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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사람 May 02. 2019

한 여름의 훌라

나에게 힘을 줘요, 메레 훌라.


“훌라 배우자!”


“훌라? 짱구 춤 말이야?”


어느 여름, 친구가 훌라를 배우자고 했을 때만 해도 단박에 떠오른건 짱구 춤이었다.

‘그걸 돈 주고 배운다고...?’


다소 황당한 제안에 놀랐던 그 표정 그대로 돌아오는 주부터 친구와 훌라를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훌라의 매력은 나의 예상을 모두 뒤엎었다. 


훌라(hula)는 노래와 리듬에 맞춰 추는 춤이다. 멜로디에 따라 노래하는 하와이언 언어를 수화로 표현하는 춤이기도 하다. 하와이언에게 춤은 곧 언어이고, 언어는 춤으로 묘사된다. 따뜻한 나라에서 이뤄지는 참으로 근사한 언어소통이다. 훌라는 노래 가사를 허투루 버리지 않고 모조리 손 안에 그러모아 수화로 전달한다. 고대 하와이 음악은 ‘메레(음악)’라 하였는데 이것에는 ‘메레오리(레치타티보풍의 가창만 있는 것)’와 ‘메레 훌라(춤이 따르는 음악)’가 있었다. 전설로는 타히티에서 라카라고 하는 신이 하와이에 와서 하와이족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라카는 고대로부터 훌라를 추는 자가 숭배하는 신이다. 하와이에선 훌라 춤을 추는 이들이 섬기는 신이 있다는 거다. 이건 그들만의 신념과 철학이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훌라를 배운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맨 처음 내 반응과 다를바 없었다. 


“훌라? 짱구 춤 말이야?”


“훌라는 짱구 춤이 아니고, 춤으로 된 예쁜 언어를 배우는 일이야.”


물론 진지한 동문서답에 친구들은 보은 마뜩찮은 표정으로 일관하기 일쑤였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지하 연습실에서 훌라를 추고 있으면 거울 속 깊은 곳에서 나를 마주 선 소녀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큰 꽃을 귀 옆에 꽂은 소녀와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그리고 춤추는 소녀를 실루엣으로 만들어 바다의 풍경이 되게 하는 석양. 메레 훌라(춤이 따르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동안 상상 속의 소녀는 곁에서 훌라를 추고 음악이 끝나면서 사라졌다. 


훌라를 배운지 겨우 2개월이 됐을 때 여름은 무르익어, 매 여름 개최되는 훌라 축제 기간이 찾아왔다. 나는 친구와 예상에 없던 축제에 지원했고 사람들 틈에 섞여 훌라를 추게 되었다. 축제가 열리는 부산 해운대에서 우리는 꽃으로 만든 목걸이(레이)를 목에 걸었다. 바다를 등지고 추던 훌라. 그 축제의 날은 한 여름밤 꿈이 되어 오래된 일이 되었다. 


답답한 회사 생활에 지쳐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 눈을 감으면 바닷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곧 이어 소라 구멍에 귀를 대면 멀리서부터 가까워 오는 파도소리처럼 나타나는 한 사람. 레이를 목에 걸고 훌라를 추며 다강오는 그 여름의 내 모습이 보인다. 춤으로 전하는 수화를 가만히 바라보면 천천히 읽힌다. 부산 바다에서 추었던 메레 훌라가.



“이제는 돌아가요. 별이 흐르는 밤, 떠오르는 나의 집으로- 흔들리는 야자수 곁에 앉아 바라보던 바다, 그곳에 세워진 집으로-”



사실 지나온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좋았던 어느 날을 끈질기게 붙들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도. 그걸 아니까, 메레 훌라의 가사를 혼잣말하며 의자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눈을 뜬다. 돌아갈 곳은 과거의 내가 아니라 지금을 살아야 하는 나라고 다독이며. 



나에게 힘을 줘요, 메레 훌라. 



석양에 사라져가는 훌라의 소녀에게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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