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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사람 Jan 05. 2017

친구와 마주보며 핸드폰

우린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


 네모진 상단을 따라 금세 곡선으로 떨어지는 기다란 선. 그 모양대로 눈을 굴려 봐도 얇은 금속 상자에 가려진 사람들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길을 걷는 누군가, 카페에서 친구와 마주한 누군가, 복잡한 전철과 버스에서 바라본 당신. 그리고 당신 주변의 사람들 모두가 휴대폰만을 본다. 이어폰으로 작은 기계와 귀를 연결한 사람들의 모습은 흡사 오래전 SF에서 다루었던 미래의 한 장면 같다. 고개를 기울인 사람들. 아래만 보고 걷는 사람들.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일까, 다른 차원에 집을 짓는 사람들일까.


  많은 사람이 모바일 중독에 빠져 있다. 물론 나 또한 그렇다. 부족한 것이 없는 시대지만 그 어느 때보다 결핍이 도드라지는 시대이기도 하다. 휴대폰을 열고 SNS에 들어가면 엄청난 수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달려 올 이들은 아니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당장 내 앞에 앉은 친구들을 두고 휴대폰을 들여다보기 일쑤다. 여기에 트렌드의 한 축이 된 ‘쿨’하다는 성향이 더해지면 관계는 허울 좋은 순간의 분위기가 되고 만다. SNS 팔로워 수로 위로를 받으려 해도 쓸쓸한 마음은 가셔지지가 않는다.


 우리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만족을 주는 다른 무언가에 몰두하게 된다. 결핍은 개인의 부족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실패의 문제로 받아들이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손쉽게 통제할 수 있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서 만족을 찾고 결핍을 잊으려고 한다. 이것은 실패를 만회하고자 하는 마음과 결합하여 금세 중독에 이르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중독이 빈번한 요즘은 그만큼 많은 이들이 실패감을 느끼며 결핍에 시달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015년 여름에 인상 깊게 본 강의 하나가 있었다. 저널리스트, 요한 하리의 테드 강의였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중독에 관한 대부분이 틀렸음을 설명한다. 15분이 채 안 되는 강의에서 그가 말한 핵심은 교류였다. 강의 내용 중 그가 든 사례가 있다.


 심리학 교수 브루스 알렉산더가 한 유명한 실험이라고 한다. 교수는 우리에 쥐 한 마리를 넣고, 물병 두 개를 넣었다. 한 병은 그냥 물이고 다른 한 병에는 헤로인이 들었다. 쥐들은 대부분 마약이 든 물을 선택한다. 그리고 망가져갔다. 교수는 결과를 보다가 고립된 쥐에게 선택권은 헤로인 밖에 없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실험 환경을 바꾸었다. 쥐공원을 만든 것이다. 쥐들에게 천국 같은 놀이 공간을 만들고, 충분한 치즈와 많은 친구를 넣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두 개의 물병이 주어진다. 물과 헤로인이 든 물병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쥐공원이 주어지자 쥐들은 헤로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충동적으로 복용하거나 남용하는 쥐도 없었다. 고립된 상태에서는 백퍼센트 남용하지만 교류가 있을 땐 중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요한 하리는 말한다.

“우린 온갖 종류의 중독에 취약한 문화권에 살고 있다. 소통의 단절이 중독의 주된 요인이고, 단절은 늘어나고 있다. 분명 세상은 더 긴밀히 연결되었지만 지금의 교류는 그저 인간 관계의 ‘흉내’일 뿐이다.”


 그리고 중독의 반댓말을 짚어주며 우리를 둘러싼 중독의 유혹을 이기는 답을 내린다.

 “중독의 반대는 단지 맑은 정신이 아니다. 중독의 반대는 관계이다.”


 관계가 단절되거나 어그러진 생활은 피로감이 가중된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쿨하다. ‘뭐 어때.’, ‘내가 받지 않는 도움, 베풀지 않아도 되니 좋지.’, ‘이대로도 충분히 좋아.’ 개인의 울타리가 이처럼 견고해지고 사람들은 고립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자신만의 울타리에서 중독거리들을 풀어 놓고 밖으로 좀처럼 나오기가 어려워진다. 정말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위키디피아는 ‘쿨’을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안정감과 고요함을 유지하고 자기 조절을 잃지 않으면서 독립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쿨’이 일종의 심리적 자기방어 기제라는 걸 시사한다.

자기 확신이 저하된 사람들이 늘고 있다. 오히려 스스로를 포장하고 실제 인간관계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숨는 일이 잦아진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평범치 않게 하는 중독의 문제로 번지게 된다.


 이건 사회의 몫이 크다. 역사를 반복하며 투쟁거리는 늘 던져졌지만 지금 사회의 투쟁 앞에선 숨이 턱하고 막힌다. 이해의 정도를 벗어난 이 사회의 시커먼 현실 앞에서 개개인이 촛불을 켜보지만 언제쯤 이 어둠에 완전한 빛이 켜질지는 미지수다. 이토록 시커먼 터널과도 같은 불안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국가가 개인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것을 인지한 사람들의 이어지는 생각은 ‘그렇다면 내 살 길은 내가 찾는 수밖에 없다’로 이어진다.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는 건 이런 이유도 무시할 수 없을 터.


 나도,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사소한 중독으로 시작하여 외딴 섬을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 시작의 원인은 삶의 무게에 억눌려 교류가 막혔기 때문일 가능성이 많다. 사람은 결속하려는 본능이 있기에 관계를 맺고자 하지만 사는 게 바빠서 내 한 몸 건사하다 보면 어느새 혼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결속의 본능을 다른 곳에 쏟아 부으면서 쉽사리 중독된다.


 이 글은 새해가 시작되면서 정형화된 인사말이 날아드는 걸 보며 쓰게 되었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새해 인사가 그대로 붙여넣기 형태로 온 카톡과 문자들. 대체 여기에 무슨 답변을 해야 할까 생각하다 끝내 답을 못한 게 여러 개다. 우리가 진정한 교류를 하고 있는 게 맞을까.


 우리는 소소한 중독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먼저는 교류를 방해하는 것들을 차단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잠시 주변의 사람들을 떠올려보자. 누구에게 위로를 건네면 좋겠는가? 생각나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담은 안부를 전하면서 교류를 이끈다면 어떨까. 당신의 진심어린 인사가 고립된 섬으로 들어가려는 누군가를 붙들 수도 있다. 올 한해는 SNS를 벗어나 현실에서 진실된 교류를 하도록 노력하자. 사는 일의 팍팍함에 쫓겨 교류를 등한시한 건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우리는 사회를 ‘쥐 공원’에 가깝기보다는 고립된 ‘쥐 우리’에 가깝게 만들었다. 내 삶 속 중독자들에게 그들과 더 교류하고 싶다고 말하라.”

요한 하리가 강의 말미에 던진 이 말을 주변 친구들에게 실천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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