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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Apr 19. 2017

'착한 딸'에 저항하기

엄마라는 존재에서, 딱 한 번만 벗어나 볼 수는 없을까?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새로 산 팔찌를 욕실에 걸어놨다. 엄마가 그걸 보더니 팔찌가 예쁘다며 언제 샀냐고, 얼마에 샀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정확한 가격을 말하는 것에 살짝 망설이다가, 가격을 일부러 조금 낮춰서 말했다. 그날 엄마와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며칠 전 친구에게 사준 밥값에 대해 말할 때도 그랬다. 내가 이렇게 망설이는 것은 기본적으로 '돈을 쓴다'는 것에 대해 아직도 엄마의 눈치를 보기 때문인 것 같다. 내 돈을 벌어서 내가 쓰는데도 눈치를 본다. 눈치 볼 필요가 없는 것인데도, 꼭 눈치를 보게 된다. 


 엄마에게 쓰는 돈보다 나에게 쓰는 돈, 혹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물건에 쓰는 돈이 훨씬 더 늘어난다. 때로는 엄마에게 밥 한 끼 사는 돈보다 내가 좋아하는 귀걸이를 사모으는데 더 많은 돈을 쓰고, 때로는 엄마에게 투자하는 시간보다 좋은 공연 한편을 보러 다니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러면 나는 때때로 '불량한 딸'이 된 기분이 든다. 


 사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인데 자꾸 그런다.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사고 싶은 걸 사는 건 두말할 필요 없이 너무 당연하고 그 어떤 설명이나 변명도 필요치 않은 일인데 자꾸 그런다. 가격을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되는데 자꾸 낮춘다. 괜한 핀잔 듣기 싫어서. 엄마는 특히 "비싸네" "요즘 돈 많이 쓰네" 이런 말 한마디씩 꼭 덧붙이기를 좋아한다. 사실 이 말의 눈치를 가장 많이 보게 되는 것 같다. 합리적인 소비를 할 필요는 있지만 난 이미 엄마의 그 말을 듣기 전부터 충분히 고민했는데. 


 엄마 허락 없이는 돈 함부로 쓰거나 많이 쓰면 안 되는 딸, 엄마 말(또는 잔소리)을 거역하거나 무시하면 안 되는 딸, 엄마 없이는 행복하면 안 되는 딸. 이런 이미지들이 엄마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있다. 그래서 알 수 없는 죄책감 같은 게 생긴다. 


 사실 엄마 허락 없이도 내 돈은 내가 벌어서 맘대로 써도 되는 건데, 엄마의 요구도 때론 거절할 수 있는 건데, 엄마 없이 행복해도 되는 건데. 


 돌이켜보면 나는 술 한 번 마시는 것도 투쟁이었다. 새내기 때는 엄마 몰래 마셨고, 마시면 큰일 나는 건 줄 알았고, 거의 마시지도 않았지만 (한두 모금) 그래도 집에 가면 꼭 엄마한테 안 마셨다고 거짓말을 했다. 심문을 당했을 때 마음이 약해져서 이실직고를 했다가 혼나면 다 내 잘못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대놓고 편의점에서 수입맥주를 4캔씩 사다가 똑딱하면 열리는 냉장고 물병 칸에 쟁여놓는다. 엄마도 이제는 "또 맥주 샀어"라고 한마디 하고 마는 정도고, 어쩔 땐 그냥 말없이 지나간다. 나는 이게 내가 끊임없이 싸워서 얻은 결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심리상담을 받다가 상담사 선생님께 "그래도 xx 씨는 어머니의 그런 것에서 많이 벗어나려고 애쓰시네요, 그건 잘 하고 있는 거예요"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갑자기 궁금하다. 금기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 그런 걸까? 내가 엄마의 반대와 억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내가 하고 싶은 걸 지켜내려 했던 것, 끊임없이 부딪히고 싸웠던 것. 사실 끝까지 말 잘 듣는 딸로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난 그러지 않았다. 왜였을까?




 회사 다니며 그런 사람을 많이 봤다. 울며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사람. 대학생활 내내 부모님 압박으로 하기 싫은 CPA 공부를 했다는 분도 있었고 (결과는 당연히 잘 안 풀렸다) 부모님과 싸우고 싸우다 우왕좌왕 진로를 변경한 경우도 허다했다. 밤 중에 그냥 그분들 생각이 났다. 


 하기 싫은 일을 해도 '살 수는' 있다. 당연히 살 수는 있는데, 행복하지 않아 보였다. 일상에서 행복한 순간들이 분명 있긴 있겠지, 하지만 그걸 제외한 시간들의 고통이 너무나 커 보였다. 나는 그분들을 보며 대학 때 100퍼센트 물질적인 독립을 이루진 못하더라도, 정신적인 독립을 반드시 이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지 못하면 졸업하고 취직할 때도, 취직하고 결혼할 때도, 똑같이 계속 부모님께 끌려다닐 테니까. 비단 부모-자식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는 그 어떤 종속관계에서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할 테니까. 그 고리를 이제라도 끊어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처럼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씁쓸하게 웃고' 싶지 않다. 지금도 때로는 약간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아 무섭지만, 그렇게 웃고 싶진 않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는 건 위험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분들이 끝끝내 불행했던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조차 몰랐다는 데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젊을 적에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원하는지라도 알았더라면, 그렇게 씁쓸해하진 않았으리라. 그들은 부모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반강제적으로, 또는 반 자발적으로 질질 끌려다니느라 다른 곳을 둘러보지 않았다. 그게 나이를 먹어 후회로 돌아가는 것 같다.


 이왕이면 행복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웃고 싶다. '착한 딸'에서 점점 멀어지고, 엄마와는 점점 더 거리를 두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냥 나대로, 있는 그대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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