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한 오프더레코드 : 밑미를 창업하고 오프더레코드 전시를 준비하면서
밑미를 운영한 지 4년 차가 되었다. 클리셰 같은 '3년만 버티라'말을 의식한 탓인지, 3년이 지나고 2024년이 되었을 때, 나는 새로운 감정에 도착해 있었다.
지쳤다도 아니고, 힘들다도 아닌, 잘 모르겠는 감정들이었다. 나는 그 감정의 실체를 파고들 때가 됐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4년 전의 그때처럼, 나를 다시 직면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사업을 떠나, 내가 정말 괜찮은지 알아야 했다.
2020년 6월에 에어비앤비를 퇴사하고, 2개월 동안 준비해서 8월에 밑미를 창업할 수 있었던 것은 실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심리적 안정을 보장하는 직장이라는 울타리 없이, 그냥 좋아서 해보는 일을 하고 싶었다. 친구들끼리 시작한 사업이라 가능했다. 우리끼리면 재밌을 거고, 해봤는데 잘 안되면 그만 두면 되니까. 그러니까, 밑미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는 자유의 삶이 열릴 거라 생각했다. 물론 내가 결정하는 삶인 것은 맞다. 다만, 나를 위해 시간을 쓸 결정은 할 수 없을 만큼 바쁜 삶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밑미와 직접적인 연결이 되지 않은 것은 늘 후순위가 되었다. 그것에 대한 정당성은 이 한마디로 충분했다.
'넌 지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잖아, 그리고 사업하는 사람은 다 바쁘고 그래".
달려옴에는 창업이라는 멋진 도전이, 밑미를 통해 변한 사람들의 격려가, 그리고 나를 믿고 함께 해주는 든든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건 분명 나를 설레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를 달리게 하는 동력의 진짜 주인은 책임감이라는 사실을 최근 알게 됐다.
밑미를 시작하고 3개월 차에 관심을 많이 받았다. 밑미를 취재하고 싶다는 미디어들의 연락이 왔고, 별 다른 홍보 없이 생소한 리추얼 프로그램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코로나라는 특수적인 상황도 있었다. 새롭게 심리 시장에 등장한 루키처럼 평가되고, 투자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많이 찾아왔다. 무엇보다 밑미 팬이라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결과에 대한 기대감 없이 시작한 일인데, 매력적인 결과가 내 앞에 있었다. 5개월 차부터 일이 몰려오기 시작하면서, 계획에도 없던 팀원들을 채용했다. 바로 그때, 내가 실험을 멈췄다는 사실을 최근 알게 되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의 실체는 거기에 있었다. 내가 아닌 타인의 기대가 나의 실험의 브레이크였다.
밑미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5개월 차에, 내 실험을 멈췄다니!
최근 8월에 이 사실을 깨닫고 좀 울고, 많이 시원했다. 충격적인 깨달음이긴 했다.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했으니까, 난 계속 도전하고 있다고 찰떡같이 믿었다. 하지만, 밑미라는 서비스를 시작했던 때의 나를 잊고 달리고 있었다. 나는 '나답게 사는 삶'이라는 주제로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싶었고, 밑미는 첫 실험이었다. 그건 확실히 실험이었고, 신나는 도전이었다. 하지만, 밑미 주변으로 사람이 몰려들면서,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첫 실험의 모습으로 밑미를 지금까지 끌고 왔다. 밑미가 만든 리추얼 서비스가 더 잘 되어야 했고, 돈을 내고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면 어떻게 개선할지만 생각했다. 물론 그 사이 작은 시도들은 많이 했지만, 그것들은 진짜 실험은 아니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무엇이든 관계가 생기면, 책임을 지려는 나의 애씀이었고, 그건 나의 오랜 습성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밑미에 실망하지 않도록, 밑미가 약속한 일을 잘 해내는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난 분명 변했는데, 그 모습은 4년 전 에어비앤비를 퇴사했을 때와 참으로 닮은 모습이었다. 내가 진짜 해야 하는 것들은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이라고 핑계 대고, 들춰보지 않았다.
