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영어 문법을 가르칠 때 제일 까다로웠던 걸 고르라면 나는 주저할 것 없이 '명사'를 꼽는다. 수업해본 사람은 안다. 단수/복수 개념을 지나서 ‘가산/불가산’으로 넘어가면, 그때부터 명사만큼 철학 수업을 방불케하는 단원은 없다.
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간단해 보이는 개념 같지만 간단하게 접근하려 할수록 복잡해진다. 일단, 우리는 대화할 때 단수와 복수, 그 물건이 셀 수 있는지 없는지 따위는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영어가 괜히 깐깐하게 느껴지고 ‘아니, 그건 셀 수 있는 거 아니야?’라는 불평이 절로 나온다.
‘많은 정보’ = ‘많은 정보들’
many informations. (X)
much information. (O)
이에 대해서 수업 시간에 불가산 명사의 특징을 보통 세 가지 정도 알려준다.
1. 일정한 형태를 갖고 있지 않은 것
2. 셀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 또는 어떤 것을 이루는 물질
3. 생각과 감정 같은 추상적인 개념
그러나 뭔가 부족한 걸 느낄 것이다. 멀리 나가지 않고도 예외를 찾을 수 있다. 구름(cloud)은 형태가 일정하지 않지만, 가산명사다. ‘song’은 형태가 없고 추상명사나 다름없는데, 가산명사다. ‘여행’이라는 똑같은 뜻을 가졌지만, ‘trip’은 셀 수 있고 ‘travel’은 셀 수 없다.
학생들과 질문을 주고받다 보면 어느 순간 물체의 본질과 실재에 대해서 토론하고 있다. 그것도 중학교 1, 2학년을 상대로! 결국 시간과 수준의 압박으로 ‘그건 우리 생각이고, 걔네들은 그렇게 바라본다!’라며 급하게 정리한다. 물론 더 유용한 말이 있다. ‘너희들한테 이건 중요하지 않고, 여기 단어 몇 개만 외워도 졸업할 때까지 문제없어!’ 입시 위주의 교육 환경은 이럴 때 탈출구가 되어준다.
원어민들은 우리와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그들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셀 수 있는 것과 셀 수 없는 것을 구분해서 문장을 만들고 대화를 나눈다. 그렇다고 우리가 배우는 것과 다른 그들만의 기준이 있을까? 물어보면,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듯 ‘그냥’이라고 답할 것이다.
한 공동체가 사용하는 말은 이 땅 위에 원래 존재하던 많은 말들 중에 골라 담아 짜깁기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한마디로 인류의 창작품이다. 모든 예술 작품에는 창작자의 관점이 녹아있듯, 언어에도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이 담겨있다.
말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 번 상상해보자. 편의상 최대한 단순하게. 인간은 어떤 대상을 보고, 뇌는 받아들인 정보를 인식하고 그간의 경험들과 비교하면서 처리했을 것이다. 이해하는 과정에서 '가산/불가산성'이 정해지지 않았을까. 그러고나서, 혼자 또는 다른 구성원과 함께 어울리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여기서 왜 그들은 가산과 불가산성을 따지는지는 그저 취향이라고 생각하고 덮어두자.)
따라서, 한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이나 뜻 만으로 가산/불가산을 판단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인 접근이다. ‘a cloud’와 ‘a song’과 같은 예외 앞에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화자가 어떤 생각과 의도로 그 명사를 쓰는지가 명사의 가산과 불가산성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열쇠다.
마침, 이 주제에 딱 맞는 학문이 있었다. 바로 ‘인지 언어학(Cognitive Linguisitcs)’이다. 인지 언어학은 쉽게 말해서, 사람이 말할 때 어떤 사고 과정을 경험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심리학과 언어학이 합쳤다고 보면 된다. 이 분야에서 매우 유명한 Ronald Langacker가 만든 ‘가산/불가산’ 기준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물리적, 추상적 경계성 (Bounding) : 물리적인 것은 물론 머릿속으로 시간적 추상적 경계가 그려지는 것도 포함되며, 이를 가진다면 가산명사다.
2. 내부적 구성(Internal Composition) 또는 동질성(Homogeneity) : 한 개체를 이루고 있는 내부적 구성이 동일한 것들이라면, 불가산 명사다. 예를 들면 물은 동일한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자동차나 연필은 여러 부위마다 구성요소가 다르다.
3. 팽창/수축성(Expansibility/Contractibility) : 팽창 또는 수축을 해도 물체의 특질이 변하지 않고 유지되면 불가산 명사다. 가산 명사들은 박살 난다.
4. 복제 가능성(Replicability) : 그 개체와 같은 걸 추가했을 때, 그 수가 늘어나면 가산명사, 부피가 늘어나면 불가산 명사다. 의자에 의자를 추가하면 의자가 두 개 된다. 그러나 물에다가 물을 넣으면 물의 양이 늘어나지 복제되지는 않는다.
특이점은, 단어의 뜻에 따라 나누지 않고, ‘그 단어가 화자에게 어떻게 인식되느냐’에 초점을 뒀다는 것이다. 추상적 경계성이 제일 눈에 띈다. 시간과 야구의 ‘inning’처럼 물리적 경계는 없어도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는 경계도 포함된다. 이런 의미에서 ‘song(노래)’은 시작과 끝(경계)이 있어 추상 명사이면서도 가산 명사가 될 수 있다.
‘cloud’는 형태는 없지만, 그 단어 자체가 ‘하늘에 떠있는 하얀 덩어리 하나’라는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가산명사다. 실제로 구름이 수증기로 이루어졌다는 과학적 사실은 ‘cloud’가 알 바 아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trip’은 떠났다가 돌아오는 한 번의 ‘여행’을 의미해서 가산명사, ‘travel’은 ‘여행’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쓰이기 때문에 불가산명사다.
화자의 의도에 따라 한 단어가 가산과 불가산 사이를 오갈 수도 있는 것도 설명이 된다.
1. I want to eat an apple.
2. She put apple in the salad.
1번의 ‘an apple’은 ‘사과 한 개’를 뜻해서 가산 명사로 쓰인 것이다. 2번의 ‘apple’은 샐러드에 들어가는 재료(샐러드를 이루는 물질)로서 쓰였기 때문에 불가산 명사로 쓰였다.
이쯤 되면, 명사의 ‘가산/불가산성’을 배우고 외워서 시험까지 치는 것에 회의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수업 방법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수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들의 문화적 특성상, 우리말에 없는 대상의 ‘셀 수 있음/없음’의 구분 또한 중요함을 강조하고,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한 것일 테다. 물론 그냥 그렇게 가르치는 게 편하니까 그 방법을 택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겨우 중학교 1, 2학년 때까지만 배우고 나타나지도 않는, 명사 파트의 ‘가산/불가산’에 대한 답답함을 해소하려다 인지 언어학까지 와버렸다. 조금 멀리 온 감이 있지만, 그동안 영어를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느꼈던 생각이 더 분명해진다. 단어 하나에도 한 문화가 스며있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화의 지적인 만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