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영화관 특별전 #17
저의 집에서는 매주 작은 영화관이 오픈합니다.
저와 제 가족의 은밀한 곳이죠.
상영시간은 '마음이 내킬 때'이고 팝콘과 콜라 대신 커다란 B사의 아이스크림이 대신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상영 영화도 항상 달라지는군요.
오늘은 이 오래되고 은밀한 영화관에서 세상을 바꾸는 용기 있는 배우들의 수상소감 특별 상영전이 열렸습니다.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스타들의 수상소감은 언제나 화제를 몰고 옵니다. 자고로 수상소감이란 상을 받는 본인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옆에서 동고동락, 살신성인하며 같이 힘써준 은인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진심 어린 소신을 표현할 수도 있는 자리이기도 하지요. 그 상이 신인상이든, 공로상이든, 영애의 대상이든, 상이란 자고로 그 가치를 아는 자에게만 주어져야만 할 텐데요. 가끔씩 스타들의 수상소감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너무 터무니없을 때가 있습니다.
작년 말, MBC 연기대상의 영애의 대상은 방영 당시 엄청난 이슈를 몰고 왔던 드라마 W의 남자 주인공 이종석에게 돌아갔는데요. 그의 너무나 간결하고도 살짝 무례한 듯한 수상소감은 적지 않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시상식이라는 자리가 떨리고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자리일지라도 청심환을 먹어서 졸리다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는 그의 모습은 정말 그가 대상이라는 상의 가치를 아는 사람인지 보는 이로서 의심하게 만들었죠.
벼는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2012년 드라마 추격자로 SBS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한 손현주의 수상소감입니다.
이야.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군요. 해가 서쪽에서 뜨겠습니다. 지난여름, 5월부터 7월까지 참 많이 뛰었고요. 아 그전에. 신사의 품격 고맙습니다. 참 여름 동안 뛰었고. 사실, 관심이나 또 기대를 못 받았던 건 사실입니다. 촬영하는 내내 우리 드라마에는 없는 게 너무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아이돌이 없고, 스타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했습니다. 우리 드라마에는 누가 있냐면요. 박근형 선생님이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상중아 고맙다. 미안하다. 그래요. 이런 상이 나한테까지 오네요. 추적자라는 드라마가 안방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많이 일들이 있었는데 (생략)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드라마 사실 변방이었거든요. 변방 드라마가 원방도 되네요. 고맙습니다. (생략) 마지막으로 지금도 어디에선가 틀림없이 낮밤을 새고 있습니다. 밤을 낮처럼 낮을 밤처럼. 스태프와 연기자들. 그리고 이 일이 아니더라도 각자 맡은 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수많은 개미들과 이 상의 의미를 같이 하겠습니다.
4분남칫한 그의 수상소감에는 상을 수상하게 된 기쁨과 동료에 대한 고마움, 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있습니다. 드라마 속 우리 사회의 힘없는 약자를 연기한 그는 수상소감의 끝에 이 나라 곳곳에 있을 서민들에 대한 응원도 아끼지 않으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 먼 미국 사회에서의 시상식은 한국사회에서의 시상식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시상식에 온 사람들은 신나 보이고 지쳐 보이지 않으며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으며 서로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해줍니다. 그들의 수상소감은 그 또한 조금 특별한데요. 한국에서는 금지시된 정치적 발언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정체성에 대한 커밍아웃에 심지어는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수상 거부까지. 그들의 시상식은 마치 여러 장르가 섞인 한 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주는데요. 물론 나라마다 정서가 다르지만 우리나라에도 하루빨리 시상식과 시상소감에 대한 자세와 인식이 조금이나마 달라졌으면 하며 이번 특별전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3살에 데뷔해 무수히 많은 작품을 찍고, 찍으며 미국 영화계의 한 획을 긋고 있는 조디 포스터. 그녀는 2013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가장 명예로운 상으로 알려진 Cecil B. DeMille 평생 공로상을 받으며 용기 있게 전한 수상소감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여느 배우들처럼 고마운 이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던 그녀는 곧, 갑자기 지금껏 방송에서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I'm single." 무언가 엄청난 것을 말하길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독신*입니다라고 진지하게 말하며 곧이어 자신은 이미 오래전에 커밍아웃을 해서 오늘 성대한 커밍아웃 연설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죠.