누가 물어보면 이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겪어온 4년은 분명 나를 만나는 과정이었다. 내가 얼마나 밑미가 추구하는 가치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는 더 확실해졌다. 나는 쓸모나 성과를 논하는 사회에서, 자기 다운 길을 가는데 시간을 쓰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을 하고 싶다. 그러려면,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나는 여전히 이 일이 향하는 곳을 사랑하지만, 그곳으로 가기 위해 온전히 나다운 방법을 시도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다. 밑미가 꿈꾸는 세계를 사랑하냐고 물으면 온몸으로 yes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려면 나를 소모하지 않고, 소외시키지 않고, 나만의 실험을 계속해야 하는데, 나는 나를 소모하고 있었다. 소모되고 있다는 그 두려움이 커지는 날이 계속 많아졌다. 그런 날에는 아무리 피곤해도 책을 찾아 읽었고, 사람을 만나는 약속을 모두 줄였다. 책을 읽지 않거나 혼자 있지 못한 날은 소모되고 있다는 감정으로, 내가 사라지는 기분을 막을 수 없었다. 근데 이제 알았다. 난 실험을 하고 탐험해야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실험을 하고 있지 않으니, 너무 답답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일단 가슴이 후련해졌다.
통찰의 순간과 행동에 옮겨야겠다는 충동 사이에는 언제나 타협해야 할 길고 긴 불안이 놓여있기 마련이다. -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 중에서
책에서 이 말을 읽고 계속 생각했다. 통찰이 온다고, 행동으로 바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타협해야하는 길고 긴 여정을 겪어야하는 것이구나.
밑미를 하면서 '조금이라도 나를 돌보세요. 관찰하세요'를 외쳤지만, 각종 앱 푸시와 자극이 둘러싼 일상에서 밑미의 외침은 때론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앱 푸시도 없이 매일 해야 하는 리추얼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앱 좀 제발 만들어주세요'라는 말을, '강요하는 게 너무 없어서, 돈 아까워요'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근데 바로 응답할 수 없었던 것은, 지금 서비스에 여러 기능을 붙이는 게 내가 하려던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삶에서 진짜 변화를 얻으려면 스스로 얻은 거여야 한다. 어떤 이득이 있어서, 어떤 조건이 있어서 움직이게 되면, 스스로를 움직이는 근력은 계속 약해지니까.
하지만 확실한 것이 있었다. 불편함과 느림 속에서도 자신을 발견하고, 위로하고, 내면적으로 성장하는 밑미의 사용자들이 있었다.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밑미 너무 고마워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꾸준히 리추얼 기록을 하고, 회고하면서 자신의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추상적으로 말해온 혜택인 '자발성과 연대감'을 몸으로 느낀 사람들이었다.
오프더레코드 off-the-record. 밑미가 하는 일에 가까웠다.
모두가 공식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 비공식적으로 이야기하는 곳.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밑미가 하는 서비스였다. 그리고 그 기록들이 딱 오프더레코드였다. 과정이 생략된 타인의 멋진 결과물은 비교 대상이 된다. 그래서 시작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밑미에서 하는 리추얼은 순수하게 자신과의 대화를 기록한 시간이었다. 그런 날 것들을 서로 공유하면서 위로가 된다는 것을 밑미 사용자들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리추얼 기록이 밑미웹에 쌓이고 있음에도 밑미 메이트가 아니면 볼 수 조차 없는 기록들이 우리 안에 많이 쌓여있었다. 일부러 하고 있는 것을 그렇게 감추냐는 이야기를 듣곤 할 만큼, 노출하지 않았던 것은 검열이나 완벽주의를 완화시키는 것이 밑미가 추구하는 방향이기 때문이었다.
