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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R Jul 17. 2019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두세요.

지하철 에피소드

한 1년 전쯤 오전에(출근시간 조금 지난 시간)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당당하게 졸고 있는 젊은 청년을 발견했다. 평소에도 아줌마나 아저씨, 노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걸 봐왔기 때문에 짜증 나도 겉으로 드러내거나 하지는 않는데 새파랗게 젊은 놈이 앉아 있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당장에 졸고 있는 젊은이를 툭툭 쳐서 깨워 지금 여기가 임산부 배려석인걸 알고 앉아서 쳐 졸고 있는 거냐고 이 개념 없는 ㅅㄲ야 하면서 따지고 호통을 치며 정의를 구현? 하고 싶었지만 한눈에 봐도 체구가 크고 분명 무슨 운동이던지 많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이 젊은이의 곤한 단잠을 깨웠다고 화가 나서 나에게 해코지라도 한다고 가정했을 때 40세 넘은 쪼그맣고 배 나온 겁 많은 아재인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렵지 않겠냐는 생각에 급 마음이 차분해져서 분노고 나발이고 일단은 자는 모습을 째려보며 상황을 지켜보자 생각하며 젊은이 앞에(깨지 않게?) 자연스럽게 가서 섰다. 


한 두세 정거장 지나니 임산부로 보이는 분이 타셨다. 배가 나온 걸로 봤을 때 7-8개월은 되어 보였는데 아직도 내 앞에 있는 이 젊은ㅅㄲ는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쳐 자고 있고 임산부가 서서 가는 모습을 보니 차분해진 내 마음은 다시 분노가 꾸역꾸역 차올라 무슨 수를 쓰던 저 놈을 깨워서 그 자리에 주인을 찾아줘야겠다는 생각에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마음이 초초해지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이제 내가 내려야 할 정거장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내리면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 


그때, 한 가지 방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성공할지 어떨지 모르고 만약 실패하면 저 젊은이의 단잠을 깨운 죄로 해코지를 온몸으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다시 침착 해졌지만 옆에 있는 임산부를 보니 용기를 내서 반드시 해야(깨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곧 다음 정거장에 도착한다. 그전에 이 뻔뻔하고 개념 없는 젊은이를 깨워 옆에 서있는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해야 한다. 


문득 아래를 보니 개념 없는 젊은이의 운동화가 눈에 띈다.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운동화다. 나도 어렸을 때 몇 번 샀었지만 관리하기 까다로워서 조금만 내버려두면 밑창이 노랗게 변해서 볼품없던 나이키 에어포스 1 올 백이다. 새로 산지 얼마 안 됐는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새하얗다. 지금은 운동화는 편하면 장땡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브랜드에 상관없이 신어보고 편하고 가격대만 적당하면 사서 신는 아재지만 20대에는 나도 나이키에 푹 빠져 색깔, 모델별로 에어포스를 사서 애지중지 했었다. 이 젊은이도 분명 엄청 애지중지 하면서 신고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부로 에어포스 1 올백은 새 하얀 순결함을 더 이상 지키지 못할 것 같다. 왜냐하면 곧 내가 짓밟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키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니 주인인 젊은이는 너무 뻔뻔하게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편안하게 졸고 있으면 안 됐다. 아무리 지금 청년의 삶이 힘들고 퍽퍽해도 여기서 이렇게 졸고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무튼 문이 열리자마자 밟고 내리면 문이 닫히기 전에 깨서 나를 쫓아 뒤따라 내릴 수도 있기 때문에 타이밍을 잘 맞춰야 했다. 가만있어보자 지하철 문이 열리고 몇 초 있다가 닫히더라?라고 생각해봤지만 내가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대충 감으로 때려 맞춰야 한다. 근데 만약 시간을 잘못 계산해서 밟고 못 내리면 어떡하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만 해야 한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물론 이 젊은이의 새하얀 나이키 에어포스 원을 밟고 내리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내가 이런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 말고도 이 지하철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다. 나만 모른 척하는 게 아니란 얘기다. 지금 당장 마음을 고쳐먹고 얌전히 그냥 내리면 위험천만한 상황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봉변을 당할 일은 애초에 만들지를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할 일도 없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다. 나도 남자다.(남자라고 꼭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라는 법은 없다) 한 번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하는 거다. 설마 죽기야 하겠나? 멱살 좀 잡히고 재수 없으면 한 대 맞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나이키를 새로 사줘야 한다거나... 순간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하며 정거장에 도착하고 지하철 문이 열렸다. 슬며시 문쪽으로 자리를 이동하며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1,2,3, 그리고 젊은이의 새 하얀 나이키 에어포스 원을 내가 신고 있는 검은색 낡은 로퍼로 힘 있게 꾹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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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와이프가 채아를 임신했을 때 많이 힘들어했었다. 직장인이고 임신 5개월 차에 접어들었을 때 조산기가 있어서 입원도 했었고, 임신성 당뇨까지 왔었기 때문에 임산부가 밖에 다닐 때 얼마나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연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제 어디에서나 세심하게 배려받고 안전하게 있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임산부다. 특히 임신 초기에 더 위험하고 조심해야 하는데 티가 안 나니 그냥 참고 다니는 임산부들이 많은 것 같아서 더 안쓰럽다. 


나도 예전부터 임산부를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직접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경험한 다음에 갖게 되는 생각은 하늘과 땅 차이다. 맨날 출산율이 OECD 국가 중에 최저니, 인구 절벽이니 떠들고 출산장려를 위해 쓰는 세금도 많이 쓰지만 정작 출산을 하게 되는 당사자인 임산부를 보호하고 배려하는 사회인식이나 시스템은 아직 밑바닥이라는 사실이 절망스럽기도 하다. 


왜 사람들이 아이를 갖기 두려워하고 기피하는지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인식으로 인한 어려움도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도 세금을 써야 하지 않을까? 젊은 사람을 예로 들기는 했지만 젊은 사람들은 SNS나 미디어를 통해 금세 이런 분위기를 알 수 있는 환경이 있기 때문에 걱정 안 하는데 특히 아무 생각 없이, 거리낌 없이 임산부 배려석에 털썩털썩 앉는 어른들을 볼 때마다 자괴감이 든다. 이런 분들의 인식의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어른들이 자주 접하는 공중파나 미디어에서 지금보다 더 자주 많이 알리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임산부를 위한 자리가 있음을 더욱 적극적으로 알리는 퍼포먼스(지하철 한 칸을 전부 임산부 전용칸으로 디자인하고 운영한다던지, 노인이라고 해도 그 자리는 비워둬야 한다는)라도 벌여서 인식을 바꾸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인식을 바꾸지는 못해도 최소한 부끄러운 일이라는 시그널을 줘서 어른들의 행동이라도 바뀌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주변부터, 그리고 나부터 배려하는 마음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졸라?) 꾸준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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