자신을 향한 무수히 많은 루머들을 일단락 지으며 당당히 자신은 성 소수자임을 밝힌 그녀의 재치 섞인 커밍아웃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응원을 받았는데요. 아직 성 소수자들에 대한 인식이 사회적으로 따뜻하지만은 않은데 그녀의 용기 있는 발언으로 이 세상은 조금 더 다양한 사람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멋진 수상소감이었습니다.
*여기서 조디 포스터가 독신이라고 말한 것은 위트가 섞인 그녀의 장난이기도 하다. 전미에서 방송되는 권위 있는 시상식에서 "나는 레즈비언입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약간의 재미를 섞은 그녀만의 독특한 커밍아웃이었다.
6번의 노미네이션 이후에 드디어 생애 첫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손에 쥐게 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그가 영화 <레버넌트>에서 몸을 사리지 않으며 보여준 소름 끼치는 연기는 그가 다섯 번의 고배를 마신 대망의 아카데미상 수상에 성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게 만들었었는데요. 평소 환경운동에 관심이 많아 환경운동가로도 바쁘게 활동 중인 그는 영화 <레버넌트>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그려낸 작품이라고 말하며 환경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 세대를 어우르는 꽃미남 배우로서 이제 어느덧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중견배우가 되어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멋있는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그의 수상소감은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사람들에게 응원을 받았는데요. 지구온난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데 성공적이었던 그의 수상소감 중 한 부분입니다.
"기후 변화는 현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 인류와 살아있는 생명체를 위협하는 가장 위급한 일이며 모두가 힘을 합쳐 이 문제를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지구를 당연하게 여기지 마세요. 저 또한 오늘 이 상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1973년 제 4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것보다 더한 화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영화 <대부>로 엄청난 연기를 보여주었던 故말론 브란도의 남우주연상 수상 거부 때문이었는데요. 그날 밤,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은 말론 브란도를 대신해 단상 위에 올라온 Native American*출신 배우 Sacheen Littlefeather은 그를 대신해 정중히 수상을 거부하며 그 이유로 원주민들에 대한 미국 영화 산업의 부당한 대우를 이야기합니다. 이 전무후무한 일에 그녀가 말하기 시작하자 객석에선 몇 사람들의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결과적으로는 시상식 이후, 이 사건은 매스컴의 엄청난 주목을 받으며 영화계뿐만이 아니라 다른 산업에서도 원주민들에 대한 대우와 인식을 다시 보게 되는 성공적인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Native American: 북미 원주민, 청교도가 미국에 오기 전부터 북미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 (소위 인디언이라고 불렸지만 사실 그 단어는 고정관념이 박힌 표현이다).
자타공인 현존하는 미국 최고의 여배우, 메릴 스트립. 그녀는 8일에 열린 제 74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하며 배우들의 대모로서 따뜻하고 감동적인 정치적 발언을 해 화제가 되었는데요. 시상식에 함께한 배우들의 출생지와 자라난 곳을 나열하던 그녀는 할리우드는 아웃사이더들과 이방인들로 인해 만들어지고 있다며 이들을 다 내쫓으면 당신들은 (미국은) 볼 것이 미식축구랑 격투기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시작으로 제 45대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공공장소에서 몸이 불편한 기자를 흉내 낸 것을 비판하며 그것은 자신이 본 연기중 가장 가슴이 무너지는 연기였다고 말하죠. 그 연기는 영화 속이 아닌,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요.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에서 수여하는 시상식인만큼 그녀는 관중들에게 우리는 권력에 맞서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언론이 필요하다며 이런 말을 남기는데요. 지금 우리나라에도 무엇보다 공감이 가는 말이 아닐까 싶은 뼈 있는 대배우의 한마디입니다.
"무례는 무례를 부르고 폭력은 폭력을 낳습니다. 권력을 쥔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데 이용한다면 우린 모두 패배할 것입니다."
소소한 영화관 특별전에 올려지는 모든 글은 작가의 극히 주관적인 소견임을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