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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 Aug 01. 2019

오늘도 못난 자식은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1

멍든 그대 가슴에

50이 넘은 그녀에게 나쁜 말을 하고 말았다.

"이게 바로 엄마랑 내가 친해질 수 없는 이유고,

우리가 유대관계를 가질 수 없는 이유야."

먼 옛날 그녀의 뱃속에서 우리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교감을 나누며 행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20년간 우리는 서로 날이 선 말로 끊기지 않는 핏줄을 잘라내고 있다.



#첫 딸이 웬수가 되어 돌아오다.

90년대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아장아장 걸으며 옹알이를 떼고, 노란 가방을 메다가 잠자리채를 휘두르기도 하고, 학습지를 풀다 치마가 정강이를 넘어 발목까지 내려오는 품 큰 교복을 입었다. 학교가 바뀌면서 유행 따라 교복도 짧아지고 친구와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빳빳하던 성적표가 바래질 즘 졸업식을 마치고 남자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고 졸업 후 남들 취직하고 돈 모을 때 글쓰겠다며 알바비로 교육원을 가더니 근 2년간 집을 떠나 프리랜서로 되도 않는 열정페이나 받으며 서울생활을 했다.

돌아 온 내 창고같은 방은 16년에 머물러있었다.

그리고 떨어져 있던 우리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집에 살게 됐다.

그녀에게 나는 어떤 딸일까.



#스물여섯 엄마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스물 여섯 예쁜 나이에 딸을 낳고 미역국을 챙겨먹으며 배아파 낳은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라는 것을 처음 느꼈을 것이다.

한창 과거에 '내가 널 낳고 미역국을 먹은게 죄다.' 라는 말을 입에 달았던 그녀이기에.

3녀1남 중 셋째인 그녀는 언니들에게 위로 치이고 아래로는 동생이 있지만 남자이기에 억울한 차별대우를 받으며 자랐다.

그녀의 엄마가 뒷바라지는 커녕 눈칫밥만 주는 통에 돈이 없어 학교를 걸어가거나, 걷던 중 영양실조에 더위를 먹고 쓰러지고. 육성회비를 주지 않아 선생에게 혼찌검이 나는건 물론이요, '엄마, 나 성악하고 싶어, 나도 -배우고 싶어.' 원하는 걸 바래봤자 이뤄진 것 하나 없는 그녀였다.

그녀의 졸업사진을 보면 얼굴은 언제나 붓기로 퉁퉁 부어 있었고 유난히 형제들 중에서 본인만 가난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녀는 인생이 힘들어 한 밤중에 홀로 부엌에서 맥주를 마시다 목청 높여 긴 시간 울더니, 이제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엄마에게 전화해 한껏 원망하며 엄마, 엄마, 엄마... 엄마는 날 왜 이렇게 키웠냐며 엉엉 대성통곡을 한 적도 있었다.


내 딸은 부족함 없이 키우고 싶으셨겠지.

지금 이 글을 적다보니 느껴진다.

나와 싸울 때면 항상 그녀가 하는 말.

'지금 상황에 그 말이 왜 나와?'

나를 더욱 답답하게 열받게 자극하는 말.

무슨 말만 하면 앞뒤 맥락없이 툭툭 내뱉던 말.

'나는 못먹고, 못입고, 먹고 싶은거 다 참아가며 너 키웠다는 것만 알아둬. 이 싸가지 없는 년아.'

왜 이 말만 내세웠는지...


실제로 어릴 적, 나는 하루에 학원을 7개씩 다녔다.

사진을 보면 항상 예쁜 옷 예쁜 가방을 두르고 있었고 하고싶다 먹고싶다 말하는건 다 들어주셨다.

그만큼 상도 많이 받고 내 삶도 즐거웠던 것 같다.

그녀는 비록 내가 못입고 못쓰고 못먹어도

내 딸만큼은 비싼옷, 좋은 학원 맛있는 밥.

아낌없이 지원해주는 현명한 엄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이라는 삶을 택한 것이다.



#삶은 언제나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빠는 젊은 시절 항상 술에 취해 경찰에 업혀왔다.

혹은 한 손에는 새파랗게 어린 내 손을 잡고 등에는 잠든 동생을 들쳐 업은 채 아빠를 데릴러 가야했다.

내 어린 기억에 아빠를 부축해 집까지 데려 온 경찰에게 택시비하라며 돈 만원을 쥐어주려 애쓰던 엄마 모습이 생생하다.

*잠깐 말하자면, 아빠는 안타깝게도 술만 들어가면 인사불성에 정치욕, 온갖 잡욕을 하며 바깥에서 받아 온 스트레스를 집안에 푸는 성격으로 변질됐다.

그도 한 때는 후배들을 휘어잡으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대학교에서 방송을 하며 영어 선생을 꿈꾸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첫 딸을 안았을 때는 회사에서 보너스로 30만원을 받았고, 회사 근처 여의도에 벚꽃이 필 때면 딸바보가 되어 연신 필름 카메라 플래쉬를 터뜨리고 목마를 태워주던 자상한 그였다.

현재는 20년간 홀로서기 자영업으로 전국 출장과 영업, 운영을 도맡아 두 자식 모두 대학까지 보낸 훌륭한 가장이다. 물론 술이 들어가기 전까지만.


오늘 날 하루를 살아가고 있기까지 지난 세월 숱한 집안 싸움과 폭력이 오고갔다.

부부의 싸움은 자식에게 이어졌고

혹은 자식과 부모 싸움이 부부싸움으로 번졌다.

온순하지 않았던 나는 학생시절 엄마와 매일같은 불화를 겪으며 집안에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집안 살림은 언제나 허공을 날라다녔고 내 방 또한 툭하면 뒤엎어졌으며 언제나 멍은 보랗고 검붉었다.

가족간에 고민상담은 커녕 청소년 상담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문가랍시고 상담왔던 여자가 마냥 좋진 않았지만 어쨌든 내 얘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우리는 좀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 서로 노력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했다. 그녀는 건들기만 하면 심기가 불편해 이빨을 드러냈고, 손이 올라갔으며 온갖 입에 담기 어려운 욕을 퍼부어댔다.

그리고 항상 나에게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니? 어? 말해봐.'

그리고 다시 폭력은 이어졌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데 실패했다.


그녀는 종종 그날 밤 딸에게 미안한 마음에 방에서 울었다고 한다. 심지어 다음날 학교를 다녀오면 선물이랍시고 책상 위에는 새 옷이 있었다.

미안하다 차마 할 수 없어서 돌려 전한 마음이라는 걸 알지만 매번 밥먹듯 그러니 용서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만큼 싫었다.

난 아직도 아픈데.

말로 다친건 그 어떤 물건으로도 아물지 않는다.


결국 고등학생인지 대학생 때 집을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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