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를 통제하고 소비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아이패드 병이라는 것이 있다. 아이패드를 갖고 싶으면 아이패드를 사야만 완치가 된다는 병이다. 나에게는 프라이탁이 그랬다. 프라이탁은 버려진 천막, 자동차 방수포 등을 활용하여 가방, 필통, 휴대폰 케이스 등으로 업사이클링하는 스위스 브랜드이다. 업사이클링 제품 특성 상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제작하다보니 기성품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 손바닥을 쫙 펼친 것보다 약간 큰 메신저 백이 2-30만원에 이른다. 1년 전 부터 프라이탁 가방이 사고 싶어 프라이탁 홈페이지를 습관적으로 새로고침했다.
사실 직장인이 부담하기에 그리 부담되는 가격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매달 고정적으로 나가는 지출도 아니거니와 일년동안 고생한 나에게 보상하는 정도로 쓰기엔 적당한 숫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 프라이탁 가방을 살지 말지를 약 1년을 고민한 끝에 샀다. 내가 좋아하는 색의 프라이탁을 맨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하기를 1년. 드디어 가방을 사니 갈증이 해소된 느낌이었다.
문득 대학생 시절이 생각났다. 나는 당시 운이 좋게도 고등학교 친구들의 동생 여러명을 과외하고 있었고 덕분에 생활비 이상의 돈을 벌며 넉넉한 생활을 했었다. 공강 시간에는 학교 앞에 있는 현대백화점을 들러 옷과 가방을 구경하는 것이 취미였다. 어느 날 맘에 드는 가죽 가방을 발견하였는데 50만원 정도였다. 체크카드 계좌에 있는 금액을 확인하고 정말 아무런 고민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가방을 구매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히 대담한 소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가방은 세번인가 매고 색깔이 부담스러워서 방에 내팽겨 두었다가 곰팡이가 슬어서 버렸다.
내가 소비를 통제하기 시작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부터이다. 당시 코로나 촉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주식, 부동산 등 자산의 가격이 급격하게 올라가며 재테크 열풍이 불었다. 나 또한 자연스럽게 재테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20대부터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며 이른 은퇴를 목표로 하는 '파이어족'에 대해 알게되었다. 참으로 멋진 개념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 환경에서 자라며 언제나 돈에 대한 강박이 존재했던 나에게 40대 초에 경제적 자유를 가지는 것은 굉장히 설레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도 파이어족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 해부터 지출을 통제하고 남는 금액은 모두 저축하고 투자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내 스스로가 참 별로라고 느껴지는 순간도 분명 존재했다. 모든 소비의 기회비용을 따지며 나의 취향과 욕구를 재단했다. 같은 가격이면 디자인이 아름다운 것보다는 기능이 좋은 것을 샀고, 아무리 내 취향의 물건이라도 웬만큼 필요하지 않은 것은 구매하지 않았다. 가끔 친구들에게 기분내기로 했던 선물의 횟수도 현저하게 줄었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몇번 겪게되니 내 영혼이 궁핍해지지 않으면서도 주변인들을 챙길 수 있을 정도로 융통적인 소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과거에 비하면 나는 소비에 인색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이 경우에는 이장일단 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나는 파이어족이 되기를 목표한 순간부터 소비로부터 해방되었다. 이것은 소비를 통해 얻는 행복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다. 매달 예상보다 큰 할부값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사라졌고, 야근하며 쌓인 스트레스로 욱하고 사버렸던 옷가지와 물건들로 내 방을 채우지 않아 좋았다. 물건이 사라지니 물건을 꾸준하게 관리해야할 필요도 사라졌다. 먼지를 쓸고 닦을 필요가 없어졌고 자주 빨래하지 않아 좋았다. 소비에 들이는 집중력, 예를 들어 대안을 비교하고 어떻게든 할인받으려고하는 노력들이 사라지니 자연스럽게 그 집중력을 독서, 업무 등 생산적인 일에 쓸 수 있었다.
누군가는 고작 핸드폰과 충전기 정도만 들어가는 손바닥만한 가방을 사는데 20만원을 썼다고 뭐라할 수 있겠다. 공감한다. 하지만 1년을 고민해서 산 가방을 메고 나갈 때의 기분은 상상 이상으로 짜릿하다. 지출을 통제하는 와중에 내 취향에 맞는 물건을 위해 소비 금액을 배정하고 실제로 구매하는 과정으로 나의 자존감이 올라가는 경험을 한다. 진짜 내 취향이 무엇인지 깨달아간다. 소비를 통제하며 소비로부터 해방된다. 경제적 자유로 향하는 길에서 얻은 뜻밖의 수확이다.
오늘도 가계부를 정리하며 남은 2월달의 지출을 계획한다. 가계부에 남긴 프라이탁의 흔적이 마치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처럼 강렬하다. 남은 2월 달은 조금 지출을 줄여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