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 = responsibility ?
얼마 전부터 미드 ‘워킹데드’를 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봤던 좀비물과 달리,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행동과 갈등이 두드러졌다. 드라마 특유의 긴 호흡 덕분에, 선과 악을 규정할 수 없는 인물들이 변하고 성장하는 과정에 찬찬히 몰입하면서 따라가 보는 재미가 있었다.
사회적 안전과 질서가 무너지고 자신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타인의 선의를 바랄 수 없다. 단순히 생고기를 찾아 걸어 다니는 시체보다, 며칠 굶주린 사람이 예측할 수 없는 잔혹함을 품은 두려운 존재다. 그러나 이런 혼돈 속에서 마주치는 인간에게 극도의 이기심 외에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을 갖고 기대할 수 있다. 바로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다. 그렇게 좀비 드라마를 보다가 ‘책임감’이란 단어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책임감’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responsibility’다. ‘response(반응)’와 ‘ability(능력)’의 합성어라고 한다.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책임감’이라고 수업 시간에 지나가듯 설명하곤 했지만, 말하는 나 자신도 솔직히 와닿지 않았다. 동양과 서양의 관점 차이 때문일까. ‘잘 반응하는 것’은 예민함에 가깝지, ‘맡은 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으로 바로 연결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그러다 극중 허셸이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릭을 위로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때 허셸의 대사는 내가 찾던 답의 힌트를 줬다.
… have responsibilities, people to keep safe …
… 책임감을 가졌고, 안전하게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다 …
허셸도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깨닫고, 어디 틀어박혀 술만 마시며 자책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마음을 잡고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그에겐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향한 ‘responsibility’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렇듯 ‘responsibility’는 단순히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 또는 일의 부름에 달려갈 수 있는 ‘힘’이다. 그에 대한 결과가 어떻든, 자신이 깊게 관련된 일에 답하는 것은 본능적인 행동 이상의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 충분히 능력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것이 ‘response’ 뒤에 능력을 나타내는 어미 ‘-ibility’를 붙이는 이유가 아닐까.
‘책임감’은 어떤 일이든 맡을 수 있도록 늘 갖추고 있어야 할 미덕이다. 반면에, ‘responsibility’는 특정 대상을 향해 발휘할 수 있는 힘이다. 오직 생존만이 최우선인 ‘워킹데드’의 세상에서는,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인물들이 가족에게 보이는 행동에는 책임감이란 말보다 responsibility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소중히 여기거나 깊게 연관된 대상이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