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
윤미가 책방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왔다. 10년이 훨씬 지났는데 나는 그 눈을 기억하고 있다. 그 목소리, 그 웃음이 그대로였다. 세월도 이겨먹는 윤미가 뉴욕 퀸즈에서 지구불시착까지 왔다. 윤미는 20년 전쯤 직장 후배였다. 아마 면접도 내가 봤던 것 같다. 윤미는 나와 한 팀으로 일했다. 내가 한 사람을 얼마나 알 수 있겠느냐만은 그 사람의 성심이 꽃과 같은지 철과 같은지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윤미는 꽃 같았다. 여리고 여리다 시들고 마는 예쁘기만 한 꽃이 아니라, 노지에 피는 뜰꽃이었다. 어느 바람에도 잘 견디는 무해한 들꽃이었다. 그래서인지 코스모스를 보면 윤미 생각이 나곤 했다. 나는 윤미를 남기고 회사를 나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윤미도 퇴사했고 뉴욕에 가서 억척스럽게 일하며, 공부하고 취직도 했다는 소식과 일본인을 만나 딸 리사를 낳았고, 한국이 그립고, 한국 책이 읽고 싶다고 여러 번에 걸쳐 편지를 보내왔다. 나도 역시 둘째가 태어났고, 회사가 망하고, 책방을 시작했고, 책을 여러 권 냈다고 여러 번에 걸쳐 답장을 보냈다. 윤미는 내가 남산 근처에서 전시를 할 때 한국에 와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도 조금 전 문을 열고 얼굴을 삐쭉 내밀며 웃어 보이던 얼굴이 지금도 하나지 바뀌지 않고 그대로여서 신기했다. 그때는 혼자였는데 이번엔 졸리다가도 어느새 일어나 떼를 쓰다가 검을 휘두르고 몬스터를 외치는 세 살 베기 리사를 유모차에 싣고 왔다. 그 뒤를 토모타라는 일본인이 따라 들어왔다. 토모타는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그는 책방에 붙어있는 페터슨의 포스터를 보고 좋아했다. 윤미가 말해주길 책과 사진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가까워졌다고 했다.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아 나도 기쁘게 토모타를 만날 수 있었다. 윤미는 토모타와 영어로 대화하고 리사와는 한국말로 말했다. 나는 토모타와 간간히 일본어로 이야기했다. 리사는 나에게 영어로 몬스타역할을 시켰다. 윤미는 오랜만에 한국 방문을 계획하며 나와 두 시간을 약속했다. 20년 만에 2시간이라니 혹독하게 짧은 시간이지만 오랜만에 한국에 온 윤미는 분단위로 계산된 스케줄이었을 것을 생각하면 과분한 시간임에 틀림없다. 회사를 나오고 연락하는 사람은 윤미가 유일했다. 그 말을 하고 나서 윤미는 아직도 연락이 닿는 것에 너무도 감사한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윤미는 나에게 뉴욕이라는 스케일을 하나의 대명사로 압축시켜 주었다. 그 대명사는 물론 윤미이다. 뉴욕은 윤미.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자연스럽게 해 주었다. 뉴욕에 친구가 있다니. 내 친구가 뉴요커라고 자랑할 수 있게 해 줬다.
윤미는 미국에서 읽을 책이 없는데 오늘 벼루고 왔으니 행여나 돈을 깎아줄 생각이랑은 조금도 용서 안겠다고 했다. 우린 적당한 선에서 잘 타협을 했다. 나는 조금 손해를 봐도 윤미를 위해서라면 기쁠 준비가 되어있다. 그건 윤미도 마찬가지였다. 리사는 적응이 빠른 아이였다. 아파트의 작은 모래 공원에서도 잘 놀았다. 신발을 집어던지고 흙을 파고 노는 아이 옆에 풀썩 주져 않아서 엄마 팔에 흙을 뿌려도 윤미는 팔을 내어줄 뿐이었다. 더러운 것이라며 아이를 몰아세우는 한국엄마와 확연히 비교되는 미국엄마였다.
우리는 이 동네 최고의 맛집 페페그라노에서 파스타를 먹었다. 토모타도 윤미도 맛있다고 했다. 파스타가 줄어들고 우린 헤어질 시간이 됐다. 택시 뒷자리에 윤미와 리사 토모타가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사진이라도 찍어 둘 것을, 내내 후회하고 말았다.
윤미는 내 그림을 보며 뉴욕 아트북 페어에 나오면 좋겠다고 했다. 도와줄 거라며 집이 넓지는 않지만 내어줄 방은 얼마든지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만약에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 그래도 결론은 열어두자 싶어서 웃어 보이는 게 최선이었다. 사실 나는 뉴욕 아트북 페어보다 더 간절하게 원하는 일이 있었다. 윤미를 토모타를 리사가 아주 아주 숙녀가 될 때까지 계속 볼 수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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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택수