한 것이 행복이랍니다.


저는 아들이 둘 있어요. 큰 아들은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장애 3급입니다. 아이가 자랄 때는 아픈 줄도 모르고 조금 더디고 느리게 크는구나 생각했어요. 아이가 엄마의 손길이 조금 더 필요하다는 걸 알았을 땐 다른 엄마보다 사랑을 더 줄 수 있어서 다행이고, 상담과 치료를 거부하지 않고 잘 받으러 다녀주니 고맙고 다행이지요. 둘째 아들은 어려서 악성종양 암으로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 큰 수술을 받았어요. 후유증은 남았지만 잘 이겨내었고, 늘 건강을 챙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셨으니 이만하면 다행이다 싶지요. 살아온 순간순간이 늘 위기였어요. 하루도 조용하거나 잠잠한 날이 없었지만, 지나고 보니 최악의 순간에 최선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 같아요. 그 순간들을 넘기니 단단한 나이테를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니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지요.



7.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원칙이 있나요? 그것을 얻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 삶에서 중요한 것은 힘들 때나 기쁠 때, 슬플 때, 늘 나무처럼 공기처럼 함께 해준 친구들과 지인들입니다. 민가조차 하나 없는 곳에서 장사를 시작했을 때도, 뒤도 안 돌아보고 살았던 시절에도, 잠깐 왔다 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닌데도 저를 만나러 와서 말없이 어깨 토닥여주는 친구들이었어요. 그래서일까요? 받는 만큼 꼭 돌려주고서야 성이 풀리는 오지랖이 생겼어요.



8. 인생을 살며 큰 변화가 있었던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이고 그로 인해 무엇이 바뀌었나요?

국수 가게를 시작할 때만 해도, 먹고 살기 급급해서 나만 불행하고 나만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어요. 어느 날 손님 4분이 국수를 먹고 나서 계산을 하려는데, 서로 계산하겠거니 싶었던지 그중에 단 한 명도 돈이나 카드를 가지고 오지 않은 거예요. 순간 분위기가 난감해지면서 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누구 한 명 볼모로 돈을 가져오라고 할 수도 없어서 ‘다음에 지나가다 들러서 주세요’ 하며 보내드렸어요. 마음 한편으로는 국수 네 그릇 돈이면 아이들 과자라도 실컷 사줄 수 있는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 일이 있고 1년쯤 지나서, 가게를 열지 않은 이른 아침에 손님 한분이 찾아왔어요. 잊고 있던 국수  네 그릇 이야기를 하시면서 먼 길 돌아 일부러 들르셨다면서 돈을 주셨어요. 1년 동안 못 갚으신 국수 값 때문에 미안해하는 그 마음이 읽히면서, 일부러 들러준 마음에 감동해서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거의 포기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불쌍한 사람한테 대접했다고 치자며 애써 잊어버리려 했던 서운한 감정이 눈 녹듯이 녹더라고요. 

그 일을 계기로, 하루에 한 그릇 일 년이면 365그릇에 몇 그릇을 보태서 국수 400그릇을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고 있어요. 그게 벌써 13년이나 되었네요.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각종 기증 행사가 취소되어 못하고 있지만 그때 4그릇의 마음을 받아 400그릇을 만드는 기적을 가게를 하는 날까지 계속 이어가 보려 합니다.


 

9. 언젠가 이루고 싶은 모험, 꿈이 있나요? 그것을 위해 현재 준비하고 있는 게 있나요?

나이가 들어 언젠가 가게를 그만두게 되면 작은 산에 터를 잡고 싶어요. 지금까지 콩국수 이름 앞에 제 이름을 걸었듯이, 제 이름을 내걸 수 있는 맛있고 건강한 된장을 만들어 볼 거예요. 이런 얘길 하면 다들 지금 하는 콩국수에만 매진하라고 하더라고요. 손님이 많아져서 행복하고 좋지만, 때로는 여행자를 맞이하고 대접하는 일 말고 제가 여행자가 되어 떠나 보고도 싶고, 잠시 자리를 비워도 가게 생각에 시계만 쳐다보는 조급증에서 벗어나 여유로움을 느껴보고 싶은 갈증이 있어요. 된장은 제 손으로 만들고 나머지는 바람이, 공기가, 그리고 시간이 하는 일이잖아요. 기다리는 동안 잠시 부려보는 여유가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된장이 익어가는 냄새가 상상이 되시나요? 전 벌써부터 콩닥콩닥 심장이 뛰어요~~ 콩으로 시작했으니 콩으로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10. 삶의 흔들리는 순간에서 당신을 지켜주는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보이지는 않지만 믿어지는 기적이라는 거 알아요? 분명 내가 힘쓰는 게 아닌데도 이루어지고 있는 기적이요. 그게 뭐냐면, 바로 말없이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응원이에요. 당장 전쟁이라도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절박함을, 위로로 대신해주었던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 제가 있었을까요? 지금도 끊임없이 행복을 향해 등 떠밀어주는 사람들 때문에 살아야 하고, 잘 살고 싶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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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터뷰이를 소개해주세요.  

경기도 오산시에서 모든 것에 감사하고, 늘 이쁘게 웃으시는 부인과 두 분 닮아 예쁘고 귀여운 딸과 뱃속에 아가랑 알콩달콩 사시는 젊은이 이동찬 씨의 사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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