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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린 Jan 29. 2017

지하철을 시끄럽게 한 죄, 역무원을 수고롭게 한 죄

여성의 목소리는 언제쯤 죄가 아닌 권리가 될까

7시를 조금 넘긴 시각, 여전히 2호선 지하철은 퇴근하는 직장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나는 적당히 기대설 곳을 찾아 익숙하게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1분 여 정도가 지났을까. 갑자기 날 선 여자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가 계속 제 가슴을 밀치셨잖아요!"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살폈다. 중년 여성과 할아버지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왜 계속 가슴을 밀치시냐고요? 한번 밀친 거 가지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요!"


중년 여성은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로 할아버지를 향해 소리쳤다. 중년 여성의 말을 들어보니 할아버지는 사람들로 가득 찬 지옥철에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계속해서 중년 여성을 밀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밀침은 계속 가슴 부위를 향해 이루어졌고, 이에 이상함을 느낀 여성이 목소리를 낸 것이었다.


"이 미친 x이 어디서 생사람을 잡아?"


할아버지는 걸쭉한 욕과 함께 여성에게 삿대질을 했다. 논리적으로 억울함을 피력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할아버지는 폭력에 가까운 욕을 쏟아내었고, 항변하는 여성의 목소리에는 짙게 울음소리가 베어났다. 하지만 여성은 멈추지 않았다. 무자비한 욕설과 무논리 한 발언에 주늑들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순간 멀리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 참 조용히 합시다! 그냥 좋게 넘어가요!”


목소리에는 짜증이 짙게 배어 있었다. 가뜩이나 피곤한 퇴근길에 소란을 피우지 말라는, 가슴 한번 밀친 거 가지고 유난 떨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 발화를 시점으로 여기저기서 조용히 하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머지 승객들은 침묵했다. 침묵함으로써 동의했다. 여성의 항변이 무력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여성은 이러한 야유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전화기를 들어 역무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다음 정차역에 역무원을 배치해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바라보며 분노와 무력감 그리고 심한 자기 혐오감을 느꼈다. 여성의 항변을 유난으로 만들어버리는 중년 남성들의 짜증 섞인 목소리, 침묵하는 대다수의 승객 그리고 그 상황에 뛰어들 용기가 없어 가만히 서 있던 나. 바보 같은 나. 이 모든 상황들이 너무나도 지옥 같아서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나는 차라리 눈과 귀를 막고 싶었다.

 

그때, 내 바로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여자 친구에게 잘난 체 하듯 말했다.


"저런 사람들 때문에 괜히 역무원만 고생하지"


무엇이 저 남자를 저렇게 당당하게 만드는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똑바로 들고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남자의 움찔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그 순간 지하철이 정차했고 나는 도망치듯 지하철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내릴 역이 아니었는데도. 꽉 다문 잇새로 추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침묵을 종용하는 남성들의 목소리에 죄가 된다. 조용해야 할 지하철을 시끄럽게 한 죄, 역무원을 수고롭게 한 죄. 언제쯤 그들의 목소리가 죄가 아닌 당연한 권리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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