밑미가 날 것의 기록물을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다. 모두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대부분의 시간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떤 결과를 만들기 전에는 누구나 가장 어설프고, 불완전한 과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었다. 그래야 시도할 수 있고, 시도해야 자신에 대한 신뢰가 생기니까. 있는 그대로 드러낸 누군가의 기록물에서 반짝임을 찾는 눈을 가지기를, 용기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했다. 그 과정이 밑미 리추얼 커뮤니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올 초부터 준비한 전시였다. 밑미에서 3개월 이상 리추얼을 한 사람 중에 그 기록을 회고하고 기록물을 제출할 사람을 찾는 일부터 시작했다. 처음에 240명의 사람이 기록물을 제출하겠다고 신청했고, 이들이 모두 도전할 수 있게, 과정을 돕는 프로그램도 기획했다. 몇 명이 실제로 기록물을 제출할지, 어떤 기록물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시를 준비하다 보니, 10월이 왔다.
결과적으로 117명의 기록이 전시된다. 밑미홈으로 도착한 100개가 넘는 기록물을 하나씩 뜯어볼 때마다 때론 두근거리고, 때론 철렁거렸다. 우편으로 보낸 기록자들은 자식을 보낸 것처럼 '잘 갔나요?'라고 연락이 왔다. 이걸 제출하는 사람의 진지한 마음들은 기록에서, 연락에서 계속 느껴졌다. 우리가 바랬던 오프더레코드, 바로 일기장 같은 기록 도착했지만, 타인에게 보여주는 '전시'라는 말에 이 기록물을 놓을 생각을 하니 두렵기도 했다. 다른 결과물처럼 스토리텔링이 된 것도 아니고, 기승전결이 있는 것도 아닌데, 누군가가 '뭐야? 이걸 왜 보란 거야?'라고 말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올라왔다. 기록물을 받고부터는 그런 생각을 버렸다. 우리는 100개가 넘은 기록물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것만 생각했다. 혹시나 그 기록물이 손상될까,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하며 지퍼팩에 기록물을 보관했고, 넘버링을 했고, 각 기록물의 이름도 붙였다. 하나하나 관계를 맺고 나니 리추얼을 해온 사람들이 소중해졌다.
하지만 힘이 부칠 때마다, 멋진 전시를 하는 팝업 전시에 초대되어 갈 때마다, 초라한 마음도 들었다. 우리 전시는 빠르게 돌아가는 사회와 역행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마케팅 예산을 가지고 멋진 캠페인을 펼치던 과거의 마케터 시절이 그립기도 했지만, 그 감정은 아주 순간적으로 왔다 사라졌다. 다행히도 난 변해있었다.
이 전에 살았던 '타인의 기대에 머무는 삶'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 나의 쓸모를 증명하고, 나의 가치를 스스로 전시하고, 그 결과로 나를 증명하는 세계에서는 타인에게 나를 드러내느라 지금의 나를 보지 못하니까. 내가 한 인간으로 왜 사는지, 존재 그 자체를 고민하고, 지금을 사는 내가 되고 싶다. 최근 피크닉 전시에서 발견한 '우메다'처럼.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며 돈과 명성을 추구하는 프로와 달리,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에만 몰두하며 순수한 기쁨을 추구하는 아마추어의 특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거기에는 언제나 도전해 볼 만한 미지의 영역이 나타난다. 이 '정신적인 아마추어리즘'이야말로, 끊임없이 새로운 대상, 새로운 방식을 고민했던 작가가 자신에게 부여한, 평생에 걸쳐 달성하고 싶은 과업이었다.
그 실험의 시작과 끝에 이 전시가 있다. 전시의 성패와 상관없이 난 가장 순수하게 이 일을 했다. 한 사람의 과정이 다른 사람의 과정에 용기의 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프더레코드가 지난 다음, 나의 진짜 밑미가 시작되길 기대하고 있다. 그 누구의 기대보다, 내가 기대는 나를 만나는 과정을 시작할 것이다. 그 변화의 직전에 선 나를 응원하며, 오프더레코드에 초대합니다. 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